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지킨 날
동트기 전 새벽안개가 정미소 마당을 자욱하게 메우고 있었다. 늦가을 찬 바람이 함석지붕 귀퉁이를 훑고 지나가며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판자문 틈으로 스며든 냉기가 사무실 시멘트 바닥을 얼음장처럼 식혔다.

형광등 아래 나무 책상에는 사과 상자 서너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밤새 분류해 넣은 흰 봉투들이 들어차 있었다.
남양만 간척지에서도 소출이 좋던 논을 시세의 반값에 급매하고 받아 온 현찰이었다.
배병희와 아내, 맏아들은 밤새 책상 앞에 둘러앉아 지폐를 세었다.
맏아들이 주판알을 튕기며 수매 장부의 가마 수와 단가를 대조하면, 아내는 봉투 겉면에 농민들의 이름과 금액을 단정한 글씨로 적었다.
배병희는 마지막 봉투 속 지폐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3억 원의 연쇄 부도와 도난으로 논은 남의 손에 넘어갔으나, 그는 망설이지 않고 봉투를 여몄다.
이웃 농민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농사지은 볏값이었다.
창밖이 희뿌옇게 밝아오자 신작로 저편에서 자갈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운기 덜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농민들이 하나둘 정미소 마당으로 들어섰다.
해진 털모자를 눌러쓴 늙은 농부부터 흙 묻은 점퍼를 걸친 젊은 가장까지 수십 명이었다.
약속한 정산일 아침이었다.

농민들은 사무실 가까이로 다가오지 못하고 마당 구석을 서성거렸다.
점퍼 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수매 보관증을 만지작거렸다.
"배 사장이 땅문서를 내놓겠다고 하긴 했어도, 요즘 같은 시기에 그 큰 현찰이 어디서 나겠나."
"오늘마저 어음을 내밀거나 날짜를 미루면 올겨울 연탄값하고 애들 학교 공납금은 어쩌나."
농민들은 낮게 웅성거리며 사무실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정미소 사무실 문이 열렸다.
배병희가 먼지를 털어낸 작업복 차림으로 마당에 나섰다.
그 뒤로 맏아들이 수매 장부와 인주통을 챙겨 사과 상자를 안고 따라 나왔다.
곧이어 아내가 안채 부엌에서 김이 오르는 양은 주전자와 사발들을 쟁반에 받쳐 들고 나왔다.
아내는 마당 한편의 나무 탁자 위에 주전자를 내려놓고 얼어붙은 농민들의 손에 뜨거운 보리차 사발을 하나씩 건넸다.
배병희는 마당 한가운데 놓인 널찍한 나무 평상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맏아들이 평상 위에 사과 상자들을 반듯하게 내려놓고 장부를 펼쳤다.
마당이 잠잠해지며 농민들의 시선이 배병희의 손끝으로 쏠렸다.
"어르신들, 이웃분들, 아침 일찍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따뜻한 물 드시고 몸부터 녹이십시오."
배병희는 잠시 숨을 고른 뒤 평상 위 사과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농민들의 이름이 적힌 하얀 봉투 수십 통이 줄지어 있었다.
마당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오늘이 제가 약속드린 수매 정산일입니다."
배병희가 펼쳐진 수매 장부 위에 투박한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를 믿고 벼를 맡겨주신 분들의 이름과 가마 수를 확인하고, 오늘 이 자리에서 한 푼도 빠짐없이 현찰로 치러드리겠습니다."
배병희는 장부 첫 장에 적힌 마을 어르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윗마을 김 어르신, 추청벼 삼백이십 가마 대금 구백육십만 원입니다."
이름이 불린 노인이 평상 앞으로 다가섰다.
맏아들이 두 손으로 수매 보관증을 받아 장부와 대조한 뒤 확인 도장을 찍었다.

배병희는 상자에서 노인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꺼냈다.
그 자리에서 지폐 묶음을 확인시켜 준 뒤, 노인의 두 손바닥 위에 만 원권 다발을 올려놓았다.
노인은 손바닥에 얹힌 돈뭉치를 내려다보았다.
은행 띠지가 그대로 묶인 새 현찰이었다.
"배 사장…… 정말로 십 원 한 장 안 깎고 현찰로 다 준단 말이오?"
"당연히 다 받으셔야지요. 어르신께서 봄부터 농사지으신 볏값입니다."
"자네가 그 알짜배기 논을 반값에 넘겼다는 소리를 어제 읍내에서 들었네. 자네는 어쩌려고 이러는가……."
배병희는 돈뭉치를 쥔 노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어르신, 논이야 제가 다시 일구면 됩니다. 하지만 농사지은 사람 볏값은 하루도 밀려선 안 됩니다."
배병희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흉흉한 소문에도 끝까지 기다려 주셔서 참말로 고맙습니다."
정산은 계속됐다.
배병희는 장부에 적힌 순서대로 백 가마를 넘긴 대농부터 대여섯 가마를 맡긴 소작농까지 한 사람씩 평상 앞으로 불렀다.
"아랫말 박 성님, 마흔다섯 가마 백삼십오만 원입니다. 건너말 이 서방, 열두 가마 삼십육만 원입니다."
맏아들은 보관증을 확인하며 장부에 도장을 찍었고, 배병희는 지폐를 한 장 한 장 세어 농민들의 손에 쥐여주었다.
돈봉투를 받은 농민들은 평상 곁에 서서 눈시울을 붉혔다.
"배 사장, 우리 돈 떼일까 봐 사흘 내내 마당을 기웃거렸으니 면목이 없네……."
"아닙니다, 성님. 제가 공연히 마음고생을 시켜드렸습니다. 국밥 한 그릇씩 드시고 가십시오."
아내는 부엌과 마당을 오가며 빈 보리차 주전자를 채우고, 추위에 언 농민들의 등을 말없이 토닥였다.
점심때가 지나도록 마당의 줄은 이어졌다.
종일 서서 허리를 굽혔다 펴기를 거듭하느라 배병희의 허리와 어깻죽지가 뻐근해졌다.
수천 장의 지폐를 세어 넘긴 손끝에는 인주와 지폐 기름때가 묻었다.

오후 늦게 줄 맨 끝에 서 있던 농민이 평상 앞으로 다가섰다.
작은 다랑논을 일구어 벼 세 가마를 맡겼던 홀몸 노인이었다.
배병희는 상자 밑바닥에 남은 마지막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서 만 원짜리 지폐 아홉 장을 꺼내 소리 내어 세더니, 노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어르신, 세 가마 대금 구만 원입니다. 올겨울 따뜻하게 나십시오."
노인은 지폐 아홉 장을 가슴에 품고 배병희의 손등을 쓸어내렸다.
해가 기울자 정산을 마친 농민들이 하나둘 정미소 마당을 빠져나갔다.
마지막 경운기 소리가 신작로 너머로 멀어지자 마당이 조용해졌다.
평상 위 사과 상자들은 비어 있었다.
농민들의 도장과 무인이 찍힌 수매 장부 두 권과 바닥을 드러낸 인주통이 남았다.

배병희는 평상 앞에서 빈 상자들을 접어 포갰다.
필기도구를 챙긴 맏아들이 수매 장부를 안고 아버지 곁에 다가섰다.
"아버지, 장부에 적힌 어르신들 볏값까지 한 분도 빠짐없이 다 치렀습니다."
금고는 비었고, 십수 년 일군 논은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내일부터 운영 자금 없이 정미소를 어떻게 돌릴지 막막했다.
부엌에서 손을 닦고 나온 아내가 남편 곁에 섰다.
세 식구는 말없이 빈 마당과 들판을 바라보았다.
서쪽 바다 너머로 기우는 붉은 저녁노을이 추수가 끝난 남양만 들녘을 길게 물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