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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50마력 발동기를 깨우다
1983년 말, 독정 정미소
정미소 판자문을 밀치자 눅눅한 곰팡내와 퀴퀴한 쌀겨 냄새가 코를 찔렀다.
기울어진 함석지붕 틈으로 초겨울 볕이 가늘게 새어 들었다.
들보 위에서는 참새 떼가 인기척에 놀라 푸드득 날아올랐다.
바닥 구석마다 쥐똥과 삭은 낟알이 수북하게 널려 있었다.
어두컴컴한 공장 한복판에는 거대한 쇳덩이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50마력 조양 디젤 발동기였다.
무쇠 몸체에는 붉은 녹이 슬었고, 찌든 기름때가 검게 굳어붙어 있었다.
천장 아래를 가로지른 7미터 장축은 베어링이 뻑뻑하게 굳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축에 걸려 있던 가죽 평벨트들도 맥없이 풀려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남양만 간척지 들판에서는 막 한 해 벼농사가 끝난 참이었다.
농민들이 피땀으로 거둔 볏가마는 쏟아져 나오는데, 벼를 찧어줄 방앗간은 맥이 끊겨 있었다.
기계는 오랫동안 제대로 손보지 못한 채 멈춰 있었다.
배병희는 말없이 작업복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가 가장 먼저 손을 댄 곳은 기계가 아니라 지붕 틈이었다.
들보와 환기창 틈으로 드나드는 참새 떼가 창고 낟알을 쪼아 먹고 똥을 어지럽게 싸질러 놓고 있었다.
"낟알 한 톨도 농민들의 피땀이다.
참새 밥으로 버려둘 수는 없다."
배병희는 사다리를 놓고 높은 들보 위로 기어올랐다.
손끝이 아린 겨울바람을 맞으며 촘촘한 나일론 그물을 둘렀다.
환기창과 처마 밑, 벌어진 함석 틈마다 빈틈없이 그물을 엮어 참새가 드나들 구멍을 죄다 막았다.
사흘을 꼬박 매달리자 방앗간 안에서 날갯짓 소리가 뚝 끊겼다.
그 무렵 안면도에서 반가운 사람들이 당도했다.
우마차 탈곡기와 김 공장에서 거친 쇠붙이를 함께 다뤄온 조카들이었다.
디젤 엔진 다루는 솜씨가 빼어난 기관수도 묵직한 공구함을 둘러메고 마당에 들어섰다.
방위병으로 복무 중이던 맏아들도 퇴근길에 작업복을 갈아입고 달려왔다.
"아버지, 제가 돕겠습니다."
스패너를 쥐고 다가선 맏아들의 눈빛이 야무졌다.
배병희는 말없이 아들의 어깨를 한 번 툭 쳤다.
안면도 갯벌과 남양만 소금 들판을 함께 버텨낸 피붙이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기관수가 연장을 챙겨 들고 발동기 앞에 자리를 잡았다.
볼트를 하나씩 풀고 무거운 실린더 헤드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묵직한 쇠 뚜껑이 열리자 매캐한 그을음과 함께 시커멓게 말라붙은 타르 찌꺼기가 드러났다.
피스톤 링은 실린더 안쪽에 엿가락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억지로 힘을 주어 돌렸다가는 무쇠 실린더 벽이 통째로 긁혀나갈 판이었다.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고약합니다.
크랭크축까지 꽉 물려서 꿈쩍도 안 합니다."
기관수가 기름 묻은 소매로 이마를 훔치며 혀를 찼다.
곁에 선 조카들도 굳어버린 쇳덩이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쇠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람이 정성을 들인 만큼 제 숨을 찾는 법이다."
배병희는 양동이에 등유와 경유를 퍼 왔다.
솔에 기름을 적셔 엉겨 붙은 때를 박박 문질러 닦았다.
말라붙은 카본 찌꺼기가 녹아내리며 차가운 무쇠 속살이 드러났다.
나무 쐐기를 대고 피스톤을 살살 달래며 밀어낸 뒤, 배병희는 실린더 안쪽 벽과 밸브 자리에 낀 녹과 때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안면도 들판에서 숟가락에 납을 녹여 메탈 베어링을 깎아내던 그 장인의 손끝이었다.
조금이라도 유격이 맞지 않으면 압축이 새어버리기에, 닳거나 긁힌 자리는 없는지 살폈다.
맏아들과 조카들은 천장에 매달린 7미터 장축에 매달렸다.
무거운 주철 풀리를 줄줄이 내려 찌든 때를 씻어내고, 먹줄을 튕겨 틀어진 수평을 바로잡았다.
헛돌던 베어링을 털어내고 새 부품을 끼워 넣자 육중한 쇠 장축이 비로소 부드럽게 돌아갔다.
작업장 안은 등유 냄새와 쇳가루 먼지로 자욱했다.
사람들의 손과 얼굴은 기름때로 얼룩져 흰자위만 번뜩였다.
며칠 동안 밤낮없이 이어진 노동에 모두의 어깨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자정이 넘자 살을 에는 북풍이 문풍지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때 정미소 판자문이 삐걱 열리며 구수한 냄새가 찬 공기를 뚫고 번져왔다.
아내가 가마솥에서 장작불로 푹 끓여낸 소고기국밥을 양철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왔다.
큼직하게 썬 무와 대파, 두툼한 고기가 담긴 뚝배기마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배병희는 연장을 내려놓고 일꾼들을 따뜻한 사무실 온돌방으로 이끌었다.
"다들 고생했다.
식기 전에 뜨끈하게 한 그릇들 비워라."
일꾼들은 말없이 뚝배기에 밥을 말아 한술씩 떠먹었다.
언 몸을 녹여주는 진한 국물이 빈속을 따스하게 채웠다.
둘러앉아 밥 한술을 나누는 온기 속에서 며칠간 쌓인 고단함이 눈 녹듯 풀려나갔다.
동이 틀 무렵 해체했던 부품들을 하나씩 역순으로 조립했다.
윤활유와 연료 공급 상태를 확인했다.
이제 발동기를 깨울 차례였다.
"기관수, 크랭크 물려라!"
배병희의 신호에 기관수가 거대한 무쇠 손잡이를 축에 걸었다.
기관수와 배병희, 맏아들이 손잡이를 나눠 잡았다.
"하나, 둘, 셋!"
감압 상태에서 세 사람이 온몸의 무게를 실어 크랭크 손잡이를 힘껏 돌렸다.
묵직한 회전축의 저항이 손바닥을 타고 어깨뼈까지 뻐근하게 전해졌다.
피스톤이 차가운 공기를 거칠게 빨아들이며 쉭쉭거리는 소리가 공장 바닥을 울렸다.
세 사람은 이를 악물고 회전 속도를 바짝 끌어올렸다.
"압축 걸어라!"
배병희가 외치자 기관수가 감압을 풀어 압축을 걸었다.
배기통에서 거친 기침 소리와 함께 새하얀 매연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이내 대포를 쏘는 듯한 육중한 폭발음이 독정리 들판을 뒤흔들었다.
거대한 플라이휠이 쿵쿵 소리를 내며 맹렬한 기세로 돌기 시작했다.
죽어 있던 50마력 조양 발동기가 묵직한 고동을 울리며 마침내 깨어났다.
7미터 쇠 장축이 흔들림 없이 회전하자, 수십 가닥의 가죽 평벨트가 풀리를 물고 팽팽하게 돌아갔다.
도정기와 석발기, 풍구와 승강기가 굉음을 내며 일제히 살아 움직였다.
멈춰 섰던 방앗간이 거대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배병희는 호퍼에 벼를 한 포대 쏟아부었다.
기계를 거쳐 나온 낟알들이 껍질을 벗고 눈부시게 하얀 쌀알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갓 찧은 쌀을 한 움큼 쥐어 든 배병희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정미소가 다시 돌기 시작하자 배병희는 농민들과의 약속부터 지켰다.
인수 때 책임지기로 한 밀린 볏값을 제 논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정리해 주었다.
새로 들어온 벼에 대해서도 약속한 정산 날짜가 되면 단 하루의 지체도 없이 빳빳한 현금으로 셈을 치러주었다.
소문은 겨울바람보다 빠르게 인근 마을로 퍼져나갔다.
"새마을정미소 배병희가 기계를 살려냈단다."
"그 집은 볏값을 단 하루도 안 미루고 제때 내준다더라."
독정리는 물론 장안면의 다른 마을 농가들까지 벼를 싣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신작로에는 벼를 가득 실은 경운기와 소달구지, 리어카가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섰다.
정미소 마당은 쏟아져 들어오는 볏가마니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마당을 넘어 논두렁까지 수북하게 쌓여가는 볏가마니를 바라보며, 배병희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잿빛 눈구름이 낮게 드리운 겨울 하늘 아래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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