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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광천 장날의 대나무
1970년대 초·중반, 안면도와 광천
겨울이면 안면도 앞바다는 검푸른 김으로 뒤덮였다.
배병희의 김 공장이 자리 잡고 맛이 알려지자 온 마을의 눈길이 쏠렸다.
셈이 바르고 일머리가 밝은 그에게 사람들은 자연스레 어촌계장을 맡겼다.
삼십대의 젊은 나이였다.
그렇다고 목에 힘을 주지 않았다.
감투를 썼다고 안방에 들어앉아 도장이나 찍을 위인도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물때만 되면 가장 먼저 갯벌로 나섰다.
김 농사를 쉬는 봄여름에는 뜻맞는 이들과 낭장망(囊長網)을 둘러멨다.
큰 배가 없어도 빠른 물목만 타면 충분했다.
썰물 길목에 물살을 따라 긴 자루그물을 드리웠다.
거센 여울을 타고 은빛 멸치 떼가 쏟아져 들어왔다.
투명한 실치와 꼴뚜기까지 그물 끝자루에 하얗게 걸려들었다.
멸치는 성질이 급해 물 밖으로 나오면 금세 살이 물렀다.
배병희는 바닷바람 치는 자갈밭에 큰 가마솥부터 걸었다.
바닷물을 퍼 담아 장작불로 펄펄 끓였다.
갓 건진 멸치를 소쿠리째 넣고 한소끔 재빠르게 데쳐냈다.
소금을 치지 않아도 바닷물 간이 삼삼하게 배었다.
햇볕에 달아오른 몽돌밭에 그물을 펴고 그 위에 데친 멸치를 널었다.
아래에서는 몽돌 열기가 올라오고 위로는 서해 갯바람이 스쳐 갔다.
멸치는 비린내 없이 맑은 은빛으로 바삭하게 말랐다.
김틀에 얇게 펴 말린 뱅어포도 찾는 이가 줄을 이었다.
낭장망으로 쏠쏠하게 재미를 보았지만, 어촌계장 배병희의 속은 편치 않았다.
지주식 김이 돈이 된다는 소문에 너도나도 뛰어들었다.
일하려는 사람은 늘었지만 자재가 모자랐다.
김발을 엮고 지주를 세울 대나무가 문제였다.
섬 안의 대밭은 이미 밑동까지 다 베어내 남은 게 없었다.
외딴 섬 형편을 아는 육지 장사꾼들이 대나무 값을 서너 배씩 불렀다.
가난한 어민들은 비싼 자재 값 앞에 발만 굴렀다.
자재가 귀해지자 갯벌 인심마저 사나워졌다.
볕이 잘 들고 물길이 순한 갯골 명당을 차지하겠다고 다툼이 터졌다.
썰물 때마다 갯벌 위로 고함이 오갔다.
"여기가 왜 네 뻘밭이여!
작년까지 우리 집이 말뚝 박던 자리여!"
"바다에 임자가 어디 있어!
먼저 꽂는 사람이 임자지!"
평생 이웃으로 지내던 이들이 갯벌 한복판에서 멱살을 잡았다.
질척한 뻘탕 속으로 뒹굴며 흙탕물을 뒤집어썼다.
힘깨나 쓰는 집안이 너른 자리를 가로채고, 힘없는 이들은 거친 여울로 밀려났다.
어촌계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배병희는 작대기를 쥐고 갯벌로 들어갔다.
무릎까지 빠지는 개흙을 밟으며 갯골 물길을 하나하나 짚었다.
물 깊이와 조류의 힘을 손수 가늠했다.
배병희는 갯골 양 끝에 말뚝을 박고 새끼줄을 팽팽하게 띄웠다.
"다들 들으시오.
바다는 누구 혼자 차지하는 땅이 아니오."
삿대질하던 어민들이 숨을 죽이고 그를 쳐다보았다.
"물살이 거센 바깥쪽은 큰 배가 있는 집들이 맡으시오.
잔잔하고 볕 좋은 안쪽 갯골은 힘 부치는 노인네 있는 집부터 나눌 것이오."
배병희는 작대기 끝으로 뻘밭에 굵은 선을 그었다.
"발 사이에는 배가 다닐 수 있게 뱃길을 트시오.
이 줄을 넘어 말뚝을 꽂으면 내가 그 자리에서 다 뽑아버릴 테요."
칼같이 분명하고 공평했다.
억지를 부리던 이들도 더는 입을 떼지 못하고 물러섰다.
다툼은 잦아들었지만 걱정거리는 그대로였다.
마을 회관에 모인 어민들의 한숨이 깊었다.
"계장님, 자리를 얻었으면 뭐 합니까.
대나무가 없으니 발을 엮지를 못하는데."
"육지 장사치들이 대나무 한 단에 쌀 반 말을 부릅니다.
그 돈을 주고 어찌 김 농사를 짓습니까."
늙은 어민이 굳은살 박인 손으로 무릎을 쳤다.
너른 갯벌을 눈앞에 두고도 손을 놓아야 할 판이었다.
배병희는 장부를 덮었다.
"내가 육지에 다녀오리다."
그는 김과 낭장망으로 모아둔 목돈을 털었다.
제 돈을 밑천 삼아 천수만의 거센 물살을 갈랐다.
그가 찾아간 곳은 충남 광천 장터였다.
마침 장날이라 장터 안은 사람과 짐으로 북적였다.
목재전 골목에 들어서자 푸른 대나무 단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남도와 내륙 깊은 산골에서 베어 올린 것들이었다.
배병희는 단 사이를 누비며 대나무를 하나하나 만져보았다.
겉껍질이 매끄럽고 마디가 옹골찬 것들만 골랐다.
탄력이 짱짱하고 쉬 부러지지 않을 대나무였다.
"이 골목 대나무, 내가 한 번에 다 거두겠소."
목재 상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배병희는 거간꾼들을 물리고 큰 도매상과 바로 마주 앉았다.
수천 단을 몽땅 사들이는 조건으로 값을 크게 깎았다.
끈질긴 흥정 끝에 장터 시세의 절반 값으로 매듭을 지었다.
대나무를 가득 실은 목선이 천수만을 건너 안면도 포구로 들어왔다.
배가 휘청거릴 만큼 푸른 대나무가 산을 이루었다.
포구에서 애태우던 어민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배병희는 바짓단을 걷어붙이고 대나무 단을 날라 부렸다.
그는 수첩을 펴고 어민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집집마다 필요한 만큼 대나무를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값을 치르던 어민들의 손이 멈췄다.
"계장님, 셈이 잘못된 것 아니요?
뱃삯이랑 기름값은 어디 가고 장터 원가만 적혀 있잖소."
어민들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중간 이문은커녕 뱃삯조차 얹지 않은 밑천 가격이었다.
배병희는 소매에 묻은 대나무 찌꺼기를 털어내며 말했다.
"어촌계장이 동네 어르신들 상대로 장사치 노릇을 하겠습니까.
원가 그대로 드릴 테니 어서 김발이나 짜시오."
"그래도 계장님이 손해를 보면 안 되지요."
"마을이 살아야 바다도 사는 법입니다.
어서 지고 가시오."
어민들은 코끝이 찡해진 채 대나무 단을 짊어졌다.
배병희의 손에는 잇속 대신 날카로운 대나무 살에 긁힌 생채기만 남았다.
바다에서 대나무를 풀고 나자 곧바로 가을걷이가 닥쳤다.
섬 들판에는 벼를 벨 일손이 턱없이 모자랐다.
낫질로 며칠씩 허리를 굽혀야 하니, 때를 놓쳐 서리를 맞고 벼를 떨구는 논이 허다했다.
배병희는 다시 광천 장터로 나갔다.
그리고 결심 끝에 최신식 농기계인 "바인더"를 사들였다.
벼를 베는 동시에 노끈으로 볏단을 묶어주는 보행형 수확기였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아직 낯선 기계였다.
논에 바인더를 넣자 우렁찬 소리와 함께 칼날이 움직였다.
배병희가 손잡이를 잡고 앞으로 밀고 나가자 벼 밑동이 싹둑 잘려 나갔다.
기계는 볏단을 단단히 묶어 옆으로 척척 내려놓았다.
장정 여럿이 온종일 매달려야 할 논 한 마지기를 불과 한 시간 만에 끝냈다.
구경하던 농민들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배병희는 제 논을 다 베고도 시동을 끄지 않았다.
일손이 딸려 발을 구르는 이웃들의 논으로 바인더를 몰고 들어갔다.
섬마을 들판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겨울 갯벌에는 대나무 김발이 늘어섰고, 가을 들판에는 바인더가 지난 볏단이 줄을 지었다.
제 잇속보다 마을 일부터 챙기는 배병희를 보며, 사람들의 신망은 깊어졌다.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마당에는 갯벌 흙탕물이 말라붙어 있었고 매캐한 기름내가 감돌았다.
아내는 흙 묻은 옷가지를 받아 들고 따뜻한 밥상을 차려냈다.
투박한 상 머리에 마주 앉은 부부는 소리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바다는 풍성했고 들판은 넉넉했다.
땀을 쏟은 만큼 정직하게 거두는 나날이었다.
배병희는 붉게 물드는 천수만 수평선을 가만히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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