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한 톨의 무게 ​

새벽 독정 정미소 창고의 뚫린 블록벽과 찢긴 쌀가마니, 흙바닥의 발자국
1990년대 중반, 독정 정미소

정미소 창고 벽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밤사이 도둑이 벽을 깨부수고 들어와, 쌀 백여 가마를 통째로 털어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서울로 쌀을 가득 싣고 올라간 납품 트럭마저 대낮에 감쪽같이 도둑맞았다는 연락이 날아들었다.

불 꺼진 정미소 사무실 안, 배병희는 차가운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지급 거절 도장이 찍힌 약속어음 다발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형님, 아우 하며 수년간 거래해 온 서울의 대형 곡물 상회가 끊어준 총액 3억 원짜리 어음이었다.

상회 주인이 하룻밤 새 점포 셔터를 내리고 야반도주하면서, 3억 원은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었다.

책상 한쪽의 수매 장부에는 당장 막아야 할 부도 어음과 이웃 농민들에게 치러야 할 볏값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수채화로 그린 정미소 마당에서 볏값을 기다리는 농민들

날이 밝아오기 무섭게 정미소 마당으로 농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해진 털모자를 눌러쓴 이들은 시린 손을 점퍼 주머니에 찌른 채 마당을 서성였다.

봄부터 가을까지 허리가 휘도록 거둔 볏값을 받기로 한 정산일이 코앞이었다.

"배 사장네가 서울 상회에 크게 물렸다더만."

마당 한구석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음이 부도나서 3억을 날렸대. 밤사이에 창고 쌀까지 털렸다던데."

"그럼 우리 볏값은 어쩌고?"

불안한 수군거림이 찬 바람을 타고 마당 가득 번졌다.

농민들은 사무실 유리창을 힐끔거렸다.

사무실 안에서 맏아들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버지, 서울 상회는 이미 간판을 내렸고 경찰서에서도 트럭 찾기는 쉽지 않다고 합니다."

배병희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 문을 열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동안, 수십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등으로 쏠렸다.

배병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당을 지나 안채 안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무거운 적막이 가라앉아 있었다. 문갑 옆에 선 아내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배병희는 방구석에 놓인 목제 장롱 앞으로 다가갔다.

차곡차곡 개어 둔 이불 밑바닥 깊숙이 손을 밀어 넣자 두툼하고 빳빳한 종이 뭉치가 잡혔다.

모서리가 닳은 누런 서류봉투였다.

그 봉투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본 아내가 아랫입술을 깊게 깨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봉투에서 꺼낸 한지 위에는 정갈한 먹글씨와 붉은 등기 인장이 선명했다.

남양만 간척지에 피땀으로 개간한 농토의 땅문서였다.

1977년 안면도를 떠나와 이곳에 터를 잡으며 평생 모은 밑천을 다 털어 일구어 낸 땅이었다.

소금기 가득한 잿빛 불모지에서 기어이 벼를 키워내려고 밤마다 손전등을 들고 나가 물길을 트고 도랑을 팠던 땅이었다.

고무장화 속에서 발가락이 짓무르도록 지켜낸 자신의 살점 같은 흙이었다.

그때 방문이 조용히 열리며 맏아들이 들어섰다.

아버지 손에 들린 누런 문서를 본 맏아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버지, 그건……"


목제 탁자 위 땅문서와 누런 봉투를 어루만지는 배병희의 거친 두 손

배병희는 문서 표면을 굵은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끝의 두꺼운 굳은살이 바삭거리는 한지와 거칠게 맞물렸다.

"정미소 세우고 설비 들일 때마다 떼어 팔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논 아닙니까."

아버지가 흘린 피땀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며 함께 일궈온 아들이었다.

배병희는 땅문서를 다시 누런 봉투 속으로 반듯하게 밀어 넣었다.

"네 마음은 안다. 하지만 마당에 선 저분들을 봐라."

배병희는 봉투를 쥔 채 맏아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 년 내내 진흙 파서 거둔 벼를 우리 이름만 믿고 맡긴 이웃들이다. 우리가 사정 봐달라며 시간을 끈다고 저 집들 겨울 살림이 기다려주겠느냐."

맏아들은 아버지의 무거운 결단을 헤아린 듯 입술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땅이야 다시 일구면 그만이지만, 사람들의 믿음을 잃으면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배병희는 서류봉투를 품에 안고 방을 나섰다.

문지방 곁에 선 아내가 말없이 그의 작업복 옷깃을 여며주었고, 맏아들이 그 뒤를 묵묵히 따라나섰다.

배병희가 정미소 마당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자, 술렁이던 농민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꽂혔다.


누런 땅문서 봉투를 머리 위로 들고 이웃 농민들에게 볏값 지급을 약속하는 배병희

배병희는 농민들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땡볕 아래서 까맣게 그을린 이웃들의 얼굴이 눈앞에 가득 들어왔다.

"배 사장, 서울 상회가 부도났다던데 참말이오? 밤새 창고 쌀까지 털렸다면서 우리 볏값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요!"

군중 속에서 누군가 갈라진 목소리를 터뜨렸다.

살얼음 같은 긴장이 마당을 덮쳤다.

배병희는 피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 보았다.

"어르신들, 또 형님 아우님들. 소문으로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배병희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마당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서울 상회가 부도난 것도 맞고, 어젯밤 창고 쌀 백여 가마를 털린 것도 사실입니다. 서울로 간 납품 트럭까지 도둑맞았습니다."

순식간에 농민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당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배병희는 품에서 누런 서류봉투를 꺼내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하지만 정미소 문 안 닫습니다."

거세게 웅성거리던 마당이 일순간 숨을 멈췄다.

"제가 가진 간척지 땅문서입니다. 이 논을 팔아서, 여러분이 맡기신 볏값은 단 한 푼도 축내지 않고 현찰로 다 치러 드리겠습니다."

부도가 나면 밤손님처럼 야반도주부터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제 살점 같은 논을 팔아 남의 볏값부터 치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눈앞에 서 있었다.

술렁이는 마당 위로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이 맴돌았다.

당장 논을 급매로 내놓는다 해도, 다가오는 정산일까지 그 막대한 돈을 현찰로 마련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벼랑 끝에서도 끝내 사람을 먼저 품은 그의 인생은, 살을 에는 칼바람이 불던 안면도의 개펄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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