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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책보 대신 지게
1940년대, 안면도 중장리
태평양 전쟁 말기와 광복을 지나며 세상은 어수선했다.
섬마을 살림살이도 팍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황토밭에 감자와 보리를 갈고 갯벌로 나갔지만, 대식구 끼니를 잇기란 늘 빠듯했다.
아침마다 바다에서 져 나른 굴 껍데기와 뻘물이 마당에 흥건했다.
안개가 걷힐 무렵이면 마을 어귀로 또래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가슴에 무명 책보를 둘러맨 채 재잘거리는 소리가 번졌다.
면소재지 국민학교로 가는 길이었다.
십 리 산길을 걸어야 했지만 발걸음만큼은 다들 가벼웠다.
소년 배병희는 흙담 뒤에 선 채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학교를 얼마 다니지 못하고 그만둔 뒤에도, 그는 다시 학교에 가고 싶었다.
교실에서 책장을 넘기며 글줄을 깨우치고 세상일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에 학교로 돌아가는 일은 언감생심이었다.
당장 집안에 일손이 모자라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기침을 뱉으며 밭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갯바람에 튼 손으로 광주리를 머리에 이었다.
형들이 거들어도 대식구 끼니를 채우기엔 모자랐다.
배병희는 부엌 벽에 세워둔 지게로 발길을 돌렸다.
부러운 마음도 서운한 티도 혀 밑으로 꾹 눌러 삼켰다.
소나무 지게는 소년의 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멜빵에서는 땀에 찌든 갯내와 흙먼지 냄새가 훅 끼쳤다.
낫을 지게 가지에 꽂고 멜빵에 두 팔을 뀄다.
가난한 집 막내에게 떨어진 몫은 글공부가 아니라 나무 한 짐이었다.
소년은 짚신 끈을 조여 매고 산비탈로 발을 디뎠다.
소년의 어깨에 얹힌 지게는 날이 갈수록 무거워졌다.
봄이면 삭은 거름을 밭고랑에 폈고, 여름이면 잡초를 베어 날랐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겨우내 땔 나무를 하러 산을 누볐다.
억센 참나무 가지를 베고 솔가리를 모아 지게에 수북하게 쌓았다.
나뭇짐 높이가 소년의 키를 훌쩍 넘겼다.
지게 작대기로 땅을 짚고 일어설 때마다 거친 멜빵이 어깨 살갗을 파고들었다.
생나무의 무게가 어깨뼈를 사정없이 내리눌렀다.
무릎이 후들거려도 지게를 내려놓지 않았다.
한 번 주저앉으면 다시 일어서기가 곱절은 힘겨운 탓이었다.
가시덤불이 목덜미를 긁어 생채기를 냈다.
땀방울이 스며들 때마다 쓰라렸으나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땔나무를 가득 실은 지게는 고개를 넘어 장터로 향했다.
장날 장터는 고성과 흙먼지로 북새통이었다.
말과 됫박을 든 곡물 상인과 농사꾼들이 전대를 쥔 채 팽팽히 맞섰다.
"보리 닷 말 서 됫박이니, 말당 얼마씩 쳐서 제하고 남는 돈이 요만큼이오."
상인이 손가락으로 주판알을 요란하게 퉁겨 올렸다.
곁에 선 농부는 주판알을 쳐다보며 고개만 갸웃거렸다.
땔나무 짐을 부려놓은 배병희는 그들 곁으로 다가섰다.
상인의 손끝과 입술에서 떨어지는 숫자를 놓치지 않았다.
말과 됫박의 분량을 머릿속에 띄우고 푼돈 셈을 굴렸다.
상인이 주판을 털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먼저 계산이 섰다.
더 얹어주는 덤이며 떼어가는 구전까지 숫자의 자리가 딱 들어맞았다.
글줄은 몰라도 장터의 숫자는 눈앞에 또렷했다.
소년은 어깨너머로 셈판을 읽고 숫자의 흐름을 뼛속에 새겼다.
장터 한구석에는 부서진 농기구를 고치는 대장간이 있었다.
날 깨진 작두와 휜 쟁기 보습, 이 빠진 쇠스랑이 널려 있었다.
달아오른 쇠붙이를 메로 내리칠 때마다 사방으로 불똥이 튀었다.
소년은 땔나무를 팔고 난 뒤에도 대장간 앞을 맴돌았다.
매캐한 쇳가루 냄새 속에서 메질하는 손놀림을 넋 놓고 훔쳐보았다.
달군 쇠가 두들김에 휘어지는 결이며, 쇠붙이가 맞물려 버티는 힘의 길목을 눈여겨보았다.
집에 돌아오면 마당 구석에 버려진 쇠붙이를 주워 모았다.
녹슨 나사와 부러진 칼날, 이 나간 쇠스랑 조각까지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들일을 마치고 돌아온 형들은 그 꼴을 보고 혀를 찼다.
"쓸데없는 고철 쪼가리는 뭣 하러 모으냐.
그 시간에 잠이나 더 자지."
소년은 대꾸 없이 기름 묻은 헝겊으로 녹을 닦아냈다.
이음새를 풀고 조이며 쇠가 맞물리는 원리를 손끝으로 익혔다.
그해 가을, 이웃집 타작마당에서 기계가 말썽을 부렸다.
발판을 밟아 톱니통을 돌리던 수동 회전 탈곡기가 덜컥 멈춰 선 것이었다.
한창 볏단을 털어내야 할 판에 기계가 서 버리자 어른들의 낯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축이 뒤틀렸나 본데, 오늘 타작은 다 틀렸네."
기계를 대장간까지 지고 나가려면 반나절은 족히 걸릴 일이었다.
행여 비라도 뿌리면 마당의 벼가 죄다 썩을 판이었다.
어른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한숨만 내쉴 때, 배병희가 지게를 벗어두고 다가섰다.
"어디가 걸렸는지 제가 한번 보겠습니다."
"어린놈이 기계를 뭘 안다고 손을 대.
더 망가뜨리지 말고 저리 물러서 있어라."
농부가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배병희는 물러서지 않고 탈곡기 옆에 쪼그려 앉았다.
기름때 묻은 손으로 멈춰 선 회전축을 흔들어 보았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틈새가 심상치 않았다.
발판과 이어진 쇠톱니가 비틀렸고 축을 받치던 쇠고리가 닳아 있었다.
힘이 빗나가니 톱니가 헛돌며 축을 갉아먹은 탓이었다.
소년은 지게 작대기 끝으로 틈새에 낀 마른 짚풀과 쇳밥을 파냈다.
그러고는 집으로 달려가 모아 둔 무쇠 조각과 줄칼을 챙겨 왔다.
닳아빠진 축 자리를 줄칼로 반듯하게 갈아냈다.
주워 둔 무쇠 조각을 덧대어 축의 중심을 단단히 바로잡았다.
어른들은 숨을 죽인 채 소년의 손끝을 지켜보았다.
기름 친 헝겊으로 톱니 틈새를 닦아낸 뒤, 소년이 발판을 힘차게 내리밟았다.
쇠톱니가 찰칵 맞물리며 매끄럽게 돌아갔다.
멈춰 섰던 회전통이 바람을 가르며 시원한 소리를 토해냈다.
"돌아간다!
기계가 돌아!"
어른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멈췄던 타작이 다시 시작되고 마당 가득 볏짚 먼지가 솟구쳤다.
농부는 땀투성이가 된 소년의 등을 두드리며 볶은 콩을 한 움큼 쥐여주었다.
배병희는 주머니에 콩을 넣고 말없이 연장을 챙겼다.
글줄은 몰라도 기계의 이치는 명료했다.
쇠붙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힘이 실리는 길을 터주고 제자리를 잡아주면 어김없이 제 몫을 해냈다.
장터 셈도 다를 바 없었다.
눈속임으로 가로챈 숫자는 언젠가 축이 틀어진 기계처럼 탈이 나기 마련이었다.
교실 공책 대신 차가운 쇠붙이와 흙마당이 소년에게는 배움터였다.
살아가는 이치를 그렇게 온몸으로 다져 넣었다.
땅거미가 깔릴 무렵, 소년은 빈 지게를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헛간 벽에 지게를 기대어 세워두었다.
지게 다리가 마른 흙바닥에 툭 떨어지는 소리가 적막한 마당에 울렸다.
우물가로 다가간 소년은 땀에 전 무명 저고리를 벗어젖혔다.
서늘한 저녁 바람이 땀 식은 가슴팍을 스쳤다.
드러난 어깨는 성한 곳이 없었다.
억센 멜빵이 짓누른 자리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굳어 있었다.
양쪽 쇄골 위로는 질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소년의 몸이라 믿기 힘든 자국이었다.
또래 아이들이 한창 키를 키우며 자라날 나이였다.
그러나 배병희의 어깨에는 너무 일찍 식솔들의 가난과 생계가 얹혀 있었다.
소년은 또래보다 작은 키가 서러웠다.
멍든 어깨를 쓸어내릴 때마다 뼈마디 깊은 곳에서 아린 통증이 번졌다.
어깨에 깊게 팬 멜빵 자국은 소년의 몸에 박힌 생존의 낙인이었다.
세월이 흘러 가장이 되고 자식들을 혼인시킬 때였다.
며느리든 사위든 혼처를 볼 때마다 그는 키부터 먼저 물었다.
제 나이만큼 곧게 자라지 못한 서러움을 자식 대에는 물려주고 싶지 않은 속마음이었다.
그 애틋한 한의 뿌리가 바로 이 시절 안면도의 굳은 어깨에 박혀 있었다.
소년은 찬 우물물을 길어 올려 어깨 위로 쏟아부었다.
차가운 물줄기가 붉게 달아오른 살갗을 식혀 주었다.
책보 대신 지게를 졌던 소년은 장터의 셈을 익히고 기계의 원리를 깨쳤다.
척박한 땅에서 제 힘으로 살아남는 법을 다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섬마을의 평온은 오래가지 못했다.
온 나라를 뒤흔들 6·25 전쟁의 포성과 짙은 먹구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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