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을 가로지른 전봇대

50마력 조양 디젤 발동기의 진동이 정미소 흙바닥을 울렸다.
바닥 홈통 위에서 무쇠 플라이휠이 돌아갈 때마다 큰 소리가 났다.
함석지붕 아래 작업장은 매캐한 경유 매연과 시커먼 그을음이 내려앉아 한낮에도 어두웠다.
천장 들보를 가로지른 7미터 쇠 장축이 쉴 새 없이 돌고, 그 축에 걸린 수십 가닥의 소가죽 평벨트가 마찰음을 내며 돌아갔다.
장축 하나에 도정기와 석발기, 풍구와 승강기가 모조리 물려 돌아가는 재래식 구조였다.
쌀겨 먼지와 기름 냄새에 직원들은 숨쉬기가 버거웠다.
기계 소리 때문에 바로 옆 사람에게도 소리를 질러야 말이 통했다.
머리 위와 발치에는 회전축과 가죽 벨트가 돌아갔다.
빠르게 돌아가는 풀리와 벨트 어디에도 안전 덮개 하나 씌워져 있지 않았다.
작업장 통로는 비좁았고, 가죽 벨트들은 천장과 바닥 사이를 오갔다.
무거운 볏가마니를 지고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다 옷자락 끝이라도 벨트에 스치면, 사람이 축으로 말려 들어갈 수 있었다.
추수철 물량이 밀려들던 늦가을 오후였다.
호퍼로 쏟아져 들어간 벼 사이에 섞여 있던 작은 자갈돌 하나가 도정기 롤러 틈에 끼었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도정기 풀리가 덜컥 멎는 순간, 7미터 장축에 걸려 있던 가죽 벨트가 뒤틀리며 크게 요동쳤다.
마침 그 곁으로 볏가마니를 지고 지나가던 직원이 벨트의 바람에 놀라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팔을 뻗어 몸을 가누려는데, 작업복 소매 끝이 옆 풀리와 벨트 틈새로 빨려 들어갔다.
"악!"
비명과 함께 천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작업복 상의 소매 자락이 순식간에 뜯겨 나갔다.
뒤이어 팽팽하던 메인 벨트가 풀리에서 벗겨져 나가며, 천장의 7미터 장축 전체가 쇳소리를 내며 덜컥 멈춰 섰다.
뜯겨 나간 천 조각이 멈춰 선 풀리 축에 칭칭 감긴 채 매캐한 탄내를 풍겼다.
간발의 차로 팔이 말려 들어가는 것을 면한 직원은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드러난 팔뚝을 움켜쥐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곁에서 가마니를 나르던 직원들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발동기 감압 레버를 내려 시동을 완전히 끈 배병희가 단숨에 달려와 직원 곁에 무릎을 굽혔다.
배병희는 청년의 팔뚝을 받쳐 들고 등과 어깨를 쓸어내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팔목과 팔꿈치를 짚어보는 그의 손끝이 떨렸다.
맏아들이 풀리 틈에서 찢어진 작업복 소매를 빼내 들고 다가섰다.
"자칫하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배병희는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찢어진 소매와 천장의 7미터 쇠 장축을 번갈아 보았다.
배병희는 그길로 작업장 문을 닫고 디젤 발동기와 가죽 벨트를 걷어내기로 결정했다.
천장의 긴 장축을 없애고, 기계마다 개별 모터를 따로 달아 스위치 하나로 켜고 끄는 전기 체제로 정미소를 완전히 뜯어고쳐야 했다.
당시 독정리 들판은 바다를 막아 만든 간척지였다.
마을 농가에 들어와 있는 전기는 호롱불 대신 전등을 켜고 작은 가전제품이나 돌리는 단상 저압선뿐이었다.
수십 마력에 달하는 도정기와 석발기, 승강기를 동시에 돌릴 380볼트 삼상 동력선은 정미소 근처까지 들어와 있지도 않았다.
공장용 동력 전기를 끌어오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모터를 들여놓아도 무용지물이었다.
이튿날 아침, 배병희는 읍내 한전 출장소를 찾아가 독정리 정미소까지 삼상 동력선을 끌어달라고 요청했다.
담당 직원은 책상 위에 들판 지도를 넓게 펼쳐보더니 손가락으로 거리를 재보고는 단박에 고개를 내저었다.
"삼상 동력선이 지나가는 신작로 큰길에서 정미소까지가 2킬로미터가 넘어요."
"정미소 하나 돌리자고 그 먼 거리에 전봇대 수십 개를 심어줄 예산은 없습니다."
"기어이 끌어다 쓰시려면 직접 전봇대 심고 선로 공사비를 다 부담하셔야 합니다."
농촌 배전망은 용량이 달려 전압도 자주 흔들렸다.
저녁 무렵 마을에서 전기를 한꺼번에 쓰거나 큰 기계가 돌기 시작하면 전압이 뚝 떨어져, 비싼 돈 주고 들여놓은 모터 코일이 타버릴 수 있었다.
배병희는 홀로 안방 장롱 앞에 앉아 깊숙이 넣어둔 누런 서류봉투를 꺼냈다.
안면도를 떠나와 발이 부르트도록 소금기를 우려내며 일군 남양만 논의 등기권리증이었다.
정미소를 인수하느라 봉투의 두께가 얇아져 있었다.
배병희는 엄지손가락으로 문서에 찍힌 붉은 인장을 쓸어내렸다.
방문이 조용히 열리고, 사무실에서 공사비 견적을 뽑아보던 맏아들이 들어섰다.
아버지 무릎 위에 놓인 땅문서를 본 맏아들이 무거운 얼굴로 앞에 앉았다.
"아버지, 전봇대 수십 개에 삼상 전선, 모터값까지 합치면 논 몇 마지기 값입니다."
"내 논은 몇 마지기 줄어들어도 다시 일구면 그만이다. 하지만 내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 팔다리 하나 잃으면 그건 평생 못 되돌린다."
아내는 한숨을 쉬고 문갑 서랍에서 인주와 목도장 주머니를 꺼내 남편 앞에 놓았다.
이튿날 배병희는 남은 간척지 논 중 일부를 또다시 처분했다.
매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받은 목돈으로 그는 곧장 12미터짜리 콘크리트 전봇대 수십 개와 굵은 삼상 동력 전선 타래를 사들였다.

며칠 뒤, 육중한 전봇대를 가득 실은 대형 화물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독정리 들판으로 들어섰다.
콘크리트 기둥들이 신작로 어귀부터 농로 가를 따라 줄줄이 부려졌다.
신작로 큰길에서 정미소 마당까지는 2킬로미터가 넘는 질척한 논두렁길이었다.
지반이 무른 농로에는 무거운 장비가 들어올 수 없었다.
배병희는 맏아들과 정미소 직원들을 이끌고 직접 들판으로 나섰다.
"줄 맞춰서 말뚝 박아라! 바람에 안 넘어가려면 깊게 파야 한다!"
배병희가 가장 먼저 삽과 곡괭이를 쥐고 논두렁의 진흙을 파 내려갔다.
바가지로 흙물을 퍼내며 어른 키만큼 깊은 구덩이를 수십 개 팠다.
구덩이가 파이면 통나무로 삼발이 버팀목을 세우고 전봇대 허리에 굵은 밧줄을 걸었다.
"줄 바짝 당겨라! 중심 잡고 한꺼번에 세운다!"
배병희의 구령에 맞춰 맏아들이 밑동에 쐐기목을 대고, 직원들이 일제히 밧줄에 온몸의 체중을 실었다.
거친 밧줄에 쓸린 손바닥 껍질이 벗겨져 피가 배어 나왔지만 누구 하나 손을 놓지 않았다.
며칠 뒤, 들판을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수십 개의 전봇대가 섰다.
전신주 위로 올라간 전기 기술자들이 자기 애자를 달고 굵은 동력선 세 가닥을 팽팽하게 당겨 쳤다.
인입 공사를 마치자 정미소 벽면 배전반까지 마침내 380볼트 삼상 전기가 들어왔다.
하지만 전압이 불안정했다. 시험 가동을 걸자 전압계 바늘이 심하게 흔들렸다.
모터가 웅웅거리며 뜨거워졌고 매캐한 냄새를 풍겼다.
배병희는 맏아들과 함께 공구 상가를 이틀 내내 뒤졌다.
수소문 끝에 불안정한 전압을 잡아줄 대용량 위상변환기와 전압 조정 설비를 구해 트럭에 실어 왔다.
배전반 곁에 묵직한 설비를 단단히 앉히고 굵은 구리 전선을 물렸다.
다시 전원을 넣자 요동치던 전압계 바늘이 380볼트 눈금에 멈췄다.

전압이 안정적으로 잡히자 배병희는 곧바로 스패너와 해머를 들었다.
맏아들, 직원들과 함께 사다리에 올라 천장 들보를 가로지르던 7미터 쇠 장축을 끌어내렸다.
작업장 허공을 어지럽게 가로막고 있던 수십 가닥의 가죽 평벨트도 모조리 걷어냈다.
그 자리에는 도정기, 석발기, 풍구, 승강기 밑바닥마다 기계 마력에 꼭 맞는 삼상 모터를 한 대씩 따로 얹었다.
바닥 기초 볼트를 흔들림 없이 조이고, 모터와 기계 풀리를 잇는 짧은 벨트 바깥에는 튼튼한 철제 안전 덮개를 씌워 볼트로 단단히 봉했다.
기둥마다 철제 전선관을 반듯하게 두르고 기계 앞마다 개별 개폐기 스위치를 달았다.
직원들이 지나는 통로로 벨트가 드러나지 않았다.
모든 배선 작업이 끝난 늦은 밤, 창밖 들판은 어두웠다.
배병희는 벽면 배전반 앞으로 다가섰다.
절연 손잡이가 달린 주 차단기 레버를 쥐고 위로 밀어 올렸다.
"철컥!"
묵직한 금속음과 함께 천장에 새로 매단 형광등들이 두어 번 깜빡이더니, 이내 일제히 새하얀 빛을 쏟아냈다.
늘 매연과 그을음으로 어둑하던 정미소 구석구석이 환해졌다.
장축과 가죽 벨트가 사라진 작업장은 넓어 보였다.
배병희가 도정기 옆 스위치 버튼을 눌렀다.
"우우웅-"
경유 매연이 나지 않았고, 발동기 폭발음 대신 낮은 전기 모터 소리가 들렸다.
승강기와 석발기 스위치를 차례로 올리자 기계들이 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호퍼에 부어 넣은 벼가 막힘없이 기계를 타고 흘러가며, 배출구 아래로 백미가 쏴아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렸다.

직원들은 환해진 일터를 둘러보며 웃었다.
"세상에, 대낮보다 더 밝구먼!"
"소리도 조용하고, 이제야 발 뻗고 일하겠어!"
스위치 옆에서 모터 회전음을 살피던 맏아들도 아버지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병희는 말없이 전선 피복 찌꺼기와 시커먼 기름때가 엉겨 붙은 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콘크리트 전봇대를 세우고 억센 구리 전선을 꼬아 잇느라, 거친 손마디 곳곳이 긁히고 베여 붉은 딱지가 앉아 있었다.
논은 또 줄었지만, 배병희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 뒤로 정미소 마당이 볏가마니로 가득 찼다.
정미소에 딸린 낡은 판자 창고는 천여 가마만 들여놓아도 꽉 찼다.
창고에 들어가지 못한 수천 가마의 벼가 마당을 넘어 들판 논두렁까지 쌓였다.
배병희는 가마니 더미를 바라보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해 쪽에서 먹구름이 낮게 깔리고 습한 늦가을 바람이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