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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장대비 속 볏가마
1980년대 중반, 정미소 옆 야적장
50마력 조양 디젤 발동기가 뿜어내는 묵직한 진동이 흙바닥을 흔들었다.
함석지붕 아래는 매캐한 매연과 시커먼 그을음으로 한낮에도 어둑했다.
대포 소리처럼 쿵쿵 터지는 폭발음에 사람 말소리는 번번이 묻혔다.
천장 들보를 가로지른 7미터 쇠 장축이 세차게 돌았다.
그 축에 걸린 수십 가닥의 소가죽 평벨트가 채찍처럼 허공을 가르며 끼익거리는 마찰음을 냈다.
쇠막대 하나에 도정기와 석발기, 풍구와 승강기가 모조리 물려 돌아가는 구조였다.
가죽 벨트들은 천장과 바닥 사이를 가파르게 오가며 쉴 새 없이 허공을 쳤다.
작업장 안은 허공을 메운 쌀겨 먼지와 매캐한 기름 냄새로 숨이 턱턱 막혔다.
하지만 요란한 소음과 매연보다 더 끔찍한 것은 언제 터질지 모를 사고였다.
회전축과 벨트 어디에도 안전망 따위는 없었다.
팽팽하게 도는 가죽 벨트에 옷자락이라도 스치면 사람이 통째로 말려 들어갈 판이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몸뚱이가 축에 감겨드는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어느 늦가을 오후, 벼 가마니를 나르던 젊은 일꾼의 소매가 회전 풀리에 물려 들어갔다.
북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작업복 상의가 순식간에 뜯겨 나갔다.
손가락 몇 마디 차이로 팔을 다치지 않은 일꾼은 사색이 되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도 넋이 나가 그 자리에 굳어졌다.
조금만 늦었어도 뼈가 바스러질 뻔한 찰나였다.
기계 고장도 끊이지 않았다.
도정기 한 대에 작은 돌멩이라도 끼면 7미터 장축 전체가 덜컥 멎어 섰다.
방앗간의 모든 일손이 한순간에 멈췄고, 풀려난 벨트가 채찍처럼 튀어 올라 일꾼들을 덮칠 뻔했다.
바닥에 주저앉은 일꾼을 일으켜 세우며 배병희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땀과 쌀겨로 범벅이 된 청년의 등을 쓸어내리는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사람 다치게 하면서 기계를 돌리는 곳은 진짜 공장이 아니다."
배병희는 위험천만한 디젤 발동기와 가죽 벨트를 몽땅 걷어내기로 마음먹었다.
기계마다 모터를 따로 달아 필요할 때마다 켜고 끄는 전기 체제로 완전히 뜯어고쳐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 독정리 들판은 간척지였다.
농가에 들어온 단상 저압선만으로는 정미소의 동력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수십 마력짜리 도정기를 힘차게 돌릴 380볼트 삼상 동력선은 정미소까지 들어와 있지 않았다.
공장용 전기를 끌어오지 못하면 모터를 들여놔 봐야 헛일이었다.
배병희는 읍내 한전 출장소를 찾아가 삼상 동력선을 끌어달라고 사정했다.
담당 직원은 들판 지도를 펼쳐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신작로 큰길에서 정미소까지 2킬로미터가 넘어요.
허허벌판 방앗간 하나 돌리자고 그 먼 거리에 전봇대 수십 개를 심어줄 예산은 나라에 없습니다."
나라에서 놓아주지 않는다면 제 돈으로 전봇대를 세우고 전선을 끌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농촌 배전망은 용량이 달려 전압이 걸핏하면 널을 뛰었다.
전압이 뚝 떨어지면 큰돈 들여 들여놓은 모터 코일이 타버리기 십상이었다.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과 일꾼들마저 손을 내저으며 만류했다.
"배 사장, 기름만 부으면 잘 돌아가는 발동기를 왜 치우오?
멀쩡한 논까지 팔아가며 들판에 전봇대를 수십 개나 심겠다니, 제정신이 아니오."
"사람이 다치는데 쌀 천 가마를 찧은들 무슨 소용인가.
일하는 사람이 마음 놓을 수 있어야 진짜 공장이지."
배병희의 결단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안방 장롱 깊숙이 둔 누런 서류 봉투를 다시 꺼냈다.
안면도를 떠나와 소금기를 우려내며 피땀으로 일군 남양만 6만 평 논 중 일부를 또다시 팔았다.
논을 판 목돈으로 그는 곧장 수십 개의 콘크리트 전봇대와 굵은 동력 전선 타래를 사들였다.
며칠 뒤 육중한 전봇대를 실은 대형 화물차가 흙먼지를 날리며 들판으로 들어왔다.
12미터짜리 무거운 콘크리트 기둥들이 농로 가에 가득 부려졌다.
신작로 어귀에서 정미소 마당까지는 2킬로미터가 넘는 질척한 논두렁길이었다.
배병희는 맏아들과 일꾼들을 이끌고 직접 들판으로 나섰다.
손에 굳은살이 박인 배병희가 앞장서서 삽과 곡괭이로 논두렁의 진흙을 깊게 파냈다.
어른 키만큼 깊은 구덩이를 수십 개 파 내려가는 고된 노역이었다.
"줄 바짝 당겨라!
중심 잡고 세운다!"
굵은 밧줄을 걸고 사람들과 힘을 모아 무거운 콘크리트 기둥을 하나씩 일으켜 세웠다.
발이 뻘흙에 푹푹 빠지고 손바닥 껍질이 벗겨졌다.
그렇게 며칠을 씨름한 끝에, 마침내 들판을 가로지르는 전봇대 행렬이 우뚝 일어섰다.
전신주 위로 올라간 기술자들이 애자를 달고 동력선을 팽팽하게 쳤다.
인입 공사를 마치자 정미소 배전반에도 380볼트 삼상 전기가 들어왔다.
하지만 들쑥날쑥한 농촌 전압을 잡는 일이 남았다.
배병희는 서울과 인천의 공구 상가를 뒤져 필요한 전기 설비를 구해 왔다.
배전반 곁에 설비를 앉히고 전선을 물렸다.
마침내 380볼트 전압이 안정적으로 잡혔다.
전기가 통하자 배병희는 주저 없이 연장을 들었다.
천장을 가로지르던 7미터 쇠 장축을 끌어내리고, 어지럽게 얽혀 있던 가죽 벨트를 모조리 걷어냈다.
맏아들과 함께 도정기, 석발기, 승강기 밑바닥마다 규격에 맞는 삼상 모터를 얹고 볼트를 단단히 조였다.
배선 작업이 끝난 늦은 밤, 배병희는 벽면의 커다란 차단기 레버를 힘껏 올렸다.
"철컥!"
묵직한 소리와 함께 천장에 달린 형광등들이 깜빡이더니 일제히 환한 빛을 뿜었다.
매연과 그을음에 찌들었던 방앗간 구석구석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거미줄과 먼지로 덮여 있던 벽면이 하얗게 드러났다.
이어 도정기 스위치를 누르자, "우우웅-" 하는 낮고 묵직한 모터 소리가 부드럽게 바닥을 울렸다.
기름 타는 냄새와 귀청 떨어지던 대포 소리가 말끔히 가셨다.
공장 안에는 웅웅거리는 모터의 고른 숨소리만 찼다.
위태롭게 돌아가던 가죽 벨트가 사라지자 작업장이 한결 넓고 말끔해졌다.
기계마다 달린 스위치로 필요한 것만 골라 돌리고 끌 수 있으니 일의 능률도 배로 뛰었다.
일꾼들은 눈을 껌뻑이며 밝아진 일터를 둘러보았다.
더는 옷자락이 빨려 들어갈까 조마조마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굳어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절로 웃음기가 돌았다.
배병희는 전선 피복과 기름때가 엉겨 붙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엔 굳은살이 박였고, 억센 전선을 꼬느라 손마디 곳곳이 긁히고 베여 있었다.
하지만 속은 소나기를 맞은 듯 후련했다.
낡고 위험하던 시골 방앗간이 비로소 제대로 된 근대식 공장의 틀을 갖추었다.
환한 불빛 아래서 정미소는 거침없이 돌아갔고, 들판의 벼가 쉴 새 없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 번듯한 일터의 뒤편에는, 하루 세끼 수십 명 일꾼의 밥상을 차려내느라 묵묵히 부엌을 지킨 아내의 거친 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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