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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우마차 탈곡기
1970년대 초·중반, 안면도 중장리 및 인근 마을
시월의 바닷바람이 누렇게 물든 안면도 들판을 흔들었다.
들녘 곳곳마다 베어낸 볏단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하지만 마당마다 낟알을 털어낼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 시절 섬마을에서는 대개 도리깨로 타작을 했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장정에 노인까지 매달려 종일 도리깨를 내리쳤다.
허리가 끊어질 듯 팔을 휘둘러도 한 집 타작을 끝내려면 사나흘이 꼬박 걸렸다.
가을 하늘에 먹구름이라도 끼면 농민들의 속은 새까맣게 탔다.
볏단에 빗물이 스며들면 낟알에서 싹이 트고 썩어 들어갔다.
배병희는 그 막막함을 누구보다 깊이 알았다.
열다섯 살 소년 가장 시절, 전선으로 떠난 형들의 빈자리를 지키며 홀로 도리깨를 쥐고 피땀을 흘린 기억이 생생했다.
손바닥이 터져 피고름이 엉겨 붙고, 땀에 젖은 목덜미로 보리 까끄라기가 파고들던 고통은 뼈에 사무쳐 있었다.
사람 손만으로는 이 거친 들판의 가난을 끝낼 수 없었다.
기계가 있어야 했다.
쇠붙이의 힘을 빌려야 식구도 이웃도 숨통이 트일 터였다.
배병희는 바다를 막아 일군 삼천 평 갯논 농사와 김 양식으로 모은 종잣돈을 털었다.
천일염과 자염 사업이 잇달아 무너지며 빚더미에 앉았던 뼈아픈 경험 끝에, 원가와 셈을 철저히 따져가며 악착같이 그러모은 밑천이었다.
그는 광천 장터와 대전의 철공소를 수소문해 소형 디젤 발동기 한 대와 나무 틀을 얹은 탈곡기를 사들였다.
마당에 부려놓은 기계에서 차가운 쇠 냄새와 묵직한 경유 냄새가 훅 끼쳐왔다.
하지만 쇳덩이만 들여놓았다고 일이 저절로 될 리 없었다.
발동기와 탈곡기는 장정 서넛이 달라붙어도 들기 버거울 만큼 무거웠다.
좁은 들길과 고갯길을 넘어 농가 마당마다 육중한 기계를 실어 나르는 일부터가 큰 난관이었다.
배병희는 건장한 조카들과 마을 일꾼들을 모았다.
손발이 맞고 우직한 장정 여섯을 추려 우마차 탈곡단을 꾸렸다.
그들은 발동기와 탈곡기, 기름통과 수리 연장을 소가 끄는 널찍한 우마차에 실었다.
기계가 흔들리지 않도록 두꺼운 볏짚 밧줄로 단단히 동여맸다.
"이랴, 어서 가자."
소가 거친 숨을 내쉬며 달구지를 끌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퀴가 비포장 황톳길을 구를 때마다 뿌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우마차가 처음 다다른 곳은 이웃 마을의 어느 농가였다.
마당에는 베어둔 볏단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우마차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주인 노인이 툇마루에서 버선발로 내려왔다.
노인은 우마차에 실린 시커먼 기계를 보며 미심쩍은 표정으로 혀를 찼다.
"저 낯선 쇠통이 참말로 벼를 털어준단 말이여?
낟알이 다 깨져서 못 쓰게 되는 건 아니고?"
구경 나온 이웃 농민들도 팔짱을 낀 채 수군거렸다.
도리깨질만 보며 살아온 이들에게 엔진의 쇠붙이는 낯설고 미덥지 못한 물건이었다.
배병희는 긴말을 섞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밧줄을 풀고 조카들과 함께 기계를 마당 한가운데로 내렸다.
발동기 밑에 쐐기목을 박아 수평을 맞췄다.
바닥에 물을 뿌려 먼지를 가라앉힌 뒤, 발동기 플라이휠과 탈곡기 회전축의 풀리 사이에 두꺼운 평벨트를 팽팽하게 걸었다.
배병희는 경유 통을 확인하고 감압 레버를 젖혔다.
쇠 크랭크 손잡이를 양손으로 굳게 쥐었다.
어깨에 힘을 주고 손잡이를 힘차게 돌렸다.
쇠와 쇠가 맞물려 돌아가는 둔탁한 소리가 마당을 메웠다.
회전이 붙자 배병희는 감압 레버를 돌려놓고 손잡이를 계속 돌렸다.
규칙적인 폭발음이 허공을 갈랐다.
머플러에서 푸르스름한 연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평벨트가 맹렬한 기세로 돌기 시작했다.
탈곡기 안쪽의 쇠 빗살 원통이 웅웅거리며 회전했다.
"볏단 들어갑니다!"
조카가 볏단 하나를 집어 들고 탈곡기 입구로 밀어 넣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쇠 빗살이 벼 이삭을 훑고 지나가자마자 황금빛 알곡이 비 오듯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빈 볏짚은 뒤편으로 가지런히 튕겨 나갔다.
장정 둘은 볏단을 나르고, 둘은 탈곡기에 밀어 넣었으며, 남은 둘은 쏟아지는 벼를 갈퀴로 긁어모아 가마니에 담았다.
손발이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맞아떨어졌다.
사흘 밤낮을 매달려야 했던 볏단 더미가 반나절 만에 말끔하게 바닥을 드러냈다.
마당에는 황금빛 낟알이 가득 담긴 가마니만 수북했다.
주인 노인은 멍하니 마당을 둘러보다 탄성을 터뜨렸다.
"세상에, 이게 참말인가.
벌써 다 털었단 말여?"
의심은 곧 경탄으로 바뀌었다.
배병희네 우마차가 오면 반나절 만에 마당이 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인근 농민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먼저 와달라고 매달렸다.
우마차 탈곡단은 쉴 틈 없이 섬마을의 논두렁과 마당을 누볐다.
당시 시골 마을에는 현금이 돌지 않았다.
탈곡단은 품삯으로 돈 대신 그날 갓 털어낸 벼를 받았다.
어스름이 깔리면 마당 한쪽에 멍석을 펴고 무쇠 대저울과 됫박을 놓았다.
배병희는 품삯으로 받은 벼 가마니들을 차례로 저울에 올렸다.
주머니에서 누런 종이쪽지와 몽당연필을 꺼내 숫자를 적었다.
"오늘 고생들 많았다.
자, 이것부터 챙겨라."
배병희는 함께 땀 흘린 조카들과 일꾼들의 몫부터 먼저 나누었다.
한 됫박의 에누리도 없이 저울눈을 정확하게 맞췄고, 오히려 낟알을 바가지 가득 덤으로 얹어주었다.
조카 하나가 저울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삼촌, 우리 몫을 이렇게 많이 주면 삼촌 몫은 너무 적지 않습니까?
기름값에 기계 밑천도 건져야지요."
배병희는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 몫을 먼저 챙겨야 내일 일도 돌아가는 법이다.
품삯을 속이면 사람은 떠나고 기계는 멈춘다."
정직한 셈법 앞에서는 그 누구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고된 노동 속에서도 일꾼들의 눈빛에는 끈끈한 믿음이 찼다.
배병희는 자기 몫으로 남은 벼를 헛간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다음 기계를 사고 살림을 넓힐 소중한 밑천이었다.
가마니를 쌓아 올리던 배병희의 시선이 마을 어귀 방앗간 쪽으로 향했다.
당시 안면도에서는 쌀이 귀해 없어서 못 먹었다.
농민들은 낟알을 털어내도 곧바로 밥을 지어 먹지 못했다.
무거운 벼 가마니를 지게에 지고 몇 리 길을 걸어 정미소로 가야만 했다.
방앗간 앞에는 늘 벼를 찧으려는 사람들의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정미소 주인은 가만히 앉아서 벼 껍질을 벗겨주고 쌀의 일부를 도정료로 챙겼다.
배병희는 곡물 유통의 큰길을 꿰뚫어 보았다.
'벼를 털어주는 품삯보다, 찧어서 흰쌀로 만들어 파는 정미소가 진짜 알짜배기다.'
땀 흘려 지은 곡식이 흰쌀이 되어 밥상에 오르는 길목을 쥐는 자가 진정한 주인이 된다는 이치였다.
가슴속 깊은 곳에 훗날을 기약하는 단단한 뜻이 또렷하게 새겨졌다.
날이 완전히 저물어 우마차를 몰고 집 마당으로 돌아왔다.
사립문을 밀고 들어서자 마당 안쪽에서 구수한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아내가 커다란 무쇠솥에 끓여낸 소고깃국 냄새였다.
가을무를 굵직하게 썰어 넣고 진하게 우려낸 국 위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평상 위에는 고봉으로 꾹꾹 눌러 담은 쌀밥과 뜨거운 국사발이 차려졌다.
하루 종일 짚가루와 경유 냄새를 뒤집어쓴 장정들이 둘러앉았다.
"국 식기 전에 어서들 들어요."
아내는 묵묵히 깍두기 보시기를 더 날라다 놓았다.
뜨끈한 고깃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하루의 피로가 씻은 듯 녹아내렸다.
밥 한술을 나누는 마당에는 말보다 깊은 정이 오갔다.
정직한 셈과 따뜻한 밥 한 끼가 사람의 마음을 단단하게 묶어주었다.
우마차 탈곡단은 거칠 것 없이 섬 들판을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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