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천 장날의 대나무

겨울이면 안면도 앞바다는 검푸른 김으로 뒤덮였다.
배병희의 김 공장이 자리를 잡고 중장리 김 맛이 육지 장터까지 알려졌다.
마을 사람들은 일머리 밝고 신망이 두터운 그에게 어촌계장을 맡겼다.
삼십 대의 젊은 나이에 어촌계장이 되었지만 뒷짐을 지는 법은 없었다.
물때만 되면 그는 여전히 남들보다 먼저 고무장화를 신고 갯벌로 나섰다.

김 농사를 쉬는 봄여름에는 뜻 맞는 주민들과 함께 낭장망(囊長網)을 둘러멨다.
큰 동력선이 없어도 조류가 거센 물목을 타면 되었다.
썰물이 빠져나가는 길목 양쪽에 말뚝을 박고 물살을 따라 긴 자루그물을 드리웠다.
여울을 타고 멸치 떼가 그물 속으로 들어왔다.
실치와 꼴뚜기까지 그물 끝자루에 걸려들었다.
멸치는 물 밖으로 나오면 금세 살이 물렀다.
배병희는 포구 자갈밭에 커다란 무쇠 가마솥부터 걸었다.

바닷물을 퍼 담아 장작불로 끓였다.
갓 건져 올린 멸치를 대소쿠리째 넣고 한소끔 데쳐 건졌다.
따로 소금을 치지 않아도 바닷물 간이 삼삼하게 배어들었다.
햇볕에 달아오른 몽돌밭에 그물을 펴고 그 위에 데친 멸치를 고루 널었다.
아래에서는 몽돌의 열기가 올라오고 위로는 갯바람이 불었다.
멸치는 은빛으로 바삭하게 말랐다.
겨울에 쓰던 김틀에 실치를 얇게 펴 말린 뱅어포도 장터 상인들이 찾았다.
낭장망으로 봄여름에도 벌이가 생겼지만, 김 농사를 늘리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지주식 김이 돈이 된다는 소문에 일하려는 사람이 부쩍 늘면서 김발을 엮고 지주를 세울 대나무가 모자랐다.
섬 안의 대밭은 이미 베어낸 뒤였다.
육지 장사꾼들은 대나무 가격을 예년의 서너 배로 올려 불렀다.
볕이 잘 들고 물길이 순한 안쪽 갯골을 차지하려는 다툼도 벌어졌다.
물이 빠질 때마다 갯벌에서 고함이 오갔다.
"작년까지 우리 집이 말뚝 박던 자리인데, 여기가 왜 네 뻘밭이여!"
"바다에 임자가 따로 있간디, 먼저 말뚝 꽂는 사람이 임자지!"
담장을 맞대고 살아온 이웃들이 갯벌 한복판에서 멱살을 잡았다.
말뚝을 빼앗으려다 뻘탕 속으로 넘어지기도 했다.
장정 여럿을 둔 집안이 너른 자리를 차지하자 일손 약한 노인 가구들은 물살 센 바깥 여울로 밀려났다.
날마다 어촌계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배병희는 긴 대나무 작대기를 쥐고 직접 갯벌로 걸어 들어갔다.
무릎까지 빠지는 개흙을 밟으며 안쪽 갯골부터 바깥 여울까지 물길을 짚어보았다.
작대기를 뻘 바닥에 찔러 수심을 재고, 정강이에 부딪히는 조류의 세기를 가늠했다.

이튿날 썰물 때, 배병희는 어민들을 모두 부른 뒤 갯골 양 끝에 참나무 말뚝을 박고 새끼줄을 팽팽하게 띄웠다.
"다들 들으시오. 이 바다는 힘센 집안 혼자 차지하는 땅이 아니오."
삿대질을 하던 어민들이 배병희를 쳐다보았다.
"물살이 거센 바깥쪽은 조류가 좋아 김이 두껍게 자라니, 큰 배와 장정이 있는 집들이 맡으시오. 대신 물길이 잔잔하고 얕은 안쪽 갯골은 힘 부치는 노인네 있는 집부터 먼저 나눌 것이오."
배병희는 작대기 끝으로 뻘밭에 선을 그었다.
"그리고 김발 사이마다 거룻배가 다닐 수 있게 뱃길을 트시오. 누구든 이 줄을 넘으면, 내가 직접 말뚝을 뽑을 테요."
억지를 부리던 이들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자리 다툼은 잦아들었지만 대나무를 구할 일은 남았다.
그날 밤 어민들이 마을 회관에 모였다.
"계장님, 대나무가 없어 김발을 엮지도 못하는데 자리를 나누어 받으면 뭐 합니까."
"육지 장사치들이 대나무 한 단에 쌀 반 말을 부르는데, 그 값을 치르고 어찌 김 농사를 짓겠습니까."
늙은 어민이 손으로 무릎을 쳤다.
배병희는 아무 말 없이 어촌계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안방 사과 궤짝에는 지난겨울 김을 팔고 봄여름 멸치를 삶아 모아둔 목돈이 들어 있었다.
자식들을 육지 학교로 보낼 학비이자 농기계를 장만할 돈이었다.
천수만을 건너가 수천 단의 대나무를 한꺼번에 사 오려면 그 돈을 모두 써야 했다.
풍랑을 만나거나 셈이 어긋나면 집안 살림이 흔들릴 일이었다.
배병희는 덮은 장부 모서리를 엄지손가락으로 눌렀다.
잠시 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육지에 다녀오리다."
이튿날 새벽, 배병희는 집안의 종잣돈을 전대에 묶어 차고 포구로 나섰다.
목선 한 척을 빌려 타고 천수만을 건넜다.
그가 찾아간 곳은 충남 광천 장터였다.
마침 오일장이 선 날이라 장터는 우마차와 등짐장수들로 북적였다.

목재전 골목에는 대나무 단들이 쌓여 있었다.
남도와 내륙 산골에서 베어 온 대나무였다.
배병희는 옷소매를 잡아끄는 거간꾼들을 물리치고 대나무 단 사이를 천천히 누볐다.
대나무 줄기를 하나하나 쥐어보고 끝을 휘어 탄력을 살폈다.
겉껍질이 매끄럽고 마디가 옹골차야 겨울 파도에도 쉬 부러지지 않았다.
물건을 꼼꼼히 확인한 배병희는 목재전 골목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매상 주인과 마주 앉았다.
"이 골목에 나와 있는 대나무, 내가 현찰로 한 번에 다 거두겠소."
도매상의 눈이 커졌다.
배병희는 전대에서 현금 뭉치를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
"거간꾼 없이 수천 단을 현찰로 사 갈 테니 도매 시세로 낮추어 주시오."
도매상은 주판알을 다시 굴렸다.
반나절 흥정 끝에 배병희는 섬으로 들어오던 장사꾼 가격의 절반에 계약을 맺었다.
이튿날 오후, 대나무를 가득 실은 목선이 천수만을 건너 안면도 포구로 들어왔다.
뱃전이 수면 가까이 가라앉을 만큼 짐이 실려 있었다.
선창가에서 기다리던 어민들이 환성을 질렀다.
배병희는 바짓단을 무릎 위까지 걷어붙이고 대나무 단을 어깨에 메어 날랐다.
부두에 대나무가 쌓이자 수첩을 펴 들고 어민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집집마다 맡은 갯골 면적에 맞춰 필요한 만큼 대나무를 나누어 주었다.
값을 치르던 어민들이 손을 멈췄다.
"계장님, 셈이 잘못된 것 아니오?"
"광천까지 다녀온 뱃삯이랑 기름값은 어디 가고 장터 원가만 적혀 있잖소."
배병희는 소매에 붙은 대나무 톱밥을 털며 말했다.
"원가 그대로 드릴 테니 어서들 가져가 김발이나 단단히 짜시오."
"아무리 그래도 계장님이 생돈을 보태 손해를 보면 어떡합니까."
"마을이 살아야 내 공장도 사는 법입니다. 날 저무니 어서 지고 가시오."
어민들은 대나무 단을 지게에 짊어졌다.
그날 저녁 장부를 덮는 배병희의 손바닥에는 대나무 살에 긁힌 생채기가 남아 있었다.
포구에 대나무를 다 풀고 나자 곧 가을걷이가 닥쳤다.
섬 들판에는 익은 벼를 벨 일손이 모자랐다.
젊은이들이 뭍으로 빠져나간 뒤 노인들과 아낙들이 낫질을 해도 하루에 몇 마지기를 베기 어려웠다.
때를 놓쳐 서리를 맞고 볍알을 떨구는 논도 많았다.
배병희는 낫질로 부르튼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다시 광천 장터로 나갔다.
농기구 상회 마당에 붉은색 보행형 수확기, '바인더'가 놓여 있었다.
논 한두 마지기 값에 맞먹는 기계였다.
배병희는 열다섯 살에 피 묻은 손으로 도리깨를 휘두르며 기계를 마련하겠다고 다짐한 일을 떠올렸다.
그는 고심 끝에 바인더를 사들여 배에 실었다.

안면도 들판에 바인더를 내려놓고 시동을 걸자 엔진 소리와 함께 앞쪽 쇠칼날이 맞물려 움직였다.
배병희가 두 손으로 조종관 손잡이를 잡고 논고랑을 밀고 나갔다.
기계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벼 밑동이 잘려 나갔다.
기계 안쪽 장치가 베어낸 벼를 한 묶음씩 추려 노끈으로 동여매고 논바닥 옆으로 내보냈다.
장정 여럿이 종일 매달려야 할 논 한 마지기를 한 시간 만에 베어냈다.
농민들이 논둑에 모여 구경했다.
배병희는 제 논 삼천 평을 다 베고 나서도 바인더의 시동을 끄지 않았다.
땀을 팔뚝으로 훔치고는 일손이 달리는 이웃들의 논으로 기계를 몰고 들어갔다.
찬 바람 부는 겨울 갯벌에는 푸른 대나무 김발이 늘어섰고, 가을 들판에는 바인더가 묶어 놓은 볏단이 반듯하게 줄을 지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어스름한 마당으로 돌아오면 장화 끝에는 개흙이 말라붙어 있었고 옷자락에서는 기계 기름내가 났다.
부엌에서 나온 아내는 말없이 남편의 흙 묻은 옷가지를 받아 걸고 밥상을 차렸다.
밥상머리에 마주 앉은 부부는 숟가락을 들었다.
국그릇을 내려놓던 아내의 시선이 대나무 가시에 긁히고 기름때가 스민 남편의 손등에 잠시 머물렀다.
밥상을 물린 배병희는 마루 끝에 서서 마당 너머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의 수확도 들판의 곳간도 넉넉했다.
배병희는 붉게 물들어 가는 천수만 북쪽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포구 너머로 저녁 바람이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