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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마당을 메운 상인들
1970년대 초·중반, 안면도 중장리
동지섣달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치자 중장리 앞바다는 검푸른 빛으로 짙어졌다.
썰물 때마다 드러나는 너른 갯벌 위에는 배병희가 박아 넣은 참나무 말뚝들이 빽빽하게 늘어섰다.
대나무 발마다 짙은 윤기를 머금은 생김이 빈틈없이 엉겨 붙었다.
바닷물이 빠질 때마다 지게가 휘어지도록 생김을 뜯어냈다.
물때에 맞춰 쉼 없이 퍼 날라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엄청난 양이었다.
하지만 갯벌에서 김을 건져 올리는 일은 시작일 뿐이었다.
물 밖으로 나온 생김은 몇 시간만 지나도 숨이 죽고 붉게 물러 터졌다.
소금기와 뻘을 말끔히 씻어내고, 잘게 썰어 물에 푼 뒤, 틀에 떠서 볕에 말려야 비로소 온전한 김이 되었다.
바다에서 뜯어내는 일보다 몇 곱절의 손품이 들었다.
식구들 몇이 매달려 감당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마당 한구석에는 생김 광주리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손을 늦췄다가는 혹한 속에 건져 올린 결실을 고스란히 썩힐 판이었다.
농한기 겨울, 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마을 사람들은 화롯가에 모여 웅크리고 있었다.
곳간 쌀독이 바닥나도 봄까지 버틸 길이 막막했다.
배병희는 망설이지 않고 동네로 사람을 보냈다.
"일손 놀리는 분들은 누구든 김 공장 마당으로 나오십시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이튿날 새벽부터 수십 명의 동네 주민들이 배병희의 집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배병희는 일손이 겉돌지 않도록 일을 똑 부러지게 나눴다.
갯벌에서 뜯어내는 사람, 지게로 져 나르는 사람, 뻘을 씻어내는 사람, 도마질하는 사람, 틀에 떠서 널어 말리는 사람까지 다섯 갈래로 손을 나누었다.
마당 한편에 드럼통과 고무통 수십 개가 줄지어 늘어섰다.
우물에서 길어 올린 찬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살얼음이 뜬 찬물에 손을 담그고 생김을 서너 번씩 헹궈냈다.
손끝이 곱아 감각이 사라질 때마다 아낙들은 입김을 후후 불어가며 개흙과 모래를 털어냈다.
깨끗이 씻은 김은 널따란 통나무 도마 위로 넘어갔다.
식칼과 작두가 쉼 없이 오르내리며 딱, 딱, 딱, 마당 가득 경쾌한 도마 소리를 울렸다.
잘게 다진 김을 커다란 나무통에 맑은 물과 함께 쏟아부었다.
긴 막대로 휘휘 젓자 검푸른 김죽이 차지고 매끄럽게 풀려 일렁였다.
이어지는 김 뜨기는 여간한 솜씨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아낙들은 대나무 발 위에 네모난 나무틀을 얹고 바가지로 김죽을 떠 부었다.
손목을 가볍게 흔들어 김 가닥을 고루 펴낸 뒤 틀을 들어 올렸다.
틀을 걷어내자 물기만 쏙 빠진 반듯한 김 한 장이 발 위에 찰싹 내려앉았다.
너무 두꺼우면 마르지 않고 너무 얇으면 볕에 부스러지는 까다로운 일이었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도 따뜻한 방 안에만 머물 수 없었다.
맏아들과 둘째 아들은 새벽잠을 털고 일어나 마당으로 뛰어나왔다.
젖은 김이 얹힌 김발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건조장 덕장으로 내달렸다.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덕장 줄에 김발을 척척 걸쳐 널었다.
칼바람에 아이들의 볼은 발갛게 얼어붙었다.
젖은 발을 만지느라 손등이 부르트고 살갗이 터져 피가 배어 나왔다.
"손이 시려도 발을 떨어뜨리면 안 된다.
김에 흙이 묻으면 못 써."
맏아들이 동생을 다독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찬바람 속에서도 아이들의 등줄기에서는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배병희는 묵묵히 다가와 아이들의 언 어깨를 쓸어주었다.
겨울 햇살과 갯바람을 머금은 김은 빠르게 말라갔다.
밀물 때 바다의 거름기를 빨아들이고 썰물 때 햇볕을 쬔 안면도 지주식 김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파래 한 올 섞이지 않은 맑은 묵빛이었다.
바짝 마른 김을 발에서 조심조심 떼어냈다.
백 장씩 추려 볏짚 끈으로 동여매니 반듯한 한 톳이 되었다.
그렇게 묶인 김 톳이 마루 밑과 광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안면도 중장리 김이 최상품이라는 소문은 바다 건너 육지 장터까지 퍼졌다.
육지와 섬을 잇는 길이 험하고 거친 비포장 황톳길이었지만 상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인천과 군산, 광천과 홍성의 도매상들이 트럭과 삼륜차를 몰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집 앞마당으로 들이닥쳤다.
아침이면 마당 앞길이 상인들의 트럭으로 꽉 찼다.
차에서 뛰어내린 상인들이 툇마루로 몰려들었다.
"배 사장!
지난번 김이 장터에 풀리자마자 반나절 만에 동이 났소!"
한 상인이 마루 위의 김 톳을 집어 들며 감탄했다.
"빛깔이 새까맣고 향이 기가 막히네.
딴 데 넘기지 말고 저 마당 트럭에 전부 실어주시오!"
뒤이어 다른 상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내가 어제부터 포구 건너와 기다렸소!
내가 톳당 오십 원을 더 얹어줄 테니 내 차부터 채워주시오!"
상인들은 서로 좋은 물건을 차지하려 앞다투어 품속에서 돈뭉치를 꺼냈다.
신문지에 싸맨 지폐를 툇마루 위에 털어놓자, 빳빳하게 묶인 돈뭉치가 마루 가득 수북하게 쌓였다.
배병희는 상인들이 부르는 웃돈에 흔들리지 않았다.
먼저 약속하고 찾아온 순서대로 차분하게 김을 내어주었다.
무게를 달고 수량을 헤아리는 손길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루 해가 저물 무렵이면 안방 구석의 사과 궤짝에 지폐가 넘쳐났다.
손으로 꾹 눌러도 뚜껑이 닫히지 않을 만큼 돈이 쌓였다.
하지만 배병희의 행색은 달라지지 않았다.
새 옷 한 벌 해 입지 않았고 털신 한 켤레 사 신지 않았다.
낮 동안 소금물과 뻘물에 절은 무명옷 그대로였다.
아내가 방바닥에 흩어진 돈을 추스르며 조용히 말했다.
"돈이 이렇게 들어왔는데, 당신 따뜻한 솜옷 한 벌이라도 맞추시지요."
배병희는 고개를 가만히 가로저었다.
"내가 입을 옷은 지금 필요 없소.
이건 그냥 들어온 돈이 아니오."
그는 돈뭉치를 묵묵히 쓸어내렸다.
"아이들 학교 보낼 학비로 묶어두어야 하오.
뭍으로 공부하러 가려면 밑천이 든든해야지.
그리고 봄이 오면 더 힘 좋은 농기계를 사서 땅을 갈아야 하오."
함부로 쓸 돈이 아니었다.
자식들의 앞길을 열고, 기계로 흙을 일굴 밑천이었다.
배병희는 사과 궤짝을 닫고 마당으로 나섰다.
평상에는 일을 마친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내가 가마솥에 끓여낸 뜨끈한 밥과 국이 돌았다.
배병희는 장부를 펴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어르신, 오늘 찬바람 맞으며 고생 많으셨습니다."
빳빳한 지폐를 두 손으로 받쳐 일꾼의 손에 쥐여주었다.
단 한 푼도 깎지 않았고 하루도 미루지 않았다.
그날 일한 삯은 그날 저녁 현금으로 깨끗하게 셈을 치렀다.
거친 손에 쥐어진 온전한 품삯에 주민들의 얼굴에 환한 빛이 돌았다.
"배 서방 덕에 올겨울 우리 식구 굶지 않고 쌀밥 먹게 되었네."
김 수확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마을 어르신들과 어민 대여섯 명이 사립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르신 하나가 툇마루에 걸터앉으며 배병희의 손을 잡았다.
"배 서방, 상의 끝에 자네를 찾아왔네.
우리 중장리 바다를 맡아 어촌계장을 맡아주게."
배병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르신, 저는 아직 나이도 젊고 바다 일만 해온 사람도 아닙니다."
어르신은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자네처럼 일머리가 밝고 셈이 바른 사람은 본 적이 없네.
흉년 든 겨울에 온 동네를 먹여 살린 이가 누구인가.
사람 귀한 줄 알고 신뢰를 지키는 자네가 바다를 이끌어야 우리 어민들이 다 함께 잘살 수 있네."
어민들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 서방이 맡아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 못 세우네.
제발 맡아주게."
이익을 좇아 얻어낸 자리가 아니었다.
겨울 갯벌에서 흘린 땀과 정직함이 쌓아 올린 두터운 신망이었다.
배병희는 마루 끝에 서서 마당 너머 아득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마당에 깊게 파인 트럭 바퀴 자국 위로 찬 갯바람이 쓸고 지나갔다.
손바닥에는 바다 소금기와 흙의 거친 감촉이 배어 있었다.
그는 어르신들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면도의 거친 바다가 청년 배병희의 어깨 위로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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