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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품삯으로 건넨 볍씨
1990년대 초, 독정 정미소
정미소 뒤뜰에 매화가 피어도 형편이 어려운 농가의 봄은 시렸다.
겨우내 먹을 양식은 바닥났고 보리 이삭은 아직 여물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보릿고개였다.
독정리 들판에 물을 대고 못자리를 펼 때가 다가왔다.
논바닥을 고르고 마른 흙을 갈아엎는 농부들의 손길은 분주했으나 속은 바짝바짝 탔다.
가난한 농가 중에는 뿌릴 볍씨가 없는 집도 있었다.
겨우내 식구들 끼니를 잇느라 종자까지 밥솥에 털어 넣은 집이었다.
가까운 이웃들도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다.
정미소 헛간에는 가을에 거둔 볏가마가 천장까지 닿을 듯 쌓여 있었다.
서늘한 헛간 구석마다 마른 짚 냄새와 묵은 낟알 냄새가 배어 있었다.
배병희는 늦은 밤까지 도정기 모터를 손봤다.
베어링에 기름을 치고 스패너를 챙겨 헛간 쪽으로 돌아 나왔다.
차가운 밤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헛간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어둠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쥐가 낟알을 갉아먹는 소리가 아니었다.
숨을 죽인 채 가쁘게 몰아쉬는 사람의 숨소리였다.
배병희는 발을 멈췄다.
판자 벽 틈으로 달빛이 가늘게 스며들었다.
달빛 아래 누군가 무릎을 꿇고 웅크려 있었다.
아랫마을에 사는 이웃 농부였다.
비쩍 마른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터진 볏가마 틈으로 박바가지를 푹 찔러 넣고 있었다.
긁어낸 볍씨를 낡은 비료 포대에 바삐 쓸어 담았다.
낟알 구르는 소리가 헛간 바닥에 자작자작 깔렸다.
들킬까 연신 뒤를 돌아보는 농부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목덜미로 식은땀이 번져 흘렀다.
배병희는 숨을 삼켰다.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멱살을 낚아채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배병희는 발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뒷걸음질을 쳤다.
헛기침조차 삼켰다.
시골에서 도둑으로 몰리면 당사자는 물론 자식들까지 고개를 들기 어려웠다.
손가락질을 견디다 못해 마을을 떠나야 할 수도 있었다.
못자리에 넣을 볍씨 한 됫박이 없어 남의 헛간을 뒤지는 그 속을 배병희는 안다.
안면도 갯벌에서 지게를 지며 겪었던 서러운 가난이 살갗을 스쳤다.
배병희는 조용히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이웃이 비료 포대를 둘러메고 판자문 밖으로 빠져나갈 때까지 인기척을 내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배병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미소 문을 열었다.
마당에 물을 뿌리고 기계를 돌렸다.
신작로에서 마주친 이웃은 배병희의 눈길을 피했다.
핼쑥한 낯빛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음을 재촉했다.
배병희는 모르는 척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 아는 체를 했다.
사흘 뒤, 배병희는 그 이웃의 집 사립문을 밀고 들어섰다.
멍석에서 새끼를 꼬던 이웃이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손 둘 바를 몰라 했다.
배병희는 못 본 척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건넸다.
성냥을 그어 불을 붙여주고는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정미소에 손 갈 일이 태산인데 일손이 통 없소.
마당에 볏가마 쌓고 비가림막 손볼 데가 많은데, 며칠 와서 일손 좀 보태주시겠소?”
이웃은 멍하니 배병희를 쳐다봤다.
부끄러움과 당혹감이 뒤엉킨 얼굴이었다.
“품삯은 후하게 쳐드릴 테니 내일 아침에 들르시오.”
배병희는 더 말을 얹지 않고 사립문을 나섰다.
이튿날 동이 트기도 전에 이웃이 정미소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는 말 한마디 없이 빗자루부터 잡았다.
볏가마를 질 때도 남들보다 무겁게 짊어졌고, 이마에 비 오듯 땀이 흘러도 허리를 펴지 않았다.
구석진 먼지를 쓸어내고 방수포를 팽팽하게 당겨 맸다.
제 부끄러움을 땀으로 씻어내려는 듯 온몸을 던졌다.
며칠 뒤 저녁, 일이 끝나자 배병희는 그를 사무실로 불렀다.
책상 위에는 품삯을 넣은 누런 봉투와 함께 새끼줄로 단단히 여민 볏가마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흘 동안 애 많이 쓰셨소.
이건 일하신 품삯이고, 저건 못자리에 부을 볍씨요.”
이웃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배 사장님, 당치도 않습니다.
일한 삯만 주시면 됩니다.”
“정미소에서 알이 가장 굵고 실한 놈으로 골라 담았소.
싹이 튼실하게 터야 가을걷이가 넉넉하지 않겠소.
허튼 생각 말고 가져가서 모나 잘 키우시오.”
배병희는 볏가마를 자전거 짐받이에 얹고 고무줄로 단단히 묶어주었다.
이웃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소매 끝으로 눈가를 훔치며 어둑한 들길을 나섰다.
배병희가 사람을 대하는 도리는 늘 한결같았다.
얕은 잇속을 따지지 않고 먼저 상대의 처지를 헤아렸다.
신작로를 달리다 길가에 동네 어르신이라도 보이면 저만치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흙먼지가 일세라 시동부터 끄고 내려 허리를 깍듯이 굽혔다.
“어르신, 장에 다녀오십니까.
타십시오.”
거친 손을 부축해 차에 태우고 나서야 다시 시동을 걸었다.
자식들에게도 입버릇처럼 당부했다.
“사람을 오늘만 보고 내일은 안 볼 것처럼 대하지 마라.
미운 사람일수록 더 너그럽게 품어야 한다.
어디를 가든 남에게 원망 살 일은 만드는 게 아니다.”
밖에서 배병희가 신의를 쌓는 동안, 안채 부엌에서는 아내가 그 무게를 묵묵히 나누어 졌다.
새벽 네 시면 부엌문이 삐걱 열렸다.
아내는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아궁이 재를 긁어내고 솔잎을 밀어 넣었다.
성냥을 그어 불씨를 지핀 뒤 굵은 참나무 장작을 쟁였다.
벌건 불길이 솥바닥을 감아쥐며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일꾼 수십 명의 끼니를 감당하는 무쇠 가마솥이었다.
쌀을 씻어 안치고 불을 지피면 무거운 솥뚜껑 틈으로 하얀 김이 훅 뿜어져 나왔다.
구수한 밥내가 새벽 공기를 갈랐다.
멸치를 듬뿍 넣고 묵은 된장을 푼 시래깃국이 큰 솥에서 구수하게 끓었다.
가을 추수철부터 이듬해 봄까지 마당에는 곡식을 실은 경운기와 달구지가 줄을 이었다.
도정기 소리에 귀가 먹먹했고, 쌀겨 먼지를 뒤집어쓴 일꾼들의 목구멍은 늘 칼칼했다.
아내는 하루에 서너 번씩 가마솥을 비우고 다시 채웠다.
두툼하게 썬 두부를 넣은 된장찌개와 고봉밥이 양철 쟁반에 가득 담겨 마당으로 나갔다.
“새참 드시고들 하세요.”
그제야 일꾼들은 볏가마를 부리고 쌀겨 묻은 장갑을 벗었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허겁지겁 숟가락을 들었다.
아내는 빈 그릇을 치우고 곧바로 솥에 물을 부었다.
누룽지가 노릇하게 풀린 숭늉을 큰 양동이에 담아 날랐다.
뜨끈한 숭늉 한 사발을 들이켜고 나서야 사람들의 목구멍이 시원하게 뚫렸다.
봄철 양식이 떨어진 집의 아낙들이 정미소 뒤란을 서성였다.
굶주린 아이들을 두고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빈 소쿠리를 옆구리에 낀 채 담벼락 뒤를 맴돌던 동네 아낙들이었다.
아내는 그 기척을 보면 못 본 척 뒤란으로 돌아가 손짓을 했다.
“이리 들어오세요.”
아낙들을 곳간으로 이끈 아내는 박바가지로 쌀독 바닥의 쌀을 퍼 올렸다.
새하얀 낟알이 바가지 가득 소복하게 담겼다.
아내는 보자기를 펼쳐 쌀을 쏟아붓고 네 귀를 단단히 묶어 품에 쥐여주었다.
“가서 아이들 밥부터 먹이세요.
아무 소리 말고 얼른 가요.”
쌀보자기를 안아 든 아낙들은 고맙다는 말도 잇지 못한 채 눈시울을 붉혔다.
아내는 그 거친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살다 보면 이런 고비도 있는 법이지요.
기죽지 마세요.”
배병희의 침묵과 아내의 쌀바가지가 거친 소금 들판의 그늘을 지웠다.
손해를 보더라도 사람의 체면을 짓밟지 않았고, 곡식 한 톨보다 사람의 목숨줄을 먼저 살폈다.
소문은 남양만 들판을 건너 장안면과 우정면까지 퍼졌다.
농민들은 십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경운기에 볏가마를 싣고 독정리로 몰려들었다.
정미소는 날로 활기를 띠었다.
배병희의 손에 박인 굳은살과 아내의 거친 손마디는 그들이 이룬 신뢰의 다른 이름이었다.
들판의 바람은 부드러웠고 일터에는 생기가 돌았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굴러가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사무실 책상 위의 검은 전화기가 찢어질 듯 울리기 시작했다.
수도권 곡물 도매상회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사람을 믿었던 우직한 사내의 등 뒤로, 평생을 뒤흔들 거대한 재앙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드리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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