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 대신 지게

새벽안개가 걷힐 무렵이면 마을 어귀 당산나무 아래로 또래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무명 책보를 질끈 둘러맨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고샅길 너머로 맑게 번졌다.
십 리 산길을 걸어 면 소재지 국민학교로 가는 길이었다.
먼 길이었지만 책보를 맨 아이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소년 배병희는 낮은 흙담 뒤에 비켜선 채 멀어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학교 문턱을 겨우 밟아보고 얼마 다니지 못한 채 그만둔 뒤에도, 소년은 늘 교실이 그리웠다.
하지만 당장 오늘 저녁 죽 쑬 곡식을 걱정해야 하는 집안 형편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일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날이 밝기도 전에 마른기침을 뱉으며 돌밭으로 나갔고, 어머니는 터진 손으로 광주리를 머리에 이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산모롱이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자, 배병희는 부엌 흙벽에 세워둔 지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소나무 가지로 짜 만든 지게는 소년의 키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았다.
짚으로 굵게 꼰 멜빵에서는 땀에 찌든 갯내와 마른 흙먼지 냄새가 훅 끼쳐왔다.
소년은 벼린 낫을 지게 가지에 비스듬히 꽂고 멜빵에 두 팔을 뀄다.
배병희는 짚신 끈을 단단히 조여 매고 가파른 산비탈로 발을 디뎠다.
계절이 바뀔수록 소년의 어깨에 얹히는 지게의 무게는 한층 더 묵직해졌다.
봄이면 겨우내 삭힌 거름을 지게에 져 날라 밭고랑에 폈고, 여름 뙤약볕 아래서는 풀을 베어 두엄자리에 쌓았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찬 바람이 불면 온 산을 누비며 겨울 땔감을 구했다.
억센 참나무 가지를 쳐내고 마른 솔가리를 긁어모아 지게 위에 차곡차곡 올렸다.
단단히 동여맨 나뭇짐의 높이가 소년의 키를 훌쩍 넘겼다.
지겟작대기로 땅바닥을 짚고 일어설 때마다 거친 짚 멜빵이 어깨 살갗을 파고들었다.
물기 머금은 생나무의 무게가 여린 어깨뼈를 짓눌러 무릎이 시큰하게 꺾였다.
다리가 후들거려도 산길 중간에서 지게를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한 번 주저앉으면 그 무거운 짐을 지고 다시 일어서기가 곱절은 더 힘겨운 탓이었다.
좁은 산길의 가시덤불이 목덜미와 팔뚝을 할퀴어 붉은 생채기를 냈다.
흘러내린 땀방울이 상처에 스며들 때마다 쓰라렸으나, 소년은 입술을 다물고 묵묵히 고개를 넘었다.
그렇게 모은 땔나무를 지게 가득 짊어지고 오일장이 열리는 장터로 향했다.

장날의 장터는 사람들의 고성과 흙먼지로 늘 북새통이었다.
그중에서도 곡물전은 나무 말과 됫박을 든 상인과 농사꾼들이 전대를 쥔 채 팽팽하게 맞서는 자리였다.
"자, 보리가 닷 말 서 됫박이니, 말당 시세대로 쳐서 장세 제하고 남는 돈이 딱 요만큼이오."
중절모를 쓴 상인이 대나무 주판알을 요란하게 퉁겨 올렸다.
곁에 선 농부는 찰칵거리는 주판알만 내려다보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무 장터 한구석에 나뭇짐을 부려놓은 배병희는 숨을 고르며 곡물전 곁으로 다가섰다.
소년의 눈과 귀는 상인의 손끝과 입술에서 떨어지는 숫자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나무 됫박으로 퍼 올리는 곡식의 분량을 머릿속에 또렷이 띄우고, 말당 시세와 장세, 우수리 푼돈을 빠르게 굴렸다.
찰칵!
상인의 손가락이 주판의 마지막 알을 미처 퉁겨 올리기도 전에, 소년의 머릿속에서 먼저 셈이 맞아떨어졌다.
수북하게 얹어주는 척하며 눈속임하는 것이며, 은근슬쩍 떼어가는 것까지 숫자의 아귀가 훤히 읽혔다.
장터 끝자락에는 부서진 농기구를 고치고 벼리는 대장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흙바닥에는 날이 깨진 작두와 휜 쟁기 보습, 이 빠진 쇠스랑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무쇠를 모루 위에 얹고, 메로 내리칠 때마다 푸른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배병희는 땔나무를 팔아 보리쌀 몇 되를 바꾸고 난 뒤에도 한참이나 대장간 앞을 떠나지 못했다.
매캐한 석탄 연기와 쇳가루 냄새 속에서 대장장이가 메질하는 손놀림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불에 달군 쇠가 두들겨질 때마다 어떻게 결을 따라 휘어지는지 눈여겨보았다.
이음새와 톱니가 어떤 각도로 맞물려야 큰 힘을 버텨내는지도 살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소년은 길가나 헛간 구석에 버려진 쇠붙이들을 주워 모았다.
붉게 녹슨 나사못과 부러진 낫날, 이 나간 쇠스랑 조각까지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었다.
밤늦도록 호롱불 아래서 쇳조각을 만지작거리는 막내를 보며, 큰형이 안쓰러운 듯 혀를 찼다.
"막내야, 온종일 산 타느라 뼈마디가 다 쑤실 텐데 그 쇳조각은 만져서 뭣 하냐. 눈 좀 붙이고 잠이나 한숨 더 자거라."
소년은 빙그레 웃음만 지을 뿐 대꾸 없이 기름 묻은 헝겊으로 쇠의 붉은 녹을 닦아냈다.
마모된 이음새를 맞춰 보고 줄칼로 갈아보며, 차가운 쇠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원리를 손끝의 감각으로 하나씩 익혀 나갔다.
그해 가을, 한창 벼 타작이 벌어지던 이웃집 마당에서 사달이 났다.
장정들이 발판을 밟아 톱니 원통을 돌리던 수동식 회전 탈곡기가 요란한 쇳소리를 내더니 덜컥 멈춰 선 것이었다.
가을 해는 짧고 털어내야 할 볏단은 마당 가득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당장 기계가 멈춰 서자 주인어른과 일꾼들의 낯빛이 흙빛으로 굳어졌다.
"안쪽 축이 아주 뒤틀렸구먼. 오늘 해 지기 전에 타작 끝내기는 다 틀렸네."
무거운 탈곡기를 지게에 얹어 장터 대장간까지 지고 나가려면 왕복 반나절은 족히 걸릴 판이었다.
어른들이 멈춰 선 탈곡기 주변을 맴돌며 한탄만 내쉴 때, 나뭇짐을 지고 지나가던 배병희가 마당가에 지게를 세워두고 다가섰다.
"어르신, 어디가 걸렸는지 제가 한번 들여다봐도 되겠습니까?"
애가 타던 주인 농부가 코웃음을 치며 손사래를 쳤다.
"네가 기계를 뭘 안다고 그러느냐. 손 다치지 말고 저만치 물러서 있거라."
그러나 소년은 물러서지 않고 탈곡기 옆 흙바닥에 조용히 쪼그려 앉았다.

배병희는 기름때 묻은 작은 손으로 꼼짝도 하지 않는 회전축과 발판 이음새를 가만히 흔들어 보았다.
손끝에 전해지는 유격과 뻑뻑한 걸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고개를 깊숙이 들이밀어 살펴보니, 발판의 힘을 전달하는 쇠톱니가 살짝 비틀려 있었고 회전축을 받쳐주던 쇠고리 한쪽이 닳아 내려앉아 있었다.
중심이 어긋난 채로 발판을 계속 밟아대니 톱니가 헛돌며 축을 갉아먹은 것이었다.
"축을 받치는 고리가 닳아서 톱니가 어긋났습니다. 틈만 바로잡아 주면 돌아갈 것 같습니다."
소년의 말에 주인 농부의 눈이 커졌다.
배병희는 지겟작대기 끝으로 톱니 틈새에 빽빽하게 낀 마른 짚풀과 쇳밥을 말끔히 파냈다.
소년은 닳아서 턱이 진 축 자리를 줄칼로 참을성 있게 갈아내어 수평을 맞췄다.
이어서 빈틈이 생긴 고리 밑바닥에 두꺼운 무쇠 조각을 쐐기처럼 단단히 덧대어 내려앉았던 축의 중심을 정확히 들어 올렸다.
마당에 모인 어른들은 숨을 죽인 채 소년의 손끝만 내려다보았다.
기름 친 헝겊으로 톱니 마디마디를 닦아낸 배병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발판 위에 한 발을 올렸다.
소년이 체중을 실어 발판을 힘차게 내리밟았다.
찰칵, 촤르르륵!
어긋나 있던 쇠톱니가 제자리에 정확히 맞물리며 매끄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당을 메운 어른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 나왔다.
멈췄던 타작이 다시 시작되고, 돌아가는 회전통 위로 황금빛 낟알과 볏짚 먼지가 시원하게 솟구쳐 올랐다.
주인 농부는 기름땀으로 범벅이 된 소년의 등을 연신 두드리며, 가마솥에서 갓 볶아낸 고소한 콩을 주머니가 불룩하도록 한 움큼 쥐여주었다.
배병희는 꾸벅 인사를 올리고 말없이 연장을 챙겼다.
땅거미가 짙게 깔릴 무렵, 소년은 빈 지게를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헛간 벽에 지게를 기대어 세우자, 닳아빠진 지게 다리가 마른 흙바닥에 툭 닿는 소리가 적막한 마당에 낮게 울렸다.
우물가로 다가간 배병희는 땀과 먼지에 절어 빳빳해진 무명 저고리를 벗어젖혔다.
서늘한 저녁 바람이 땀 식은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달빛 아래 드러난 소년의 양어깨는 성한 곳이 없었다.
억센 짚 멜빵이 날마다 짓누른 자리는 시퍼렇게 멍이 든 채 검붉게 굳어 있었다.
양쪽 쇄골 위로는 나무옹이처럼 두껍고 질긴 혹이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학교에 다니는 또래 아이들이 쑥쑥 키를 키우는 동안, 날마다 무거운 나뭇짐에 짓눌린 소년의 키는 좀처럼 자라지 못했다.
멍든 어깨뼈를 거친 손바닥으로 쓸어내릴 때마다 뼈마디 깊은 곳에서 시리고 아린 통증이 번져 나왔다.
배병희는 두레박으로 차가운 우물물을 가득 길어 올려 달아오른 어깨 위로 거침없이 쏟아부었다.
찬 물줄기가 짓무른 살갗과 뜨거운 숨을 식혀 주었다.
그런데 소년이 물기를 훔치며 바라본 바다 너머의 하늘은 유난히 어두웠다.
1950년 여름, 외딴섬 안면도까지 집어삼킬 전쟁의 먹구름이 수평선 너머로 소리 없이 밀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