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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버려진 둑을 막다
1960년대 초, 안면도 갯가
1960년대 초, 안면도 중장리의 살림살이는 여전히 팍팍했다.
황토밭에 감자와 보리를 심고 갯벌을 훑어도 대식구 끼니를 잇기 어려웠다.
남의 논을 얻어 부쳐봤자 가을이면 도지로 절반 넘게 떼어주었다.
손에 쥐는 것은 몇 됫박의 벼뿐이었다.
밥상에는 늘 거친 보리밥이나 시래기죽이 올랐다.
흰쌀밥을 배불리 먹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청년 배병희는 매일같이 낫과 지게를 챙겼다.
산에서 땔나무를 베어 나르고 밭을 갈았지만 가슴속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농사지을 온전한 우리 집 논을 일구고 싶었다.
중장리 남쪽 갯가에는 끝없는 회색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썰물이 질 때마다 바다는 아득히 물러나며 질척한 뻘밭을 드러냈다.
갈대와 칠면초가 우거진 갯골 어귀에 거대한 돌무더기가 누워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기 둑을 쌓다 내버려 둔 옛 방조제 터였다.
완공 직전 패망하자 공사는 그대로 멈추었다.
십수 년 동안 파도에 씻겨 둑 허리는 끊어졌지만 바닥의 석축은 굳건했다.
지팡이를 짚은 아버지가 버려진 둑 터를 오래 바라보았다.
"맨바닥 뻘을 막는 건 어림없어도, 저 옛 둑 터를 물고 들어가면 바닷물을 돌려세울 수 있다."
아버지는 곰방대를 털며 나직이 말했다.
거친 바다를 막아내고 기어이 논을 일구겠다는 뜻이었다.
거센 바닷물을 막아서는 일은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하지만 배병희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막아봅시다, 아버지.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아버지가 뜻을 세우자 세 아들이 움직였다.
맏형과 둘째 형, 그리고 배병희가 지게와 쇠스랑을 둘러멨다.
그러나 가족의 힘만으로는 갯골을 메울 수 없었다.
배병희는 마을로 가 이웃 장정들을 모았다.
"일손의 품삯은 하루도 미루지 않겠습니다.
곡식이든 돈이든 정직하게 쳐드리겠습니다."
배병희의 신용을 아는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괭이와 삽을 든 일꾼 수십 명이 갯가로 모였다.
썰물이 지자 사내들은 일제히 갯벌로 뛰어들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시커먼 개흙이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걸음을 뗄 때마다 쩍쩍거리는 소리가 갯벌을 울렸다.
배병희는 야산에서 캔 잡석과 황토를 지게 가득 얹었다.
거친 짚 멜빵이 어깨뼈를 짓눌렀지만 이를 악물고 갯골로 향했다.
소달구지가 초입까지 돌을 실어 나르면 일꾼들이 나누어 지고 날랐다.
등줄기마다 소금기가 하얗게 버석거렸다.
그저 흙과 돌만 쏟아부어서는 바닷물을 당해낼 수 없었다.
배병희는 가마니에 흙을 채우고 솔가지와 억새풀을 엮었다.
돌과 흙가마니를 쌓고 솔가지를 덮어 물살에 쓸려나가지 않도록 틀을 잡았다.
끊어졌던 둑의 양쪽 끝이 좁혀져 갔다.
마지막 물목이 가장 위태로운 고비였다.
둑이 좁아질수록 물살은 거세졌다.
밀물이 밀려오던 어느 날 오후, 둑이 거센 파도를 맞닥뜨렸다.
소용돌이치는 바닷물이 좁은 틈새로 파고들었다.
쌓아 올린 흙가마니와 잡석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바윗덩이마저 흙탕물 속으로 굴러떨어지며 사라졌다.
순식간에 둑 허리가 터져나갔다.
일꾼들이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물러섰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여.
밑 빠진 독에 돌 붓기지, 이걸 어떻게 막는단 말이여!"
일꾼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공사가 수포로 돌아갈 판이었다.
배병희는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둑 끝에 서서 소용돌이치는 물길을 쏘아보았다.
물길의 흐름을 읽어야 했다.
배병희는 물때를 계산했다.
물길이 가장 잦아들고 조수간만의 차가 적은 조금 물때였다.
"조금 물때를 노려야 합니다.
그리고 바닥에 말뚝을 깊이 박아 뼈대부터 세워야 합니다."
배병희의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살을 갈라 세울 뼈대가 먼저였다.
삼 형제는 산으로 가 참나무와 소나무를 베어내 말뚝 수십 개를 깎았다.
말뚝 끝을 뾰족하게 벼리고 새끼줄을 꼬았다.
조금 물때의 첫날, 간조 시간이 찾아왔다.
배병희는 참나무 말뚝과 쇠메를 메고 개흙으로 뛰어들었다.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흙탕물 속에서 말뚝을 곧게 세웠다.
"형님, 꽉 잡으시오!"
둘째 형이 말뚝을 부둥켜안았고, 배병희는 쇠메를 치켜올렸다.
무거운 쇳덩이가 허공을 가르고 말뚝 머리를 내리찍었다.
쿵, 쿵, 쿵.
쇠메질이 이어질 때마다 말뚝은 개흙 속으로 깊이 박혀 들어갔다.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터진 물집 위로 진흙이 엉겨 붙어 쓰라렸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어깨 근육이 쑤셨지만 이를 악물고 쇠메를 내리쳤다.
스무 개 넘는 말뚝이 물목을 가로질러 박혔다.
배병희는 말뚝 사이를 새끼줄로 묶고 솔가지를 채웠다.
바닥에 단단한 나무 울타리가 들어섰다.
이제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다.
저 멀리서 밀물이 머리를 들고 밀려오기 시작했다.
둑 위에 선 아버지가 목청을 높였다.
"지금이다!
가마니와 바위를 한꺼번에 쏟아부어라!"
아버지의 호령에 일꾼들이 움직였다.
맏형과 둘째 형이 달구지를 밀었고 장정들이 지게를 기울였다.
수백 포대의 흙가마니와 호박돌이 말뚝 뒤편으로 쏟아져 내렸다.
말뚝과 솔가지가 바위와 흙을 단단히 붙들어 매었다.
밀물이 마침내 물목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누런 파도가 거품을 물며 둑을 사정없이 들이받았다.
바닷물이 튀어 올랐지만 말뚝과 쌓아 올린 돌은 흔들리지 않았다.
성난 파도는 둑을 넘지 못하고 밖으로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바닷물이 물러섰다.
바다가 물러간 안쪽에 적막이 감돌았다.
드넓은 갯벌이 둑 안에 갇혔다.
사내들은 둑 위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 위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바다를 막았다고 해서 갯벌이 곧바로 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갇힌 짠물을 빼내고 빗물로 소금기를 씻어내야 했다.
비가 쏟아지면 배병희는 삽을 들고 둑으로 달렸다.
민물을 가두어 소금기를 우려낸 뒤 물꼬를 터 밖으로 흘려보냈다.
삼 형제와 아버지는 굳어가는 개흙을 가래로 뒤엎고 볏짚과 두엄을 날라 섞었다.
손톱 밑에 흙때가 마를 날이 없었다.
몇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땀이 거름이 되었다.
마침내 소금기 서걱거리던 개흙이 거무스름한 흙빛을 띠기 시작했다.
봄이 오자 배병희는 못자리에서 기른 어린 모를 들고 논으로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모를 심고 물을 댔다.
어린 모가 흙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파란 잎이 햇살을 받으며 하루가 다르게 뻗어 올라갔다.
논 3천 평.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농사지을 수 있는 온전한 우리 집 논이 생겨났다.
가을이 되자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누런 벼 이삭이 서걱거리며 물결을 쳤다.
첫 타작을 앞둔 맑은 날 오후였다.
아버지와 세 아들이 논둑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바짓가랑이에는 마른 흙이 묻어 있었고 손마디는 거칠게 굵어져 있었다.
어머니가 이고 온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에서 뽀얀 막걸리가 쏟아졌다.
배병희는 두 손으로 사발을 받았다.
거친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쥐어 든 막걸리는 달고 차가웠다.
사발을 비운 아버지가 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곰방대를 털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흙은 사람 땀을 배신하지 않는 법이다."
요란한 칭찬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나직한 한마디는 세 아들의 가슴 깊은 곳에 묵직하게 박혔다.
배병희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쇠메를 쥐고 바위를 나르며 박인 굳은살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땀 흘려 일하면 흙은 반드시 그 몫을 돌려준다.
그 믿음이 청년의 뼈와 살에 새겨졌다.
하지만 3천 평 논으로 가난을 완전히 털어내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집안 살림을 활짝 피우기에는 모자랐다.
그 뒤 어느 겨울 저녁, 아버지가 세 아들을 사랑방으로 불러 모았다.
방 한가운데 질화로 숯불이 붉게 타올랐다.
아버지가 곰방대를 털며 입을 열었다.
"논둑 너머 남은 갯땅에 바닷물을 끌어들이자.
거기다 염전을 파서 소금을 구워볼 테다."
아버지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며 논둑 너머 어두운 바다를 가리켰다.
바다를 막아 흙을 얻은 청년 배병희의 시선이, 칠흑 같은 밤바다 너머로 깊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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