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비 속 볏가마

아침 안개가 걷히기 전부터 볏가마니를 가득 실은 경운기와 달구지가 비포장 신작로에 줄을 이었다.
장안면은 물론이고 우정면 일대에서까지 한 해 거둔 알곡을 싣고 찾아왔다.
경운기에 실려 온 가마니들이 마당 한복판에 부려졌다.
무쇠 대저울 추를 맞추는 소리와 장정들의 거친 숨소리가 해 질 녘까지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정미소에 딸린 낡은 판자벽 창고는 비좁았다.
천여 가마를 쌓아 올리자 판자벽이 불룩해졌고, 더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들어온 벼는 이미 삼천 가마를 넘었다.
마당은 물론 신작로와 맞닿은 진입로 입구까지 가마니가 들어차, 쌀을 실으러 온 화물 트럭이 차머리를 돌릴 길마저 막힐 지경이었다.
배병희는 마당 끝까지 쌓인 가마니를 둘러보았다.
당장 오늘 오후에 들어올 경운기 짐부터 부려놓을 땅이 없었다.
그는 그길로 정미소 담장 너머 이웃 농가를 찾아가 맞닿은 논 오백여 평을 빌렸다.
창고에 들이지 못한 수천 가마의 벼를 쌓아둘 야적장이 시급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바닥은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아 장화 뒤축이 푹푹 박혔다.
맨땅에 가마니를 내려놓으면 습기에 아래쪽 벼가 썩을 수 있었다.
배병희는 읍내 제재소와 철도 주변을 수소문해 두꺼운 폐침목과 굵은 각목을 트럭 가득 실어 왔다.
맏아들과 직원들이 질퍽한 논바닥을 고르고, 그 위에 침목을 촘촘히 괴었다.
"땅에서 올라오는 습을 막아야 벼가 안 뜬다. 나무틀 아귀가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괴어라."
배병희는 굵은 각목을 어깨에 메어 나르며 바닥틀의 수평을 맞췄다.
나무 받침대 위로 마른 짚 멍석을 서너 겹씩 깔아 습기를 막았다.
나무틀 위로 수천 가마의 벼가 한 단씩 올라갔다.
논 한복판에 어른 키의 두 배가 넘는 가마니 더미가 세 줄로 들어섰다.
배병희는 가마니 더미 꼭대기마다 두꺼운 비닐을 씌우고, 그 위로 국방색 군용 천막을 겹겹이 덮었다.
바람에 천막 자락이 들리지 않도록 호박돌과 헌 타이어를 얹어 눌렀다.
밤이면 들쥐가 침목 밑으로 기어들어 와 가마니 밑동을 갉아 구멍을 냈다.
천막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면 가마니 속에서 열이 나고 낟알이 썩었다.
도정한 쌀이 제때 팔리지 않아도 농민들이 맡긴 볏값은 약속한 날짜에 치러야 했다.
시월 내내 배병희는 서쪽 하늘의 구름을 살폈다.
밤에도 작업복과 고무장화를 벗지 못한 채, 쪽방 문고리에 손을 얹고 선잠을 자곤 했다.
시월 그믐께 깊은 밤, 서해 쪽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정미소의 낡은 함석지붕이 들썩이며 울었다.
쪽방에서 눈을 붙이고 있던 배병희가 눈을 떴다.
마당으로 나가자 검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축축한 물 내음이 났다.
번개가 치고 벼락이 들판에 떨어졌다.
굵은 빗방울이 양철 처마를 때리더니, 이내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장대비가 쏟아졌다.
"비가 심상치 않다. 야적장으로 가야 한다!"

배병희가 헛간 기둥에 걸어둔 손전등을 집어 들자, 맏아들이 작업복 상의를 입으며 달려 나왔다.
두 손에는 나일론 밧줄 사리와 빈 마대 다발이 들려 있었다.
"아버지, 밧줄하고 마대는 제가 챙겼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부자는 진흙 논두렁길을 내달렸다.
장화 안으로 빗물이 들어왔고, 빗줄기 속에서 손전등 불빛이 흔들렸다.
야적장에서는 돌풍에 군용 천막이 들썩이고 있었다.
꼭대기에 얹어두었던 헌 타이어와 호박돌들이 논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누름돌이 사라진 천막 귀퉁이가 부풀어 올라 펄럭였다.
벌어진 비닐 틈새로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삼천 가마 넘는 벼가 밤사이 물에 젖을 판이었다.
게다가 논바닥에는 벌써 누런 흙탕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바람에 날린 검불과 무너진 흙덩이가 배수 물꼬를 틀어막은 탓이었다.
발목을 넘은 물이 침목 받침대 턱밑까지 차올랐다.
배병희가 손전등 자루를 입에 물고 가마니 더미 앞으로 성큼 다가서자, 맏아들이 아버지를 가로막았다.
"아버지, 가마니가 비에 젖어 미끄럽습니다!"
"제가 위로 올라가겠습니다!"
배병희는 아들의 젖은 어깨를 한 손으로 잡았다.
"위에서 바람 안고 매듭 잡는 건 내 손이 익었다. 밑에서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제때 받쳐 올려줘야 천막이 안 뜯긴다. 네가 아래를 버텨라!"
배병희는 아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볏가마니 더미로 기어올랐다.
물을 머금은 짚 가마니는 미끄러웠다.
그는 볏짚 올을 움켜쥐며 한 단씩 몸을 끌어올렸다.
손톱 끝이 뒤집히고 짚 오라기에 살이 찢겼다.
꼭대기에 닿은 배병희는 들썩이는 천막 위에 엎드렸다.
몸이 들릴 듯한 바람이 불었다.
그는 온몸으로 천막을 눌렀다.
차가운 빗물이 눈과 코로 들이쳐 숨이 턱턱 막혔다.
"마대 올려라! 밧줄도 던져!"
아래에서 맏아들이 진흙을 가득 채워 묶은 마대를 어깨 위로 힘껏 밀어 올렸다.
뒤이어 나일론 밧줄 뭉치가 올라왔다.
배병희는 펄럭이는 천막 모서리마다 묵직한 모래주머니를 눌러 얹고, 비닐과 천막 자락을 두 손으로 팽팽하게 그러쥐었다.
가마니 귀퉁이와 밑동 침목 틈새로 밧줄을 걸어 그물처럼 가로세로 촘촘히 동여맸다.
젖은 나일론 밧줄을 당겨 매듭을 조일 때마다 손바닥 가죽이 벗겨지며 쓰라린 열기가 번졌다.
배병희는 피와 빗물로 미끄러워진 손을 작업복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마지막 매듭까지 단단하게 조였다.
군용 천막이 가마니 더미를 덮은 채 펄럭임을 멈췄다.
배병희는 젖은 가마니를 타고 논바닥으로 내려왔다.
그사이 야적장에 고인 흙탕물이 정강이 밑까지 불어나 침목 틈새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래쪽 가마니가 젖기 전에 물길을 터야 했다.
"물길을 큰 도랑 쪽으로 돌려야 한다. 삽 가져와라!"

배병희와 맏아들은 헛간에서 쇠삽 두 자루를 가져와 흙탕물 속으로 들어갔다.
"남이 봄부터 피땀 흘려 지은 농사다. 내 손에서 단 한 톨도 썩힐 수 없다."
배병희는 물이 차오른 야적장 가장자리에 쇠삽 날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발판을 힘껏 밟아 누르자, 자갈과 뻘흙이 엉켜 굳은 땅이 갈라졌다.
삽날이 돌멩이에 부딪힐 때마다 손목과 어깨가 울렸다.
진흙 덩어리는 무거웠고, 흙탕물이 눈과 입으로 튀었다.
맏아들은 아버지가 파 나가는 고랑 앞쪽으로 한 발 먼저 나서며 가장 딱딱하게 굳은 자갈 턱을 연거푸 내리찍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진흙을 퍼 던졌다.
부자는 야적장 둘레를 따라 도랑을 파 내려갔다.
비는 계속 두 사람의 등 위로 쏟아졌다.
숨이 차고 팔뚝이 떨렸지만 배병희는 삽자루를 놓지 않았다.
벼를 맡긴 이웃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 벼는 그 집들의 겨울 양식이자 자식들의 공납금이었다.
"조금만 더 파면 큰 배수로와 이어진다. 마지막 턱이다, 힘내라!"
맏아들도 삽날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쇠삽이 자갈 섞인 진뻘을 가르는 소리가 빗소리에 섞였다.
마침내 야적장 둘레를 빙 두른 깊은 물길이 큰 배수로 코앞까지 닿았다.
배병희가 남은 힘을 다해 두터운 마지막 흙벽을 쇠삽으로 내리찍어 허물어뜨렸다.
야적장에 갇혀 있던 흙탕물이 큰 배수로로 쏟아져 나갔다.
침목 턱밑까지 찼던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물이 빠지자 바닥 침목들이 드러났다.
짚 멍석 위의 맨 아래 가마니는 젖지 않았다.
그제야 배병희와 맏아들은 진흙에 박은 삽자루에 몸을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흙탕물과 빗물에 젖어 있었다.
밧줄에 쓸리고 삽자루에 짓눌린 손바닥에서는 벗겨진 살갗 사이로 붉은 핏물이 빗물과 섞여 흘러내렸다.
부자는 볏가마니 더미를 바라보았다.
새벽 네 시를 넘기자 지붕을 때리던 빗줄기가 차츰 가늘어졌다.
한참 뒤 먹구름이 서서히 갈라지며, 동쪽 들판 끝에서 희끄무레한 새벽빛이 번져 오기 시작했다.

비 갠 간척지 들판 위로 하얀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배병희는 진흙 묻은 쇠삽을 논둑에 깊숙이 꽂아두고 천천히 볏가마니 더미 앞으로 걸어갔다.
곱은 손가락으로 단단히 묶인 밧줄 매듭을 풀고, 천막과 비닐 자락을 살짝 들춰냈다.
그는 가마니와 가마니가 맞닿은 깊숙한 틈새로 손을 쑥 들이밀었다.
상처 난 손끝에 닿은 볏짚 가마니는 보송보송했다.
안쪽에서는 마른 벼 냄새와 온기가 느껴졌다.
삼천 가마가 넘는 이웃들의 곡식을 지켜냈다.
배병희는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안쪽은 물기 한 방울 안 스몄구나."
배병희가 맏아들의 젖은 등을 툭 쳤다.
맏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정미소 마당 쪽에서 마른 수건과 뜨거운 국물 대접을 쟁반에 받쳐 든 아내가 종종걸음으로 달려 나왔다.
밤새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아내는 진흙과 핏물로 얼룩진 부자의 손을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
부자는 아내가 건넨 뜨거운 국물을 마셨다.
구름이 걷힌 새벽 하늘 위로 맑은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밤새 새로 파낸 물길마다 햇빛이 반짝였고, 정미소는 다시 하루치 벼를 찧어낼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빈 사발을 내려놓은 배병희의 시선은 야적장 바닥과 정미소의 낡은 판자 창고를 번갈아 훑고 있었다.
언제까지 남의 논을 빌려 수천 가마의 곡식을 비바람 앞에 내놓을 수는 없었다.
"이번 가을걷이 끝나는 대로 이 야적장 논을 아예 사들여야겠다."
배병희가 논둑에 꽂힌 쇠삽을 뽑아 들며 말했다.
"비바람 안 타게 번듯한 창고를 크게 올리고, 큰 트럭하고 트랙터가 논두렁에 빠지지 않게 창고 앞까지 널찍한 길도 새로 닦자."
맏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