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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숟가락에 녹인 납
1970년대 초·중반, 안면도 들판
가을 들판이 누렇게 일렁였다.
바닷바람이 스칠 때마다 마른 볏짚 냄새가 번졌다.
논둑마다 베어 눕힌 볏단이 수북했고, 농민들은 새벽부터 나와 벼를 베었다.
타작마당 한복판에 우마차가 섰다.
짐칸 위에는 붉은 녹이 슨 소형 디젤 발동기와 탈곡기가 실려 있었다.
배병희가 조카들과 함께 꾸린 이동식 탈곡패였다.
배병희가 쇠 손잡이를 힘껏 돌리자 발동기가 덜컥거리며 숨을 틔웠다.
평벨트가 쇠바퀴를 물고 팽팽하게 돌았다.
조카들이 볏단을 들이밀자 탈곡통 쇠갈퀴가 낟알을 사정없이 훑어 냈다.
황금빛 알곡이 쏟아져 내렸다.
날아오른 짚가루와 먼지가 사내들의 이마에 들러붙어 땀과 엉겼다.
배병희는 땀을 훔칠 겨를도 없이 기계를 지켰다.
진동을 살피며 기름을 쳤다.
그러나 가을 들판의 시간은 짧았다.
서해 먼바다에서 잿빛 먹구름이 슬금슬금 몰려오고 있었다.
비를 맞으면 베어 둔 벼는 논바닥에서 썩어 버린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들판의 볏단을 모조리 털어야 했다.
탈곡패는 새벽안개가 걷히기 전부터 달이 뜰 때까지 기계를 돌렸다.
사달이 난 것은 해 질 무렵이었다.
들판 한복판에서 째지는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쇠 갈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더니, 덜컥하며 발동기가 그 자리에서 멎었다.
쇠바퀴가 멈추자 평벨트가 풀리에서 벗겨져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들판을 메우던 기계 소리가 뚝 끊기자 찬 바람 소리만 휑하게 맴돌았다.
매캐한 기름 탄내와 쇳가루 냄새가 번졌다.
"삼촌, 기계가 섰어요!"
조카가 핏기 없는 얼굴로 외쳤다.
볏단을 나르던 일꾼들도 손을 멈춘 채 굳어 섰다.
배병희는 말없이 발동기로 다가섰다.
쇠붙이에서 후끈한 열기가 끼쳤다.
그는 스패너로 볼트를 풀고 크랭크축 덮개를 벗겨 냈다.
축 안쪽을 들여다본 배병희의 미간이 굳어졌다.
회전축을 받치던 메탈 베어링, 이른바 '메다르'가 마찰열에 녹아내려 있었다.
며칠을 쉬지 않고 돌린 탓에 기름이 마르고 열을 받아 부드러운 합금이 엿가락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소식을 들은 마을 어르신들이 달려왔다.
멈춰 선 기계와 엉망이 된 쇳덩이를 보자 농민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메다르가 녹았다고?
그럼 타작은 인제 어쩌는 겨?"
마을 어르신이 볏단을 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안면도에서 이 부품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부품을 구해 오려면 며칠은 걸릴 텐데."
"내일부터 비가 온다는데 벼가 논바닥에서 다 썩겠구먼.
올 농사 다 망쳤어."
농민들의 탄식이 들판을 뒤덮었다.
볏단을 바라보는 농민들의 눈에 절망이 서렸다.
낟알은 온 식구가 겨울을 날 유일한 목숨줄이었다.
조카들도 뭍에서 부품을 사 오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모두가 발을 동동 구를 때, 배병희는 묵묵히 찌그러진 쇳조각을 긁어냈다.
손끝으로 축 표면의 흠집을 매만지는 그의 얼굴은 침착했다.
"어르신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밤 안에 제가 손을 봐 두겠습니다."
배병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농민들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철공소 하나 없는 들판에서 어찌 고치느냐는 웅성거림이 일었다.
"방법이 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기계가 다시 돌아갈 겁니다."
배병희는 곧장 조카들을 불렀다.
"화롯불에 숯을 넉넉히 피워라.
공구함에 있는 두꺼운 놋숟가락이랑 납 덩어리를 챙겨 오너라."
조카들이 달려가 재료를 그러모아 왔다.
들판 한구석에 숯불 화로가 놓이고 풀무질 소리가 일어났다.
배병희는 놋숟가락을 집게로 쥐고, 그 위에 버려진 납 조각을 얹었다.
숟가락을 시뻘건 숯불 한가운데로 찔러 넣었다.
열기가 닿자 납 조각이 흐물흐물 녹아내려 이윽고 은빛 쇳물이 되어 찰랑거렸다.
배병희는 축 틀 안쪽의 그을음과 기름때를 닦아내고 수평을 단단히 맞췄다.
"흔들리지 않게 꽉 잡아라."
배병희가 숟가락을 조심스레 기울였다.
은빛 납물이 좁은 축 틀의 틈새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고, 쇳물은 빈틈을 메우며 차갑게 식어 굳었다.
납물이 굳자 진짜 싸움이 시작되었다.
틀에 부어 굳힌 납은 투박한 쇳덩이에 불과했다.
회전축과 맞닿는 안쪽 곡면을 정밀하게 다듬어야 했다.
조금만 헐거우면 축이 요동치고, 조금만 빽빽해도 다시 열을 받아 녹아내린다.
정밀 기계 하나 없는 들판에서 오직 손끝의 감각으로 깎아내야 했다.
밤이 깊어 들판에 어둠이 내렸다.
조카 둘이 곁에 붙어 남포등을 높이 치켜들었다.
배병희는 멍석 위에 주저앉아 두 무릎 사이에 쇠를 단단히 물렸다.
그의 손에는 날이 선 평줄칼이 들려 있었다.
사각, 사각.
줄칼이 납 표면을 밀어내는 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갈랐다.
은빛 쇳가루가 무릎 위로 소복하게 떨어져 내렸다.
배병희는 서두르지 않았다.
줄칼을 눕혀 깎아내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단면을 문질렀다.
눈보다 정확한 것은 손끝에 닿는 감각이었다.
손에 걸리는 거친 결을 가늠하며 칼날의 각도를 미세하게 틀었다.
조금 깎아내고는 축에 대어 틈새를 살폈다.
걸리는 곳이 있으면 다시 빼내어 줄칼로 살살 갈아 냈다.
수백 번의 줄질이 이어졌다.
새벽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등줄기에는 땀이 흥건했다.
이마에서 떨어진 땀방울이 차가운 쇠 위로 번졌다.
쇳가루와 기름때로 뒤덮인 삼촌의 손을 바라보는 조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말 한마디 없이 쇠를 깎아내는 손놀림 속에 농민들과 한 약속을 지키려는 뚝심이 배어 있었다.
조카들은 추위도 잊은 채 등불을 든 팔을 내리지 않았다.
먼 마을에서 첫새벽 닭이 울 무렵, 배병희가 비로소 줄칼을 내려놓았다.
그는 손수 깎아낸 베어링에 기름을 듬뿍 먹인 뒤 축에 끼워 넣었다.
볼트를 단단히 조이고 손으로 회전축을 슬며시 굴려 보았다.
쇠와 쇠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부드러웠다.
걸리는 구석은 없었다.
놋숟가락에 녹여 맨손으로 깎아낸 부품이 제자리에 꼭 맞아떨어졌다.
새벽빛이 번져왔다.
잠을 설친 농민들이 하나둘 들판으로 모여들었다.
배병희는 기름과 쇳가루에 절은 옷을 털며 일어섰다.
그는 발동기 앞으로 걸어가 쇠 손잡이를 잡았다.
"돌립니다."
배병희가 온몸의 무게를 실어 손잡이를 힘껏 돌렸다.
한 바퀴, 두 바퀴.
묵직한 쇠바퀴에 탄력이 붙었다.
탕, 탕, 타당!
배기구에서 푸른 연기가 힘차게 뿜어져 나오며 멈췄던 발동기가 우렁차게 고동쳤다.
일정한 박자의 배기음이 가을 들판을 뒤흔들었다.
평벨트가 팽팽하게 튀어 오르며 탈곡기를 힘차게 돌렸다.
"돌아간다!
기계가 다시 돈다!"
숨죽여 지켜보던 농민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을 어르신들이 달려와 배병희의 거친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살았네, 살았어.
자네가 우리 벼를 다 살려냈어!"
조카들이 볏단을 들이밀자 탈곡기 안에서 낟알이 또다시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배병희는 옷소매로 기름때를 훔치며 힘차게 돌아가는 발동기를 바라보았다.
쇳가루에 긁히고 굳은살이 박인 손은 얼얼했지만, 가슴속에는 묵직한 확신이 차올랐다.
기계는 정직했다.
사람의 손길과 땀이 닿으면 멈춰 선 쇠붙이도 반드시 다시 숨을 틔웠다.
섬이라는 외딴 처지도, 부품이 없다는 막막함도 우직한 뚝심 앞에서는 핑계가 되지 않았다.
기계를 다루는 담력과 사람의 마음을 얻는 수완.
청년 배병희의 손에 든든한 밑천이 쌓여 가고 있었다.
가을 타작이 끝나면 차가운 겨울이 찾아올 터였다.
들판을 휩쓸던 청년의 시선은 이제 거센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천수만 갯벌의 수평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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