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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천수만의 돌풍
1950년대 중후반, 천수만~광천
초봄 바닷바람은 살을 에는 듯 매서웠다.
전쟁이 지난 뒤에도 섬마을의 봄은 유난히 모질었다.
가을걷이 곡식은 진작 바닥났고, 뒤주를 긁어도 쌀 한 톨 나오지 않았다.
마을 곳곳에서 보릿고개의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식구들은 갯가에서 뜯은 칠면초와 쑥으로 멀건 죽을 끓였다.
무쇠솥 뚜껑을 여는 어머니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열여덟 살 배병희는 일찍이 가장 노릇을 도맡았다.
두 형이 징집되어 떠난 뒤, 집에 남은 식구들의 끼니가 오롯이 그의 손에 달렸다.
겨우내 파헤친 갯벌에선 조개조차 씨가 말라갔다.
살길을 찾던 청년의 눈에 마을 뒤 야산이 들어왔다.
안면도 산자락엔 베어낼 소나무와 참나무가 무성했다.
바다 건너 홍성과 광천 일대는 달랐다.
민둥산이 많아 아궁이에 넣을 땔감이 턱없이 귀했다.
장작을 베어 장터에 내다 팔면 보리쌀을 바꿀 수 있었다.
배병희는 날이 밝기 전 녹슨 톱과 도끼를 챙겨 산으로 올랐다.
온종일 비탈을 오르내리며 참나무를 베어 넘겼다.
터진 물집에 송진이 엉겨 붙으며 손바닥은 돌처럼 굳어갔다.
사나흘 피땀을 쏟자 포구 갯가에 장작더미가 산처럼 쌓였다.
물가엔 작은 목선 한 척이 매여 있었다.
엔진도 돛도 없이 오직 노 하나에 의지하는 거룻배였다.
배병희는 장작을 배에 차곡차곡 실었다.
단 한 단도 허투루 남겨둘 수 없었다.
나무를 높이 쌓을수록 뱃전은 무겁게 가라앉아 수면과 불과 한 뼘도 남지 않았다.
작은 물결만 들이쳐도 물이 넘쳐 들어올 판이었다.
배를 몰아 건너갈 곳은 천수만 너머 충남 광천이었다.
광천 옹암포구에 장작을 부리면 식구들 먹을 쌀과 보리를 넉넉히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천수만은 뱃사람들도 혀를 내두르는 거친 바다였다.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물목이 좁아, 밀물과 썰물이 바뀔 때면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배병희는 물때를 살폈다.
조류가 잠잠해지는 틈을 타야만 건널 수 있었다.
이른 새벽, 포구에서 닻줄을 풀었다.
통나무 노채를 쥐고 갯바닥을 밀어내자 목선이 물길 위로 미끄러졌다.
끼이익, 끼이익.
노가 물을 밀어낼 때마다 어깨와 허리의 근육이 팽팽하게 곤두섰다.
배는 거대한 장작 짐을 싣고 느릿느릿 물살을 갈랐다.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렀을 때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북쪽에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대낮인데도 사방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비릿한 짠내와 함께 살을 에는 돌풍이 내리꽂혔다.
바람이 해협을 휘감아 돌며 집채만 한 너울을 일으켰다.
쿵, 소리와 함께 거센 파도가 뱃전을 후려쳤다.
바닷물이 들이치며 목선이 옆으로 위태롭게 기울었다.
돌풍은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높이 쌓은 땔나무 단들이 들이치는 바닷물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물을 먹은 나무 짐이 무거워지자 뱃전이 수면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잠겨 들었다.
새끼줄마저 풀리며 나무 더미가 한쪽으로 쏠렸다.
뱃전을 넘은 바닷물이 발목까지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힐 판이었다.
사나운 파도가 노채를 낚아채며 손목을 사정없이 비틀었다.
얼음장 같은 바닷물이 뺨을 후려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사방은 포말을 뿜는 검푸른 물결뿐이었고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여기서 배가 뒤집히면 살아남을 길은 없었다.
눈앞으로 집에 남은 식구들의 얼굴이 스쳤다.
툇마루에서 포구를 바라볼 부모의 굽은 등, 주린 배를 움켜쥔 식구들.
내가 여기서 물귀신이 되면 남은 식구들은 어찌 살겠는가.
배병희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두 눈에 독기가 올랐다.
이 차가운 바다에서 허망하게 물고기 밥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노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배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한 손으로 뱃전을 붙잡은 채 바가지로 바닷물을 퍼냈다.
파도가 들이붓는 것보다 빠르게 물을 밖으로 쳐냈다.
허리 한번 펴지 못한 채, 입으로 새끼줄을 물어당기며 장작더미를 다시 동여맸다.
손톱이 뒤집혀 피가 흘렀지만 아픔조차 잊었다.
짐의 균형을 잡자 요동치던 배가 간신히 수평을 되찾았다.
하지만 광천 쪽으로 나아가다가는 역풍에 휘말려 그대로 뒤집힐 판이었다.
배병희는 물보라 너머를 매섭게 훑었다.
파도 사이로 무인도 죽도의 검은 바위가 보였다.
평소엔 암초 탓에 피하던 험지였으나, 지금은 유일한 피난처였다.
배병희는 다시 노채를 굳게 쥐었다.
파도를 정면으로 받지 않고, 물결을 비스듬히 타넘으며 죽도를 향해 노를 저었다.
노채에 온몸의 무게를 실었다.
끼이익, 우지직.
거센 물살에 노가 부러질 듯 휘어졌다.
어깨관절이 빠질 듯 쑤셨고, 터진 굳은살에서 피가 배어나와 노채를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배병희는 눈앞의 바위벽만을 응시하며 사력을 다해 물살을 갈랐다.
마침내 목선이 죽도의 거친 암벽에 다다랐다.
쿵 하는 충격과 함께 뱃머리가 얹히자, 배병희는 닻줄을 낚아채고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뛰어내렸다.
물이 가슴팍까지 차올랐다.
날카로운 굴껍데기를 딛고 바위 위로 기어올랐다.
배병희는 온 힘을 다해 닻줄을 당겨 바위틈 돌부리에 단단히 동여맸다.
목선과 젖은 장작더미가 갯바위에 단단히 묶였다.
거친 숨이 턱 끝에서 터져 나왔다.
배병희는 차가운 갯바위를 끌어안은 채 바닥에 엎드렸다.
살았다.
간신히 죽음의 문턱을 넘어섰다.
바다 위로 칠흑 같은 밤이 쏜살같이 내려앉았다.
무인도의 밤은 지독하게 추웠다.
칼바람이 바위틈을 헤집고 들어와 젖은 옷을 꽁꽁 얼려 붙였다.
얼어 죽지 않으려면 웅크린 몸을 바위벽에 바짝 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파랗게 질린 입술이 덜덜 떨렸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에 졸음이 쏟아질 때마다, 그는 주먹으로 허벅지를 내리쳤다.
이 추위 속에서 눈을 감으면 다시 깨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청년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바위를 때리는 파도 소리 속에서, 목선의 닻줄을 몇 번이고 손으로 더듬어 확인했다.
식구들의 주린 배를 채워야 할 귀한 장작이었다.
모진 밤이 지나고 마침내 동쪽 하늘이 밝아왔다.
거짓말처럼 바람이 멎었고, 천수만의 물결도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배병희는 뻣뻣하게 굳은 몸을 일으켰다.
관절 마디마디가 쑤셨지만 배와 나무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는 다시 배를 띄워 순해진 물길을 따라 안면도 포구로 뱃머리를 돌렸다.
포구에는 밤새 불어닥친 돌풍에 배가 가라앉았을 거라 여기며 모여든 마을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살아서 배를 몰고 들어오는 그를 보자 어머니는 버선발로 갯벌을 내달려 주저앉았다.
배병희는 모래톱에 배를 대고 묵묵히 닻을 내렸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엄살도, 영웅담 같은 자랑도 늘어놓지 않았다.
하얗게 말라붙은 옷깃의 소금기만 털어낼 뿐이었다.
"바람이 거칠어서 바위틈에 배를 대고 쉬다 왔습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길로 집으로 돌아간 배병희는 어머니가 내민 뜨거운 숭늉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켰다.
구수한 온기가 차갑게 식었던 몸속을 덥혀주었다.
방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인 청년은 정오가 되자마자 다시 지게를 짊어졌다.
살갗 벗겨진 손과 욱신거리는 어깨를 묻어둔 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터로 나섰다.
살아내야 했고,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마을 어귀를 지나 갯가로 내려서던 배병희의 발걸음이 문득 멈추었다.
그의 눈길이 마을 앞 너른 갯벌로 향했다.
물이 빠져나간 갯벌 한편에 거대한 돌무더기와 흙벽이 길게 뻗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 수탈용 농토를 만들려다 버려진 옛 방조제 터였다.
황량하게 누워 있는 옛 제방 터를 바라보는 배병희의 두 눈이 바닷바람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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