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마력 발동기를 깨우다 ​

폐허 같은 정미소의 낡은 들보에 앉은 참새와 바닥에 흩어진 낟알
1983년 말, 독정 정미소

정미소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끊긴 채 버려져 있었다.

함석지붕 틈으로 초겨울 볕이 새어 들었고, 구석마다 쥐똥과 삭은 낟알이 널려 있었다.

작업장 한복판에는 50마력 조양 디젤 발동기가 멈춰 서 있었다.

무쇠 몸체에 붉은 녹이 슬고 오래된 기름때가 눌어붙었다.

천장 들보 아래를 가로지른 7미터 쇠 장축은 베어링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축에 물려 돌아가야 할 수십 가닥의 소가죽 평벨트도 풀린 채 흙바닥에 놓여 있었다.

남양만 간척지 들판에서는 막 추수가 끝난 참이었다.

날마다 벼가 쏟아져 나오는데 정미소는 돌아가지 않았다.

배병희는 작업복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였다.

스패너보다 먼저 대나무 사다리와 그물망을 챙겼다.

들보와 깨진 환기창 틈으로 참새 떼가 드나들며 남은 낟알을 쪼아 먹고 배설물을 떨어뜨렸다.

“남이 땀 흘려 지은 곡식이다. 낟알 한 톨이라도 참새 밥으로 버려둘 수는 없다.”


대나무 사다리를 딛고 정미소 들보와 환기 틈에 그물을 고정하는 배병희

배병희는 기둥에 사다리를 기대어 세우고 천장 들보로 올라갔다.

찬 바람을 맞으며 들보와 서까래 틈마다 나일론 그물을 펼쳐 둘렀다.

환기창과 처마 밑, 녹슬어 벌어진 함석지붕 틈새까지 송곳과 철사로 그물코를 꿰어 매었다.

꼬박 사흘 동안 구멍을 막고 나자 참새들이 들어오지 못했다.

그 무렵 고향 안면도에서 조카들이 왔다.

젊은 시절 우마차 탈곡기와 김 공장에서 쇠붙이를 함께 다뤄온 이들이었다.

디젤 발동기를 다루는 노련한 기관수도 철제 공구함을 메고 정미소 마당으로 들어섰다.

낮 동안 방위병으로 복무하던 맏아들은 퇴근하자마자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달려왔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어디부터 손대면 됩니까.”

배병희는 스패너를 쥐고 다가온 아들의 어깨를 한 번 쳤다.

기관수가 연장을 챙겨 들고 50마력 발동기 앞에 자리를 잡았다.

녹슨 볼트에 기름을 쳐가며 하나씩 풀고, 장정 셋이 달라붙어 실린더 헤드를 들어 올렸다.

무쇠 뚜껑을 열자 그을음 냄새가 났고, 안에는 타르 찌꺼기가 시커멓게 말라붙어 있었다.

피스톤 링도 실린더 내벽에 들러붙어 있었다.

억지로 크랭크를 돌리면 실린더 안쪽 벽이 긁혀 기계를 못 쓰게 될 판이었다.

“상태가 생각보다 고약합니다.”

“크랭크축까지 꽉 물려서 망치로 쳐도 꿈쩍을 안 합니다.”

기관수가 팔뚝으로 땀을 훔치며 혀를 찼다.

조카들도 굳은 쇳덩이를 내려다보았다.

배병희는 발동기 앞으로 다가앉아 피스톤 자리를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쇠는 정성을 들인 만큼 제 숨을 찾는 법이다.”


기름과 솔, 참나무 쐐기로 굳은 발동기의 피스톤을 조심스럽게 풀어내는 배병희와 기관수

양동이에 등유와 경유를 퍼 왔다.

굳은 부분에 기름을 부어 불린 뒤 쇠솔에도 기름을 적셔 카본 찌꺼기를 문질러 닦았다.

시커먼 구정물이 흘러내리고 무쇠 표면이 조금씩 드러났다.

쇠망치 대신 참나무 쐐기를 피스톤 가장자리에 대고 조심스레 두드렸다.

쇠가 상하지 않도록 반나절 넘게 기름을 치고 두드린 끝에 피스톤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안면도 들판에서 숟가락에 납을 녹여 탈곡기 메탈 베어링을 깎아 맞추던 손이었다.

배병희는 고운 사포에 기름을 묻혀 실린더 안쪽 벽과 밸브 자리에 낀 녹을 갈아냈다.

유격이 어긋나면 압축이 샐 수 있어 등잔불을 바짝 대고 닳거나 긁힌 자리가 없는지 밤새 살폈다.

그사이 맏아들과 조카들은 천장 들보에 매달린 7미터 쇠 장축을 손봤다.

사다리에 올라 주철 풀리를 풀어 내리고 엉겨 붙은 쌀겨와 기름때를 등유로 씻었다.

먹줄을 튕겨 축의 수평을 바로잡은 뒤, 마모된 베어링을 빼고 새 부품을 끼웠다.

뻑뻑하던 장축이 손으로 밀어도 부드럽게 돌아갔다.

작업장에는 등유 냄새와 쇳가루 먼지가 가득했다.

사람들의 얼굴과 손톱 밑이 기름때로 얼룩졌다.

닷새 밤낮을 일하자 장정들의 어깨가 처졌다.

자정이 넘자 초겨울 북풍에 정미소 문풍지가 흔들렸다.

판자문이 열리고 아내가 소고기국밥을 양철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왔다.

안채 가마솥에서 장작불로 고아 낸 국밥이었다.

무와 대파, 살코기가 담긴 뚝배기마다 김이 올랐다.

배병희는 기름걸레를 내려놓고 사람들을 사무실 쪽방으로 이끌었다.

“다들 애 많이 썼다. 국물 식기 전에 어서 한 그릇들 비워라.”


자정이 넘은 정미소 사무실에서 소고기국밥으로 몸을 녹이는 일꾼들

사람들은 기름 묻은 손을 훔치고 둘러앉아 뚝배기에 고봉밥을 말았다.

뜨거운 국물이 빈속을 채웠다.

아내는 깍두기를 얹어주었다.

이튿날 동이 틀 무렵, 해체했던 부품을 역순으로 조립했다.

볼트를 단단히 조이고 윤활유 통을 채운 뒤 연료 노즐의 분사 상태를 점검했다.

“기관수, 크랭크 물려라!”

기관수가 무쇠 시동 손잡이를 발동기 축에 끼웠다.

기관수와 배병희, 맏아들 세 사람이 손잡이를 나란히 움켜잡았다.

“하나, 둘, 셋!”

감압 레버를 젖힌 상태에서 세 사람이 체중을 실어 크랭크 손잡이를 돌렸다.

회전축의 저항이 손바닥과 어깨에 전해졌다.

한 바퀴, 두 바퀴, 플라이휠이 관성을 얻어 돌기 시작했다.

실린더 안으로 공기가 빨려 들어가며 쉭, 쉭, 쉭 소리가 났다.

세 사람은 숨을 몰아쉬며 회전 속도를 끌어올렸다.

“지금이다! 압축 걸어라!”

배병희가 외치자 기관수가 감압 레버를 놓았다.


수채화로 그린 디젤 발동기와 금속 장축의 풀리를 평벨트로 연결해 기계를 돌리는 정미소 내부

배기통에서 기침 같은 소리가 나더니 새하얀 연기가 치솟았다.

쿵, 쿵, 쿵, 쿵!

폭발음과 함께 무쇠 플라이휠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50마력 조양 발동기에 시동이 걸렸다.

천장의 7미터 쇠 장축이 회전하자 수십 가닥의 가죽 평벨트가 풀리를 감고 돌아갔다.

도정기와 석발기, 풍구와 승강기도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배병희는 볏가마니 하나를 들어 투입구 호퍼에 쏟았다.

승강기를 타고 올라간 벼가 기계를 거치며 왕겨와 쌀겨를 벗었다.

잠시 뒤 배출구로 하얀 백미가 쏟아졌다.

배병희는 두 손을 뻗어 갓 찧은 쌀을 한 움큼 받아 들었다.

매끄럽고 따뜻한 낟알이 손바닥에 닿자 입술 끝이 떨렸다.

정미소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배병희는 이전 주인이 남긴 외상 장부를 펼쳤다.

볏값을 받지 못한 이웃 농민들을 한 사람씩 사무실로 불렀다.

제 논을 팔아 마련한 현금 다발이 책상 위에 놓였다.

“그동안 마음고생들 심하셨습니다. 밀린 볏값을 한 푼도 빠짐없이 계산했으니 확인해 보십시오.”

돈을 받은 나이 지긋한 농부는 지폐 뭉치를 쥔 손을 떨었다.

“배 사장… 남이 진 빚을 정말로 제 땅까지 팔아서 다 갚아주는 겨?”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단가…”

농민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돌아갔다.

배병희는 새로 들어오는 벼의 값도 약속한 정산 날짜를 넘기지 않고 현찰로 치러주었다.

소문이 남양만 들판을 건너 인근 고을로 퍼졌다.

“독정리 정미소를 배병희가 맡아서 멈춘 기계를 살려냈단다!”

“그 집은 이전 주인이 떼어먹은 볏값까지 제 논 팔아 다 갚아주고, 새로 찧는 쌀값도 안 미루고 현찰로 내준다더라!”


초겨울 정미소 흙마당에서 볏가마를 함께 내려놓는 배병희와 일꾼들

독정리는 물론 장안면과 우정면 일대 농가들까지 벼를 싣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비포장 신작로에는 볏가마니를 실은 경운기와 소달구지, 리어카 행렬이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이어졌다.

정미소 마당이 볏가마니로 가득 찼다.

정미소에 딸린 낡은 판자 창고는 천여 가마만 들여놓아도 꽉 찼다.

창고에 들어가지 못한 수천 가마의 벼가 마당을 넘어 들판 논두렁까지 쌓였다.

배병희는 가마니 더미를 바라보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해 쪽에서 먹구름이 낮게 깔리고 습한 늦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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