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 속 땅문서 ​

찬바람 부는 마당을 지나 안채로 향하는 배병희
1990년대 중반, 독정 정미소

사무실 문을 닫고 마당으로 나서자 늦가을 찬 바람이 불었다.

마당에 마른 흙먼지와 볏짚 부스러기가 날렸다.

한 해 볏값을 떼일까 봐 밤새 마당을 서성인 농민들의 군화 자국과 고무장화 자국이 시멘트와 흙바닥 위에 찍혀 있었다.

배병희는 바람에 펄럭이는 작업복 옷깃을 여미며 마당을 가로질러 안채로 향했다.

뒤편 창고에 정과 망치로 뚫린 구멍이 보였다.

툇마루에 신발을 벗어 놓고 안방 문을 열었다.

문갑 곁에 앉아 있던 아내가 고개를 들었다.

눈꺼풀이 부어 있었다.

아내는 남편에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수채화로 그린 볏값을 마련하려고 장롱에서 땅문서 봉투를 꺼내는 배병희

배병희는 방구석에 놓인 낡은 목제 장롱 앞으로 다가갔다.

놋쇠 손잡이를 당겨 장롱 문을 열자 묵은 나프탈렌 냄새와 마른 목화솜 냄새가 훅 번졌다.

그는 차곡차곡 개어 둔 무명 이불 밑바닥 깊숙이 거친 손을 밀어 넣었다.

손끝에 바스락거리는 두툼한 종이 뭉치가 닿았다.

모서리가 해지고 손때가 묻은 누런 서류봉투였다.

봉투를 꺼내자 문갑 옆에 선 아내가 치마폭을 쥐었다.

배병희는 숨을 고르며 봉투 속에서 서류 묶음을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빳빳한 한지 위에 정갈한 먹글씨로 지번이 적히고 붉은 등기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남양만 간척 농지 땅문서였다.

처음 독정리에 발을 디뎠을 때 간척지 땅은 소금기가 남아 있었다.

바닷물이 덜 빠져 봄바람만 불면 허옇게 소금꽃이 피어올랐고, 애써 심어 놓은 어린 모는 짠물에 뿌리가 녹아 누렇게 타죽기 일쑤였다.

배병희는 밤마다 손전등을 들고 들판으로 나가 담수호 물을 채우고 빼는 물갈이를 수천 번 되풀이했다.

장화 속 발가락이 짓무르도록 소금기를 씻어내어, 남양만에서 손꼽히는 옥토로 만든 땅이었다.

하지만 세월을 거치며 두툼하던 서류 뭉치는 이미 절반 이상 줄어들어 있었다.

1983년 시월 새마을정미소를 떠안을 때 처음으로 논을 떼어 팔았다.

고압 전봇대를 세워 전기를 끌어올 때도 논을 팔아 비용을 댔다.

비 맞을 벼를 거두어들일 창고를 짓고 트럭이 다닐 진입로를 닦을 때도 그랬다.

배병희는 엄지손가락으로 문서의 붉은 인장을 쓸어내렸다.

도리깨와 쇠메를 쥐던 손바닥에 종이가 서걱거렸다.


땅문서 봉투를 든 배병희와 문간의 맏아들, 장롱 곁에서 바라보는 아내

그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며 맏아들이 숨을 몰아쉬고 들어섰다.

밤새 경찰서와 거래처를 다니고 창고를 지키던 아들이었다.

아버지 손에 들린 등기권리증을 보고 멈춰 섰다.

"아버지, 그건……"

스무 살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십 년 넘게 정미소에서 함께 일해 온 아들이었다.

"정미소 세우고 창고 지을 때마다 떼어 팔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논이지 않습니까."

배병희는 대답 대신 손에 든 땅문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문서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그는 서류를 추슬러 다시 누런 봉투 속으로 반듯하게 밀어 넣었다.

"네가 내 속을 아껴서 하는 말인 줄은 안다."

배병희는 봉투를 쥔 채 맏아들을 바라보았다.

"마당에 선 저분들을 봐라. 일 년 내내 진흙 파서 거둔 벼를 우리 이름만 믿고 맡긴 이웃들이다. 우리가 사정 봐달라며 시간을 끈다고 저 집들 겨울 살림이 기다려주겠느냐."

맏아들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두 주먹을 쥐었다.

"땅이야 다시 일구면 그만이지만, 사람들의 믿음을 잃으면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배병희는 누런 서류봉투를 작업복 안주머니 깊숙이 갈무리하고 돌아섰다.

문간에 서 있던 아내가 말없이 다가와 문갑 서랍에서 대추나무 목도장 주머니를 꺼내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고는 남편의 작업복 옷깃을 여며주었다.


농민들 앞에서 누런 봉투를 꺼내 약속하는 배병희

배병희가 안채를 나서자 수십 명의 농민들이 수군거림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배병희는 농민들이 모여 선 마당 한복판으로 걸어갔다.

"어르신들, 또 형님 아우님들, 아침 일찍 찬 바람에 걸음하시게 해 죄송합니다."

배병희가 먼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뒤 똑바로 고개를 들었다.

"소문으로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서울 상회가 부도난 것도 맞고, 어젯밤 창고 쌀 백여 가마를 털린 것도 사실입니다. 서울로 간 납품 트럭까지 도둑맞았습니다."

마당 곳곳에서 탄식이 나왔다.

배병희는 품속에서 누런 서류봉투를 꺼내 머리 위로 들어 보였다.

"하지만 정미소 문 안 닫습니다. 제가 가진 간척지 땅문서입니다. 이 논을 팔겠습니다."

소란스럽던 마당이 일순간 고요해졌다.

"여러분이 맡기신 볏값은 단 한 푼도 축내지 않고 정산일에 현찰로 다 치러 드리겠습니다."

"배 사장, 논을…… 참말로 내놓는단 말이오?"

안면도 시절부터 함께 건너온 마을 어르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예, 어르신. 정산 날짜는 꼭 지키겠습니다. 마음 놓고 돌아가 기다려 주십시오."

"배 사장이 평생 빈말하는 사람 아닌 건 우리가 다 알지…… 그래, 정산 날까지 믿고 기다려 봅시다."

어르신 몇 분이 앞으로 나와 그의 손을 맞잡았다.

농민들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나둘 마당을 빠져나갔다.

수천 가마니의 볏값을 마련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읍내 복덕방 미닫이문을 열자 연탄 냄새가 났다.

난로 위 양은 주전자에서 김이 오르고 있었다.

난롯가에서 손을 녹이던 복덕방 주인이 반갑게 고개를 들었다.

"어이구, 독정리 배 사장님 아니시오."

"이 추운 날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배병희는 난로 곁으로 다가앉지도 않은 채, 안주머니에서 누런 봉투를 꺼내 유리 깔린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독정리 간척지 내 논이오. 당장 계약하고 현찰로 잔금까지 치를 사람을 찾아주시오."

복덕방 주인이 돋보기를 고쳐 쓰며 봉투 속 등기권리증을 꺼내 들었다.

주인이 지번을 확인했다.

소금기를 빼내어 남양만에서도 수확량이 좋기로 꼽히는 상등전(上等田)이었다.

"배 사장, 이 좋은 논을 당장 현찰로 내놓겠다는 거요?"

"추수 끝난 겨울철에 그 큰 현금을 당장 낼 사람이 몇이나 되겠소."

"급매로 소문나면 제값의 반 토막도 못 건집니다!"

"곧 볏값 정산일이오. 반값이라도 좋으니, 그날 안에 현찰로 치를 사람을 불러주시오."

복덕방 주인은 검은 다이얼 전화기를 끌어당겨 읍내 재력가들과 간척지 땅에 관심을 두던 이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복덕방 안에 다이얼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배병희는 난로 옆 나무 의자에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제 무릎 위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 밑에 까맣게 밴 쇳가루와 흙때가 유난히 선명했다.


논을 팔아 농민들의 볏값을 마련하려고 매매 서류에 도장을 찍는 배병희

유리 탁자 위에 매매 계약서 용지가 펼쳐졌다.

매수인은 당장 현금을 끌어모아 주는 조건으로 시세의 절반 남짓한 헐값을 부르며 잔금 날짜를 흥정했다.

복덕방 주인이 차마 붓펜을 놀리지 못하고 배병희의 눈치를 살폈다.

"배 사장님, 정말 이 금액으로 적습니다?"

"적으시오."

계약서에 매매 금액이 적혔다.

계약서 작성이 끝나자 배병희는 주머니에서 아내가 쥐여준 대추나무 도장을 꺼냈다.

도장 끝에 붉은 인주를 꾹 묻혀 계약서 매도인란 위로 가져갔다.

종이 위 한 치 앞에서 그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장화 속 발이 짓무르던 남양만의 밤물과, 스무 살 아들의 굽은 등이 떠올랐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계약서 종이 위로 도장을 수직으로 내리눌렀다.

종이 위에 선명한 붉은 인영이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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