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드는 벼, 커지는 정미소 ​

물벼를 싣고 길게 늘어선 트럭
1990년대 후반, 독정 정미소

독정리 들판에 소문이 돌았다.

"독정리로 가야 볏값을 떼이지 않는다."

"배병희는 제 논을 반값에 파는 한이 있어도 농사꾼 돈은 단 하루도 안 미룬다더라."

3억 원 부도를 맞고 간척지 논을 팔아 수매 대금을 현찰로 치러낸 뒤였다.

입소문은 독정리와 장안면, 우정면을 넘어 향남 일대 농가들까지 퍼졌다.

가을 추수가 시작되자 정미소 앞 비포장 신작로는 새벽안개가 걷히기도 전부터 북적였다.

벼를 실은 경운기와 화물 트럭이 길게 늘어섰다.

가마니와 포대는 마당과 창고 처마 밑을 채우고 바깥 논둑길까지 쌓였다.

들판의 추수 풍경도 달라졌다.

낫으로 벼를 베어 논바닥에 며칠씩 널어 말리던 시절이 지나고, 논마다 벼를 베자마자 그 자리에서 탈곡까지 끝내는 콤바인이 빠르게 들어선 참이었다.

트럭 적재함에서 내려온 마대 자루들은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콤바인이 갓 훑어 낸, 채 마르지 않은 '물벼'였다.

배병희가 자루 주둥이를 풀고 손을 넣었다.

손바닥에 습기가 배고 열기와 시큼한 풋내가 올라왔다.

수분율이 25퍼센트를 넘는 생벼였다.

물벼는 거두어들인 당일에 열기를 빼고 말리지 않으면 하룻밤 사이에 자루 속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이틀만 그대로 두어도 속이 누렇게 뜨고 곰팡이가 슬 수 있었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햇볕에 고무래질을 하던 옛 방식으로는, 날마다 수백 톤씩 들어오는 물벼를 감당할 수 없었다.


물벼 자루를 싣고 밀려든 트럭과 수매 물량을 살피는 정미소 일꾼들

이른 아침부터 물벼를 실은 트럭들이 진입로까지 엉켜 경적을 울렸다.

농민들은 차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배 사장, 우리 차부터 좀 부려 주시오."

"새벽에 베어 담은 거라 자루 속이 벌써 뜨겁소."

"해 넘기기 전에 말려야 하니 어서 좀 받아주시오!"

인근의 다른 정미소들은 감당 못 할 물벼가 밀려들자 일찌감치 철문을 걸어 잠근 뒤였다.

햇볕에 바짝 말려 오지 않으면 아예 받지 않겠다고 내치거나, 건조 비용을 핑계로 수매가를 헐값으로 후려쳤다.

그래서 농민들이 독정리로 몰려들었다.

맏아들이 마당을 오가며 마대 자루마다 수분측정기를 찔러 넣었다.

"아버지, 지금 들어온 벼들은 수분율이 26퍼센트가 넘습니다!"

"기존 평면 건조기는 벌써 다 찼고, 마당에도 더 쌓아둘 자리가 없습니다."

"이대로 밤을 넘기면 내일 아침엔 아래쪽부터 벼가 뜨기 시작할 겁니다!"

맏아들의 작업복 등판이 쌀겨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직원들도 배병희 곁으로 달려왔다.

"사장님, 오늘은 그만 문을 닫으셔야겠습니다."

"밤사이 비라도 오면 수천만 원어치 벼를 물어내야 합니다!"

배병희는 트럭 운전석 옆에 선 농민들을 바라보았다.

농민들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를 믿고 십 리, 이십 리 길을 달려온 이웃들이었다.


손바닥에 담긴 나락의 상태를 함께 살피는 배병희와 맏아들

배병희는 마대 자루 속 물벼 한 움큼을 쥐었다.

손바닥에 열기가 전해졌다.

"농사지은 사람더러 벼를 도로 싣고 가라고 할 수는 없다."

배병희가 손안의 벼를 자루에 도로 쏟아 넣으며 말했다.

"우리를 믿고 찾아온 사람들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가 받아서 살려내야 한다."

배병희는 마당과 창고 바닥마다 방수포를 넓게 펴 깔게 했다.

자루 주둥이를 풀어 벼를 얇게 쏟아붓고, 정미소 안팎의 송풍기와 선풍기를 모조리 끌고 나와 틀었다.

자루 속에 갇혀 열이 차고 벼가 뜨는 것만이라도 막아야 했다.

그날 밤 독정 정미소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평면 건조기는 굉음을 내며 밤새 쉬지 않고 돌았고, 배병희와 맏아들, 직원들은 삽과 고무래를 쥐고 마당의 벼를 쉼 없이 뒤집었다.

허리 한번 펴지 못한 채 볏먼지와 땀을 뒤집어쓰며 밤을 꼬박 새우고서야 겨우 벼의 열기를 식혀낼 수 있었다.

배병희는 뜬눈으로 밤을 새운 아들과 직원들의 붉어진 눈을 둘러보았다.

마당에 벼를 펴 널고 작은 평면 건조기에 매달리는 옛 방식으로는 밀려드는 콤바인 물벼를 감당할 수 없었다.

"사람 몸으로 막아내는 건 오늘 밤이 마지막이다."

배병희가 거친 숨을 고르며 말했다.

"들판에 콤바인이 들어왔으니 정미소도 설비를 바꿔야지. 트럭째 쏟아부어도 밤낮없이 말려내는 대형 건조기를 들인다."

"아버지, 대형 건조기까지 세우려면 큰 빚을 내야 합니다."

배병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배병희는 그길로 공장을 담보로 자금을 끌어모았다.

그는 정미소 옆 부지를 닦고 시간당 수십 톤의 물벼를 순환시키며 말리는 대형 연속식 곡물 건조기를 들여놓았다.


실제 독정 RPC의 사일로·이송라인 구조

트럭 적재함을 들어 올려 지하 호퍼에 물벼를 쏟아부으면 승강기가 건조탑 꼭대기로 벼를 퍼 올려 열풍으로 말리는 설비였다.

그 옆에는 말린 벼를 서늘하게 보관할 원통형 대형 저온 사일로와 저장 창고도 세웠다.

설비 공사가 시작되자 배병희와 맏아들은 보름 넘게 작업복을 벗지 못했다.

마당 한쪽에 철골 건조탑이 올라갔다.

하지만 건조기와 도정 라인이 한꺼번에 돌기 시작하자 문제가 생겼다.

수십 톤의 벼가 승강기와 풍구를 거칠 때마다 왕겨 가루와 먼지가 공장 안을 뒤덮었다.

분진 때문에 몇 발짝 앞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마스크를 두 겹씩 쓴 직원들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기침을 했다.

작업장을 돌아보던 배병희는 먼지 속에서 기침하며 자루를 나르는 직원들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디젤 발동기 가죽 벨트에 직원의 옷소매가 뜯겨 나갔던 날이 떠올랐다.

"기계 몇 대 더 돌리자고 일하는 사람들 숨통을 막아선 안 된다. 먼지부터 잡아라."

배병희는 추가 비용을 아끼지 않고 곧장 대형 집진 설비를 발주했다.

작업장 천장 들보를 따라 아연도금 흡입 배관을 두르고, 건물 바깥에 송풍 모터와 대형 여과 필터 탑을 세웠다.

집진기 개폐기 스위치를 올리자 바람 소리와 함께 벼에서 나온 먼지가 흡입구로 빨려 들어갔다.

분진이 걷히자 직원들이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훔치며 숨을 돌렸다.

맏아들은 물벼가 들어올 때마다 수분율을 기록하고 건조탑의 열풍 온도를 일 도 단위로 조절했다.

맏아들은 밤을 새워 제현기 고무 롤러의 간격을 조절했고, 수분율 15퍼센트에 맞춰 말린 벼만 도정기에 올렸다.


새벽까지 일한 맏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는 아버지

동트기 전, 배병희는 도정기 배출구에서 쌀을 받아 살피는 맏아들의 등을 바라보았다.

배병희는 다가가 쌀겨가 내려앉은 아들의 어깨를 한 번 툭 쳤다.

대형 건조탑이 밤낮으로 돌아갔다.

물벼는 건조탑을 거쳐 마른 알곡이 되어 저온 사일로로 들어갔다.

사일로에서 나온 벼는 도정 라인을 거쳐 백미로 포대에 담겼다.

대형 화물차들이 독정 정미소 상표가 찍힌 쌀 포대를 가득 싣고 서울과 인천의 양곡 도매 시장으로 쉼 없이 빠져나갔다.

"독정리 배 사장네 쌀은 밥을 해 놓으면 찰기가 다르고 식어도 윤기가 그대로 살아 있다."

입소문을 타면서 쌀이 잘 팔렸다.

마당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농민들도 웃었다.

"이제 독정리 마당에만 들어오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벼 썩힐 걱정이 없구먼."

"배 사장 부자가 저 큰 건조기로 알아서 다 말려주고 제날짜에 현찰로 꽂아주니, 우린 농사만 실하게 지으면 되겠네."

자정이 넘어서야 건조탑 버너가 멈췄다.

직원들을 모두 퇴근시키고 공장 형광등을 하나씩 끈 배병희는, 낡은 작업복 외투를 걸치고 정미소 문을 나섰다.

손마디에는 기계 기름때와 쇳가루가 박혀 있었고, 보름 가까이 선잠을 잔 눈두덩은 붉게 짓물러 있었다.

그래도 안채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모처럼 가벼웠다.

3억 원 부도를 넘기고 정미소도 자리를 잡아갔다.

이제 한숨 돌릴 만했다.

그러나 안채 마당은 조용했다.

아무리 밤이 깊어도 남편과 아들이 들어올 때까지 장작불 온기와 구수한 시래깃국 냄새가 가시지 않던 부엌이었다.

그날 밤은 부엌에 불이 꺼져 있고 아궁이도 식어 있었다.

그는 툇마루에서 급히 신발을 벗고 안방 미닫이문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마른기침 소리가 났다.

아랫목 이불 아래 웅크린 아내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팍이 들썩였다.

대식구와 직원들의 뒷바라지를 해온 아내의 어깨가 눈에 띄게 여위어 있었다.

배병희는 문지방을 짚은 채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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