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밥상 (에필로그) ​

남양황라 들녘과 독정 RPC의 저녁
현재, 화성 남양황라 들녘과 독정 RPC

늦가을 해 질 무렵, 화성 남양황라 들녘이 저무는 햇살에 붉게 물들었다.

서해의 갯바람이 불어오자 누렇게 여문 벼 이삭들이 누웠다 일어섰다.

팔순을 넘긴 배병희는 독정 미곡종합처리장(RPC) 마당에 서 있었다.

등 뒤에는 아파트 높이만 한 곡물 저장 사일로와 대형 저온 창고들이 줄지어 있었다.

불이 켜진 공장 창문 너머로 색채선별기와 정밀 도정 라인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떠난 뒤에는 칠 남매가 그의 곁을 지켰다.


소박한 밥상 앞에서 큰 잔치를 사양하는 배병희

살림이 넉넉히 자리를 잡아가자, 자식들은 아버지의 환갑과 칠순이 돌아올 때마다 큰 잔치를 열어드리고 싶어 했다.

"아버지, 이번 생신에는 동네 어르신들 다 모시고 잔칫상 한번 크게 차리시지요."

맏아들이 남매들의 뜻을 모아 청하자 배병희는 손사래를 치며 역정을 냈다.

"산 사람 입에 밥 들어가는 걸로 족하지, 번잡스럽게 무슨 놈의 잔치냐."

자식들과 직원들에게는 고봉밥에 고깃국을 차려주고, 딱한 사정이 있는 이웃에게는 곳간을 열어주던 아버지였다.

명절에 놀러 온 자식들의 친구들이 돌아갈 때면 주머니에 차비 봉투를 넣어주었다.

봄밤 헛간에서 몰래 종자 볍씨를 퍼 담던 이웃을 보고도 기척을 내지 않았다.

동네 경운기가 도랑에 빠지면 먼저 진흙탕으로 뛰어들었다.

자신을 위해 잔치를 여는 일만은 꺼렸다.


늦은 밤 온돌방 소반에서 수육을 먹는 자식의 뒷모습과 이를 지켜보는 아버지

가을 추수와 수매로 눈코 뜰 새 없던 어느 늦은 밤이었다.

수매 장부와 물량을 정리하던 자식이 자정이 넘어서야 안채 방문을 열었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방에 아버지가 불도 켜지 않고 앉아 계셨다.

아버지 앞에는 소반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저녁도 들지 않고 자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식이 다가앉자 배병희는 아랫목의 솜이불 자락을 들췄다.

이불 속에서 접시를 꺼내 대접을 걷자 돼지고기 수육에서 김이 올랐다.

옆에는 김치 한 보시기와 참기름을 친 새우젓 종지가 놓여 있었다.

"아버지…… 여태 저녁도 안 드시고 저 기다리신 겁니까?"

배병희는 고개를 숙여 젓가락 한 벌을 집었다.

젓가락 끝을 맞추어 자식의 손에 쥐여주었다.

"일하느라 속 비었을 텐데, 식기 전에 어서 먹어라."

배병희는 자식이 수육 한 점을 새우젓에 찍어 입에 넣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김치 보시기를 자식 쪽으로 밀어주었다.

각자의 삶을 꾸려간 두 딸도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기억했다.

안면도 국민학교 시절, 다른 아이들이 무명 책보를 허리에 묶고 다닐 때 큰딸은 '충무공신'이라 적힌 책가방을 멨다.

아버지는 큰딸이 중학교에 갈 때까지 마당 평상에 앉혀놓고 손수 가위로 머리를 다듬어 주곤 했다.

바쁜 와중에도 입학식과 졸업식에는 찾아왔다.

큰딸은 "성실하게 살고 이웃을 만나면 인사를 잘해야 한다"던 아버지의 당부를 평생 기억했다.

작은딸은 어릴 적 일터에 나간 부모를 기다리며 외로워하곤 했다.

외출할 때 매무새를 중히 여기던 아버지는 짧은 머리를 딸에게 맡기곤 했다.


작은딸의 시아버지 빈소에 가장 먼저 달려와 딸 곁을 묵묵히 지키는 배병희

세월이 흘러 작은딸이 시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 아버지는 하던 일을 제쳐 두고 가장 먼저 달려왔다.

작은딸은 빈소 한쪽을 묵묵히 지켜주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논두렁에서 손바닥 위에 얹은 벼 이삭

동이 트자 남양황라 들녘에 가을 햇살이 비쳤다.

아침 갯바람에 벼 이삭들이 부대끼며 사각거렸다.

독정 RPC 마당에서는 다섯 아들이 지게차와 대형 화물트럭의 시동을 걸고 하루 일을 시작했다.

들길로 나선 배병희는 논두렁에 멈춰 서서 허리를 굽혔다.

고개 숙인 벼 이삭 하나를 끌어당겨 갈라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봄부터 가을까지 바닷바람과 폭우, 뙤약볕을 견딘 낟알들이 손바닥을 채웠다.

안면도 개펄에서 농사를 짓던 때로부터 육십여 년이 흘렀다.

배병희는 작업복 옷깃을 여미며 나직이 말했다.

"사람을 오늘만 보고 내일은 안 볼 것처럼 대하지 마라."

가을바람이 하얀 귀밑머리를 스치고 들판을 지나갔다.

삼백만 평 남양만 들녘에 다 여문 벼 이삭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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