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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일곱 자리 숫자
1950년 6·25 전쟁기, 안면도
바다 건너 뭍에서 둔탁한 포성이 낮게 울려왔다.
1950년 여름, 외딴 섬 안면도에도 전쟁의 포화가 들이닥쳤다.
중장리 마을 어귀로 군용 트럭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들어섰다.
젊은 사내들의 이름이 적힌 징집 영장이 집집마다 전달되었다.
집안의 기둥이던 맏형과 둘째 형의 이름도 그 종이 위에 나란히 적혀 있었다.
어머니는 마루에 주저앉아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는 곰방대를 입에 문 채 먼 바다만 묵묵히 바라보았다.
건장하던 두 형은 서둘러 봇짐을 꾸렸다.
포구 선창가 갯벌에는 군용 목선이 닿아 있었다.
배에 오르기 직전, 둘째 형이 배병희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열다섯 살 막내의 어깨를 움켜쥔 형의 손아귀에 굵은 힘이 실렸다.
"병희야, 내 말 똑똑히 들어라."
둘째 형은 주변을 살피더니 동생의 귓전에 얼굴을 바짝 대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숫자를 일렀다.
"내 군번이다.
일곱 자리다.
종이에 적지 말고 머릿속에 꼭 새겨둬라.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된다."
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곱 자리 숫자를 하나하나 또박또박 짚어 주었다.
"내가 살아서 돌아올 때까지 부모님 모시고 집안 잘 지키고 있어라.
알았지?"
목선이 기적을 울리며 포구를 벗어났다.
흙탕물이 튀는 바다 위로 멀어지는 형들의 뒷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통곡했다.
하지만 배병희는 울지 않았다.
형이 남긴 일곱 자리 숫자를 입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전쟁터로 끌려간 형이 살아 있다는 단 하나의 증표였다.
두 형이 떠난 집안은 적막했다.
기둥 같던 장정 둘이 한꺼번에 빠져나가자 늙은 부모와 누나들, 그리고 열다섯 살 배병희만 남았다.
소년은 졸지에 대식구의 생계를 짊어진 가장이 되었다.
포성과 총소리는 바다 건너 먼 곳의 일이었으나, 굶주림은 당장 문턱을 넘어오고 있었다.
초여름 뙤약볕이 메마른 황토밭을 사정없이 내리쬐었다.
들판의 보리가 누렇게 타들어가듯 익어갔다.
고개를 푹 숙인 보리 이삭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알곡을 땅에 쏟아낼 기세였다.
장마가 오기 전에 보리를 베어 들이지 못하면 식솔들의 겨울 끼니가 끊길 판이었다.
그러나 마을에는 일손이 없었다.
사내들은 모조리 군대로 끌려갔고, 소달구지 하나 빌리기 어려웠다.
보리를 거두어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일은 오롯이 열다섯 소년의 몫이었다.
배병희는 새벽안개가 걷히기도 전에 낫을 들고 보리밭으로 내달렸다.
밭고랑에 엎드리듯 허리를 바짝 숙이고 빳빳한 보리 줄기를 베어 나갔다.
베어낸 보릿단이 고랑마다 수북하게 쌓였다.
소년은 제 키의 두 배가 넘도록 보릿단을 지게에 얹었다.
새끼줄을 단단히 동여매고 지게를 짊어지는 순간 무릎이 시큰하게 꺾였다.
거친 짚 멜빵이 어깨 살갗을 짓눌렀다.
소년은 작대기로 흙바닥을 짚으며 언덕길을 오르내렸다.
등줄기를 타고 흐른 땀이 바지춤을 적셨다.
보릿단을 마당으로 져 나르는 일만 며칠이 걸렸다.
배병희는 마당에 거친 멍석을 폈다.
헛간 구석에서 참나무 도리깨를 꺼내 들었다.
자루 끝에 가죽 끈으로 굵은 쪽나무 세 가닥을 엮어놓은 낡은 농기구였다.
정오의 햇살이 마당을 하얗게 달구었다.
배병희는 멍석 위에 보릿단을 가지런히 깔았다.
소년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도리깨 자루를 머리 위로 힘껏 치켜올렸다.
도리깨 꼭지가 큰 원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가죽 끈에 매달린 쪽나무가 보리 이삭 위로 무겁게 내리꽂혔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마당 가득 메마른 흙먼지와 보리 까끄라기가 솟구쳐 올랐다.
바람을 탄 까끄라기는 땀에 젖은 소년의 목덜미와 옷 속으로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보리 까끄라기는 가늘고 억셌다.
털어내려고 손을 문지를수록 옷깃 틈을 비집고 살갗 깊숙이 박혀 들었다.
소금기 밴 땀방울이 스며들자 목덜미와 등줄기가 불에 덴 듯 쓰라렸다.
긁을수록 살갗이 벌겋게 짓무르고 진물이 배어 나왔다.
손바닥의 고통은 더했다.
참나무 자루를 쥐고 내리치다 보니 굵은 물집이 잡혔다.
물집이 터지고 굳은살이 벗겨지며 피가 배어 나왔다.
도리깨 자루가 피땀으로 미끄러워지면, 소년은 마른 흙을 손에 쥐어 비벼 닦아내고 다시 자루를 움켜쥐었다.
마당으로 나오던 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주저앉았다.
어머니는 소년의 피 묻은 손을 붙잡았다.
"병희야, 그만해라.
네 살갗이 다 벗겨졌다.
이러다 몸이 먼저 부서진다."
누나도 달려와 도리깨를 빼앗으려 했다.
"막내야, 쉬엄쉬엄 하자.
하루 만에 다 털 순 없잖니."
배병희는 도리깨를 쥔 채 뒤로 물러섰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굳어 주먹조차 제대로 쥐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은 단단했다.
"지금 안 털면 장마에 다 썩어요.
날 좋을 때 털어놔야 올 한 해를 먹고살아요.
내가 안 털면 식구들 다 굶어요."
목구멍에서 갈라진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소년은 도리깨를 고쳐 쥐고 다시 멍석 앞으로 돌아섰다.
소년의 도리깨질이 다시 이어졌다.
어깻죽지가 찢어지는 듯 쑤시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주저앉고 싶은 순간마다 소년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도리깨를 치켜들 때 하나.
허공에서 자루를 돌려 내리칠 때 둘.
바닥을 향해 내리꽂힐 때 셋.
배병희는 도리깨를 내리칠 때마다 둘째 형이 일러준 일곱 자리 군번을 입속으로 읊었다.
첫 자리부터 일곱 번째 자리까지, 형의 군번을 한 바퀴 다 외우면 보릿단 한 묶음의 낟알이 비로소 털려 나갔다.
그것은 살을 에는 고통을 견디기 위한 주문이었다.
형들이 전선에서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였다.
동시에 두 형의 빈자리를 대신해 식구들을 살려내겠다는 소년 가장의 묵직한 맹세였다.
형들은 포탄이 빗발치는 싸움터에서 목숨을 걸고 있었다.
소년은 이깟 까끄라기에 주저앉을 수 없었다.
밤이 되면 온몸의 뼈마디가 쑤셔 숟가락조차 들지 못했다.
손가락은 도리깨 자루를 쥔 모양 그대로 굳어 펴지지 않았다.
홑청 이불이 닿기만 해도 짓무른 살갗이 타들어 가듯 아팠다.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된장을 상처에 발라주고 무명천을 감아주었다.
소년은 욱신거리는 두 손을 모아쥐고 밤하늘을 보며 다시 형의 일곱 자리 숫자를 외웠다.
어둠 속에서 소년은 마당에 비스듬히 누운 도리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슴속에 서늘한 다짐을 새겼다.
사람의 맨몸으로 버텨내는 노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피와 살점을 깎아 넣지 않고도 곡식을 거둘 방법이 필요했다.
언젠가 반드시 기계를 들여올 것이다.
기계로 이 고된 타작을 단숨에 끝내고 말리라.
쇠붙이의 힘으로 곡식을 털어내겠다는 생각이 소년의 가슴에 굵은 못처럼 박혔다.
타작은 한 달 동안 이어졌다.
소년은 홀로 멍석을 펴고, 홀로 도리깨를 휘두르고, 홀로 검불을 쓸어 모았다.
마침내 한 달째 되던 날, 마지막 보릿단이 마당에서 털려 나갔다.
배병희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키를 높이 들었다.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 보고 키질을 하자 검불과 껍질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바닥에는 단단하고 묵직한 황갈색 보리 알곡만이 소복하게 쌓였다.
배병희의 손바닥에는 도리깨 자루 모양으로 두껍게 굳은살이 박였다.
터진 상처 자리마다 거뭇한 흉터가 새겨졌다.
살갗은 거칠어졌고, 키는 또래만큼 쑥쑥 자라지 못했다.
하지만 열다섯 소년의 눈빛은 이미 어지간한 어른보다 더 단단해져 있었다.
전쟁의 포성은 여전히 바다 건너에서 그치지 않았다.
식구들의 양식은 지켜냈지만, 전란의 그늘과 섬마을의 모진 가난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소년 가장 배병희의 거친 손은 이제 거센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천수만의 갯벌과 산자락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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