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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논을 파는 한이 있어도
오디오북
21화
들판을 가로지른 전봇대
1980년대, 독정 정미소
50마력 조양 디젤 발동기의 진동이 정미소 흙바닥을 울렸다.
바닥 홈통 위에서 무쇠 플라이휠이 돌아갈 때마다 큰 소리가 났다.
함석지붕 아래 작업장은 매캐한 경유 매연과 시커먼 그을음이 내려앉아 한낮에도 어두웠다.
천장 들보를 가로지른 긴 쇠 장축이 쉴 새 없이 돌고, 그 축에 걸린 여러 가닥의 가죽 평벨트가 마찰음을 내며 돌아갔다.
장축 하나에 도정기와 석발기, 풍구와 승강기가 모두 물려 돌아가는 재래식 구조였다.
쌀겨 먼지와 기름 냄새에 직원들은 숨쉬기가 버거웠다.
기계 소리 때문에 바로 옆 사람에게도 소리를 질러야 말이 통했다.
머리 위와 발치에는 회전축과 가죽 벨트가 돌아갔다.
빠르게 돌아가는 풀리와 벨트에는 안전 덮개가 씌워져 있지 않았다.
작업장 통로는 비좁았고, 가죽 벨트들은 천장과 바닥 사이를 오갔다.
무거운 볏가마니를 지고 그 사이를 지나다 옷자락 끝이라도 벨트에 스치면, 사람이 축으로 말려 들어갈 수 있었다.
추수철 물량이 밀려들던 늦가을 오후였다.
호퍼로 쏟아져 들어간 벼 사이에 섞여 있던 작은 자갈돌 하나가 도정기 롤러 틈에 끼었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도정기 풀리가 덜컥 멎는 순간, 장축에 걸려 있던 가죽 벨트가 뒤틀리며 크게 흔들렸다.
마침 그 곁으로 볏가마니를 지고 지나가던 직원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팔을 뻗어 몸을 가누려는데, 작업복 소매 끝이 옆 풀리와 벨트 틈새로 빨려 들어갔다.
"악!"
비명과 함께 천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작업복 상의 소매 자락이 순식간에 뜯겨 나갔다.
뒤이어 메인 벨트가 풀리에서 벗겨져 나가며, 천장의 장축이 쇳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뜯겨 나간 천 조각이 멈춰 선 풀리 축에 감긴 채 탄내를 풍겼다.
간발의 차로 팔이 말려 들어가는 것을 면한 직원은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드러난 팔뚝을 움켜쥐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곁에서 가마니를 나르던 직원들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발동기 감압 레버를 내려 시동을 끈 배병희가 달려와 직원 곁에 무릎을 굽혔다.
배병희는 직원의 팔뚝을 살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팔목과 팔꿈치를 짚어보는 그의 손끝이 떨렸다.
맏아들이 풀리 틈에서 찢어진 작업복 소매를 빼내 들고 다가섰다.
"자칫하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배병희는 대답 대신 입술을 다물었다.
찢어진 소매와 천장의 쇠 장축을 번갈아 보았다.
날마다 물량은 늘어나는데 50마력 발동기 하나로는 힘에 부치는 데다, 사람까지 다칠 수 있는 구조였다.
배병희는 디젤 발동기와 가죽 벨트를 걷어내고, 기계마다 모터를 달아 돌리는 전기 시설로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독정리 정미소까지는 도정기와 석발기, 승강기 모터를 돌릴 만한 동력용 전기가 들어와 있지 않았다.
큰길에서 정미소까지 전기를 끌어오지 못하면 모터를 들여놓아도 쓸 수가 없었다.
이튿날 배병희는 한전을 찾아가 독정리 정미소까지 동력용 전기를 끌어달라고 신청했다.
담당 직원은 지도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동력선이 지나가는 큰길에서 정미소까지 거리가 꽤 됩니다."
"정미소까지 전봇대를 세워 선로를 끌어오려면 인입 공사비를 부담하셔야 합니다."
배병희는 집으로 돌아와 안방 장롱 앞에 앉아 깊숙이 넣어둔 누런 서류봉투를 꺼냈다.
안면도를 떠나와 소금기를 우려내며 일군 남양만 논의 등기권리증이었다.
정미소를 인수하느라 봉투의 두께가 이미 얇아져 있었다.
배병희는 엄지손가락으로 문서에 찍힌 붉은 인장을 쓸어내렸다.
방문이 조용히 열리고, 공사 비용을 알아보던 맏아들이 들어섰다.
아버지 무릎 위에 놓인 땅문서를 본 맏아들이 무거운 얼굴로 앞에 앉았다.
"아버지, 선로 인입 공사비에 모터값까지 합치면 논 몇 마지기 값입니다."
"내 논은 몇 마지기 줄어들어도 다시 일구면 그만이다.
하지만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이 다치면 그건 되돌릴 수가 없다."
아내는 조용히 문갑 서랍에서 인주와 목도장 주머니를 꺼내 남편 앞에 놓았다.
이튿날 배병희는 남은 간척지 논 중 일부를 또다시 처분했다.
논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한전에 전기 인입 공사비를 내고 모터와 설비를 준비했다.
며칠 뒤, 전봇대와 자재를 실은 한전 공사 차량이 독정리 들판으로 들어섰다.
한전 인부들이 큰길 어귀부터 정미소로 이어지는 길가를 따라 구덩이를 파고 콘크리트 전봇대를 하나씩 세워 나갔다.
들판을 가로질러 전봇대가 줄지어 서자, 기술자들이 기둥 위로 올라가 애자를 달고 동력선을 당겨 이었다.
선로 공사가 끝나고 마침내 정미소 벽면 배전반까지 전기가 들어왔다.
다만 당시 농촌 전력 사정이 넉넉지 않아 정미소 기계를 한꺼번에 돌리기에는 전기의 한계가 있었다.
배병희는 위상변환기를 들여와 설치하고, 기계들이 무리 없이 돌아가도록 전력을 맞추었다.
전기가 들어오자 작업장 천장 들보를 가로지르던 긴 쇠 장축과 가죽 평벨트를 걷어냈다.
그 자리에는 도정기, 석발기, 풍구, 승강기마다 개별 전기 모터를 따로 설치했다.
모터와 기계 풀리를 잇는 짧은 벨트 바깥에는 안전 덮개를 씌우고, 기둥마다 개폐기 스위치를 달았다.
직원들이 지나는 통로에 위태롭게 걸려 있던 벨트가 사라졌다.
설비 교체가 끝난 저녁, 창밖 들판은 어두웠다.
배병희는 벽면 배전반 앞으로 다가서서 차단기 레버를 올렸다.
"철컥!"
천장에 매단 형광등들이 두어 번 깜빡이더니 작업장 안을 환하게 밝혔다.
늘 매연과 그을음으로 어둑하던 정미소 구석구석이 밝아졌고, 장축과 긴 벨트가 사라진 작업장은 한결 넓어 보였다.
배병희가 도정기 옆 스위치를 눌렀다.
"우우웅-"
경유 매연이 나지 않았고, 귀를 때리던 발동기 소음 대신 전기 모터 소리가 고르게 울렸다.
승강기와 석발기 스위치를 차례로 올리자 기계들이 매끄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호퍼에 부어 넣은 벼가 기계를 타고 흘러가며, 배출구 아래로 백미가 쏟아져 내렸다.
직원들은 환해진 일터를 둘러보며 웃었다.
"대낮보다 더 밝구먼!"
"매연도 없고 소리도 한결 덜하네!"
스위치 옆에서 모터 소리를 살피던 맏아들도 아버지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병희는 기름때가 배어 있는 제 두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논은 또 줄었지만, 사람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일터가 되자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 뒤로 정미소 마당이 볏가마니로 가득 찼다.
정미소에 딸린 낡은 판자 창고는 천여 가마만 들여놓아도 꽉 찼다.
창고에 들어가지 못한 수천 가마의 벼가 마당을 넘어 들판 논두렁까지 쌓였다.
배병희는 가마니 더미를 바라보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해 쪽에서 먹구름이 낮게 깔리고 습한 늦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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