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인 3억

가을 수매철을 앞둔 독정 정미소는 이른 아침부터 바빴다.
380볼트 삼상 전기로 돌아가는 모터가 공장 바닥을 울렸고, 쌀겨 냄새가 들판까지 퍼졌다.
석발기와 도정기를 거친 백미가 포대마다 쏟아져 내렸다.
웃통을 걷어붙인 직원들이 갓 찧어 온기가 가시지 않은 쌀자루를 갈고리로 찍어 화물차 적재함에 빈틈없이 쌓아 올렸다.
무게에 눌려 판스프링이 내려앉은 대형 트럭들은 연신 경적을 울리며 서울과 인천의 양곡 시장으로 내달렸다.
공장 마당은 쉴 새 없이 돌아갔으나, 사무실 철제 금고 안에는 현찰 대신 석 달이나 넉 달 뒤에야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약속어음과 가계수표가 두툼하게 쌓여 갔다.
당시 수도권 양곡 도매 시장은 어음 결제가 흔한 관행이었다.
그중에서도 서울의 대형 곡물 상회는 독정 정미소 쌀을 도맡아 사 가던 최대 거래처였다.
처음 장사를 튼 뒤로 수년 동안 결제 기일을 단 하루도 어긴 적이 없었다.
상회 주인은 수매철마다 독정리까지 내려와 한 밥상에서 뜨끈한 국밥을 비우며 배병희와 형님, 아우 하던 사이였다.
얼마 전에도 상회 주인은 정미소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와 다급하게 추가 물량을 청했다.
올가을 대목만 넘기면 밀린 대금을 한꺼번에 현찰로 치르겠다며 호탕하게 웃던 목소리가 귀에 생생했다.
그 상회가 끊어준 약속어음과 가계수표는 고무줄에 묶인 채 3억 원에 이르렀다.
벼 수천 가마니를 사고도 남을 돈이자, 다가오는 정산일에 이웃 농민들에게 치러야 할 볏값이었다.
첫 어음 만기일이 돌아온 늦가을 아침, 읍내 은행에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서울의 대형 곡물 상회가 하룻밤 사이에 점포 문을 잠그고 자취를 감추었다는 소식이었다.
장부와 집기는 물론 창고에 남아 있던 곡식까지 모조리 빼돌린 뒤였다.
큰 도매상이 주저앉자 그곳과 어음으로 얽혀 있던 중간 상회들까지 연쇄 부도를 냈다.

금고 속에 차곡차곡 넣어두었던 약속어음과 가계수표들이 일제히 지급 거절 처리되었다.
앞면마다 붉은색 부도 도장이 찍힌 종이 뭉치가 사무실 책상 위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3억 원이 하룻밤 사이에 쓸모없는 휴지 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평소 배병희는 일터에서 아무리 큰일이 터져도 남에게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었다.
그런 배병희가 직원들이 볼세라 정미소 사무실 문을 안에서 걸어 잠갔다.
그는 책상머리의 검은 다이얼 전화기를 붙들었다.
"여보시오! 지난달에는 틀림없이 결제해 준다고 하지 않았소!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송수화기를 쥔 손이 떨렸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연락이 닿던 번호마저 이제는 결번을 알리는 메마른 기계음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한 채 굳어 선 배병희의 눈앞으로, 정미소 마당까지 찾아와 손을 맞잡으며 신용을 다짐하던 상회 주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배병희는 붉은 도장이 찍힌 어음과 수표 뭉치를 낡은 가죽 가방에 쓸어 담았다.
작업복 위에 점퍼만 걸친 채 곧장 흙먼지 날리는 신작로로 나가 첫차를 잡아탔다.
서울 영등포와 청량리, 인천 부평의 양곡 도매 골목을 사흘 동안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찾아가는 상회마다 녹슨 철제 셔터문만 바닥까지 굳게 내려져 있었다.
차가운 셔터 위에는 법원 집달관이 붙이고 간 압류 딱지만 찬 바람에 너덜거렸다.
골목 어귀마다 부도 어음을 들고 달려온 지방 정미소 주인들과 화물차 기사들이 뒤엉켜 서로 멱살을 잡고 있었다.
닫힌 셔터를 발로 걷어차는 이들의 고함과 악에 받친 욕설만이 차가운 시멘트 골목을 맴돌았다.
배병희는 가죽 가방을 겨드랑이에 낀 채 달아난 상인들의 본적지와 친척 집 주소까지 수소문해 밤늦도록 문을 두드렸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골목을 헤맸으나, 3억 원을 돌려받을 길은 찾지 못했다.
사흘 만에 정미소로 돌아오자 또 다른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병희가 서울 골목을 헤매던 어느 날 밤, 정미소 뒤편 곡식 창고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들은 새벽에 창고 뒤편 시멘트 블록 벽을 정과 쇠망치로 깨부수었다.
어른 몸통이 드나들 만큼 뚫린 구멍으로 잠입해, 출하를 앞두고 쌓아 두었던 백미 백여 가마를 트럭에 통째로 싣고 달아났다.
창고 안으로 들어선 배병희의 발밑에서 깨진 벽돌 부스러기와 쌀알들이 서걱거리며 부서졌다.
갈고리에 찢긴 가마니에서 쏟아져 나온 하얀 쌀들이 도둑들의 흙발자국에 짓밟혀 있었다.
벽에 뚫린 구멍으로 찬 바람이 들어왔다.
배병희는 무너진 벽체 앞에 멈춰 섰다.
정 자국이 선명하게 파인 깨진 단면을 거친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거칠게 갈라진 손끝에 차가운 시멘트 가루와 쌀가루가 하얗게 엉겨 붙었다.
그날 오후에는 서울로 쌀을 싣고 올라간 납품 트럭마저 대낮에 통째로 도둑맞았다는 연락이 날아들었다.
운전기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쌀을 가득 실은 화물차를 그대로 몰고 사라진 뒤였다.
관할 경찰서에 달려가 신고를 넣었지만, 이미 번호판을 바꿔 달고 타지로 빠져나갔을 테니 찾기 어렵다는 말만 돌아왔다.
나흘 만에 3억 원의 부도와 쌀 도난, 납품 트럭 도난이 잇따랐다.

맏아들이 정미소 사무실로 들어섰다.
아버지가 서울을 다니는 동안 아들은 부서진 창고 벽을 판자로 막고 경찰서와 은행을 오갔다.
"아버지, 이제 현찰이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배병희는 대답 없이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소문은 장안면 일대로 퍼졌다.
"독정 정미소가 서울 도매상한테 물려서 3억을 떼였다더라."
"어음이 부도나서 3억을 날렸대. 밤사이에 창고 쌀까지 털렸다던데."
"그럼 우리 볏값은 어쩌고?"
추수를 마치고 벼를 맡겨둔 농민들이 하나둘 정미소 마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진흙이 말라붙은 고무장화를 신고 낡은 털모자를 눌러쓴 이웃 농부들이었다.
농민들은 시린 손을 점퍼 주머니 깊숙이 찌른 채 마당을 서성였다.
누구 하나 선뜻 사무실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농민들은 볏값으로 자식들 대학 등록금과 부모의 약값을 대고 겨울을 나야 했다.
배병희는 유리창 너머의 마당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추위에 떨고 있는 농민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를 믿고 벼를 맡긴 이웃들이었다.
배병희의 시선이 책상 한구석에 놓인 두툼한 수매 장부로 옮겨 갔다.
농민들의 이름 옆에 적힌 가마 수와 정산 날짜가 붉은 글씨로 또렷했다.
금고는 비었고, 치러야 할 볏값은 남아 있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배병희가 해진 작업복 옷깃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맏아들이 놀라 불렀으나 배병희는 말없이 사무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성큼 걸어 나갔다.
농민들이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