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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장대비 속 볏가마
1980년대 중반, 정미소 옆 야적장
가을걷이가 시작되자 독정리 들판은 추수 일손으로 분주했다.
벼를 가득 실은 경운기와 달구지가 신작로를 메우며 정미소 마당으로 줄지어 들어왔다.
죽어 있던 50마력 발동기를 살려내고 전기까지 들인 데다, 볏값을 단 하루도 미루지 않는다는 소문이 돈 탓이었다.
독정리 농가는 물론 인근 장안면과 우정면 일대에서까지 벼를 싣고 몰려들었다.
하지만 정미소 창고는 턱없이 비좁았다.
낡은 판자벽 창고에는 천여 가마를 들이고 나면 더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밀려드는 벼는 이미 삼천 가마를 훌쩍 넘어섰다.
마당은 물론 진입로 입구까지 가마니가 가득 차 트럭이 돌아나갈 길마저 막힐 지경이었다.
배병희는 곧장 정미소 곁 이웃 논 오백여 평을 빌렸다.
당장 벼를 쌓아둘 야적장이 급했다.
질퍽한 논바닥을 고르고 흙바닥 위에 두꺼운 폐목 침목과 각목을 촘촘히 받쳤다.
그 위로 짚 멍석을 빈틈없이 깔았다.
"땅에서 올라오는 습을 막아야 벼가 안 뜬다.
나무틀 단단히 괴어라."
배병희는 손수 각목을 나르며 바닥틀을 짰다.
그 위로 수천 가마의 벼가 차곡차곡 올라갔다.
높이 쌓인 볏가마 더미 세 줄기가 논 한복판에 우뚝 솟았다.
볏가마니 위로 두꺼운 비닐을 씌우고 질긴 군용 천막을 덮었다.
바람을 타지 않게 호박돌과 헌 타이어를 군데군데 얹어 눌렀다.
겉보기엔 든든했으나 야적은 바람 앞의 등불이나 다름없었다.
쥐가 가마니를 갉아 구멍을 내거나 빗물이 스며들어도 속에서 열이 나 벼가 하얗게 썩어 들어갔다.
추수철 내내 배병희는 하늘에 먹구름만 끼어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흙 묻은 작업복에 장화도 벗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시월 말 깊은 밤, 서해 쪽에서 불어온 차가운 밤바람이 들판을 거칠게 몰아쳤다.
정미소 함석지붕이 덜컹거리며 울었다.
선잠을 자던 배병희가 번쩍 눈을 떴다.
마당으로 내닫자 시커먼 먹구름이 달빛을 삼킨 채 머리 위까지 내려앉아 있었다.
순간 번개가 번쩍하며 마른벼락이 들판을 갈랐다.
후드득 굵은 빗방울이 양철 지붕을 때리더니, 이내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비가 사납다.
야적장으로 가야 한다!"
배병희는 굵은 손전등을 낚아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이어 맏아들이 작업복을 걸치고 달려 나왔다.
"아버지, 저도 갑니다!"
두 사람은 장화 속에 물이 차는 줄도 모르고 캄캄한 진흙길을 내달렸다.
손전등 불빛이 퍼붓는 빗줄기 속에서 어지럽게 흔들렸다.
야적장에 닿자마자 거센 바람이 집채만 한 천막을 사납게 쥐어뜯고 있었다.
얹어둔 헌 타이어와 돌멩이가 맥없이 굴러떨어지고, 천막 귀퉁이가 돛처럼 펄럭이며 부풀어 올랐다.
벌어진 틈새로 빗줄기가 사정없이 들이쳤다.
수천 가마의 벼가 고스란히 비를 맞을 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논바닥에 흙탕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물꼬가 막혀 누런 물이 발목을 넘어 차올랐다.
가마니 밑동까지 물이 차오르면 아래에 쌓인 벼부터 젖을 판이었다.
"내가 위로 올라간다!
너는 밑에서 포대를 올려라!"
배병희는 손전등을 입에 물고 볏가마니 더미로 기어올랐다.
비에 젖은 가마니는 참기름이라도 바른 듯 미끄러웠다.
거친 볏짚 올을 움켜쥐며 한 단 한 단 몸을 끌어올렸다.
발을 헛디디면 그대로 몇 미터 아래 흙탕물로 곤두박질칠 판이었다.
꼭대기에 닿자마자 배병희는 들썩이는 천막 위로 몸을 던져 엎드렸다.
온몸의 무게로 펄럭이는 천을 내리눌렀다.
비바람이 뺨을 후려쳐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지만 이를 악물었다.
"포대 올려라!
밧줄도 던져!"
아래에서 맏아들이 흙투성이가 된 모래주머니를 힘껏 밀어 올렸다.
굵은 나일론 밧줄 뭉치가 빗줄기를 뚫고 날아왔다.
배병희는 모서리마다 모래주머니를 얹고 천막 자락을 팽팽히 그러쥐었다.
가마니 틈새로 밧줄을 걸어 그물처럼 가로세로로 단단히 동여맸다.
거친 밧줄에 쓸려 손바닥 가죽이 벗겨졌으나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천막이 마침내 가마니를 감싸 안으며 펄럭임을 멈췄다.
배병희는 미끄러운 가마니를 타고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하지만 더 큰 난관은 바닥에 있었다.
야적장에 고인 흙탕물이 차올라 받침목 틈새를 넘보고 있었다.
가마니 밑동이 젖기 전에 물을 빼야 했다.
"물길을 돌려야 한다.
삽 가져와라!"
배병희는 헛간에서 쇠삽 두 자루를 낚아챘다.
한 자루를 맏아들에게 넘기고 곧장 진흙탕 속으로 뛰어들었다.
"남이 피땀 흘려 지은 농사다.
단 한 톨도 썩힐 수 없다."
배병희는 축축한 땅바닥에 쇠삽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자갈과 뻘흙이 뒤엉킨 간척지 흙은 차돌처럼 질기고 단단했다.
삽날이 땅을 가를 때마다 손목과 어깨로 뻐근한 충격이 전해졌다.
튄 흙탕물이 눈과 얼굴을 사정없이 덮었다.
두 부자는 야적장 둘레를 따라 미친 듯이 도랑을 파 내려갔다.
빗줄기는 잦아들 기미 없이 장대처럼 쏟아졌다.
숨이 턱 끝까지 찼지만 삽질을 멈추지 않았다.
정미소를 믿고 벼를 맡긴 이웃 농민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봄부터 여름내 흘린 피땀을 제 손에서 썩힐 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 파면 큰 도랑으로 빠진다.
힘내라!"
배병희의 말에 맏아들도 이를 악물고 진흙을 걷어냈다.
쇠삽날이 자갈에 부딪치며 서걱거리는 소리가 빗소리를 갈랐다.
마침내 야적장을 빙 두른 깊은 물길이 틔었다.
배병희가 마지막 흙벽을 쇠삽으로 내리찍어 허물었다.
갇혀 있던 누런 흙탕물이 콸콸 소리를 내며 배수로로 쏟아져 들어갔다.
가마니 밑동을 삼키려던 물줄기가 거짓말처럼 쑥 빠져나갔다.
바닥 받침목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냈다.
가마니 맨 아랫단은 젖지 않은 채 온전히 버티고 있었다.
그제야 두 사람은 삽자루에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진흙과 빗물투성이라 사람 꼴이 아니었다.
손바닥 굳은살이 찢겨 핏물이 배어 나왔지만, 두 사람의 눈길은 오직 볏가마니 더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 네 시를 넘기자 사납던 빗줄기가 차츰 잦아들었다.
한참 뒤 먹구름이 걷히며 동쪽 하늘 끝에서 희끄무레한 여명이 번져왔다.
들판 위로 자욱한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배병희는 진흙 묻은 쇠삽을 논둑에 꽂아두고 천천히 볏가마니로 걸어갔다.
밧줄을 풀고 천막 안쪽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가마니 틈새 깊숙이 손을 들이밀었다.
손끝에 닿은 가마니는 물기 한 점 없이 보송보송했다.
볏짚 특유의 구수하고 미지근한 온기가 손바닥으로 번졌다.
살펴본 가마니 안에는 빗물이 스며들지 않았다.
볏가마 더미도 제자리에 버티고 있었다.
배병희는 그제야 시린 새벽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밤새 굳어 있던 낯빛에 비로소 엷은 안도가 번졌다.
"다행이다.
안쪽은 젖지 않았구나."
배병희가 곁에 선 맏아들의 젖은 등을 툭 쳤다.
맏아들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밤새 물과 사투를 벌인 야적장 위로 맑은 햇살이 비쳐 들었다.
온몸으로 장대비를 막아낸 새벽이었다.
하지만 배병희의 시선은 이내 정미소의 낡은 함석 공장으로 향했다.
언제까지 남의 논을 빌려 하늘 눈치나 보며 벼를 야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천 가마를 비바람 걱정 없이 들여놓을 넓은 창고가 절실했다.
대형 트럭과 트랙터가 논두렁에 빠지지 않고 드나들 널찍한 길도 닦아야 했다.
전기를 들인 뒤에도 벼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옮길 시설은 모자랐다.
흙탕물 범벅인 장화를 털어내며, 배병희는 들판 너머를 향해 단단한 시선을 던졌다.
새로운 결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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