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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물길이 바뀌기 전에
1970년대 중반, 천수만 일대
한겨울에도 안면도 중장리 앞바다는 활기가 넘쳤다.
김을 묶어 궤짝에 담기가 무섭게 트럭으로 실려 나갔다.
겨울 갯벌의 검은 풀이 그대로 쌀이 되고 돈이 되는 시절이었다.
“이러다간 마을 사람들 전부 기와집 올리겠구먼.”
어촌계원들은 겨울 벌이에 취해 있었다.
틈만 나면 배병희를 찾아와 김발을 더 엮게 대나무를 대달라고 졸랐다.
남들은 흥청망청 잔치를 벌였지만 배병희는 들뜨지 않았다.
그는 평상에 앉아 묵묵히 장부를 넘겼다.
투박한 손으로 자재비와 품삯을 한 푼도 어긋남 없이 적고, 번 돈은 안방 궤짝에 넣어 두었다.
마을이 들썩일수록 배병희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바다 건너 육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낯선 기운이 섞여 있었다.
광천 장터를 오가는 사공들의 입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서울 큰 건설회사가 천수만에 들어왔답니다.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든다더군요.”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거센 바다를 사람 손으로 어떻게 막느냐며 실없는 소리로 넘겼다.
하지만 소문은 잦아들지 않았다.
북쪽 갯골에 지프차가 드나들고, 외지 기술자들이 조수간만을 잰다는 말이 이어졌다.
배병희는 흘려듣지 않았다.
열다섯 살부터 지게를 지고 목선으로 천수만을 건넜던 그였다.
물살이 잦아드는 조금 물때를 골라 작은 목선을 띄웠다.
홀로 노를 저어 천수만 북쪽, 홍성과 서산의 갯벌이 마주 보는 목덜미로 배를 몰았다.
갯가에 이르자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잿빛 개흙 위에 붉고 노란 깃발이 촘촘히 꽂혀 있고, 두툼한 방한복 차림의 외지인들이 삼각대를 세워 물길의 높낮이를 재고 있었다.
갯골을 따라 긴 쇠말뚝이 줄지어 박혀 있었다.
배병희는 배를 대고 뻘밭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서 무얼 하는 거요?”
도면을 쥔 현장 기사가 고개를 들었다.
“간척 사업 측량입니다.
저기 뭍에서 이쪽까지 큰 둑을 놓을 참입니다.
천수만 북쪽을 막아 수천만 평 농토를 만듭니다.”
기사가 가리키는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배병희는 입술을 다물었다.
삽자루로 흙을 나르는 동네 둑막이가 아니었다.
거대한 중장비와 바윗덩이로 천수만 북쪽 바다를 막는 대공사였다.
섬으로 돌아온 배병희는 어촌계원들을 포구 창고로 불러 모았다.
“천수만 북쪽에 대기업 측량패가 들어앉았소.
조만간 바다 한가운데에 거대한 둑이 올라갈 거요.”
창고 안이 조용해졌다.
“북쪽에 둑이 들어서면 물길이 달라질 겁니다.
우리 김 양식도 타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설을 무턱대고 늘리지 말고 슬슬 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싸늘한 콧방귀였다.
“계장님, 멀쩡한 판에 웬 초를 치시오?
귀신도 잡아챌 바다를 어떻게 사람이 막는단 말이오.
바윗덩이를 부어봐야 다 씻겨 내려가지.”
나이 지긋한 어촌계원이 손사래를 쳤다.
젊은 계원들도 거들었다.
“설령 막아도 십 년은 걸릴 일이오.
지금 김 한 톳이 쌀 한 말 값인데, 말뚝을 더 박아야제 김을 접다니요.”
“서울 상인들이 돈 보따리를 싸 들고 줄을 섰는데, 오지도 않은 둑 때문에 이 노다지를 버린단 말이오?”
어민들의 눈에는 손에 쥐는 현금만 보였다.
사람들은 빚을 내서라도 대나무를 더 사고, 먼바다로 나가 말뚝을 더 박았다.
말로 꺾을 수 있는 욕심이 아니었다.
배병희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배병희는 홀로 갯벌로 나갔다.
바다에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었다.
안면도 김이 으뜸인 까닭은 천수만의 거센 물살 덕택이었다.
하루 두 번 세찬 조류가 갯벌을 씻어내야 김이 숨을 쉬고, 썰물 때 물 밖으로 드러나 바람과 볕을 쬐어야 잡풀이 마르고 김 결이 고와진다.
그것이 지주식 김의 생명이었다.
하지만 저 천수만 북쪽에 거대한 제방이 들어서면 어찌 되겠는가.
조류가 약해지면 김이 자라던 조건도 달라질 터였다.
지금처럼 김을 거둘 수 있을지 배병희는 자신할 수 없었다.
실제로 김이 제대로 자라지 않게 된 뒤에는 늦는다.
그때는 공장도, 건조장도, 수천 개의 참나무 말뚝도 제값을 받기 어려울 터였다.
장사는 벌일 때보다 접을 때를 아는 것이 몇 곱절 어려운 법이었다.
가장 값이 좋고 번성했을 때, 남들이 김 사업에 눈이 멀어 달려들 때 털고 일어서야 했다.
스물셋 젊은 날부터 십수 년 동안 피땀으로 일군 바다였다.
손마디가 얼어 터지며 뻘밭에 말뚝을 박던 날들이 손끝을 스쳤다.
그러나 미련에 매달리면 밑천마저 잃는다.
셈이 서지 않는 집착은 파멸을 부른다는 것을, 일찍이 아버지의 소금 굽기 실패에서 뼈저리게 배웠던 그였다.
“물길이 바뀌면 김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물길이 돌아서기 전에 길을 찾아야 한다.”
배병희는 결심을 굳히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자 부엌에서 저녁을 안치던 아내가 마당으로 나왔다.
가마솥 김 사이로 아내의 눈길이 남편의 얼굴에 닿았다.
배병희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김 사업을 정리할 생각이오.”
아내는 들고 있던 행주를 가만히 쥐었다.
섬마을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일군 살림이었지만, 아내는 남편의 눈빛에 어린 묵직한 결단을 보았다.
“당신 생각이 그러시면 뜻대로 하세요.”
아내의 짧은 대답 속에는 군더더기 없는 신뢰가 배어 있었다.
배병희는 이튿날부터 조용히 김 공장과 양식장의 장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들이 김발을 하나라도 더 차지하려 안달이 난 지금이야말로 제값을 온전히 받을 때였다.
해 질 녘, 썰물이 진 바다로 배병희는 홀로 걸어 나갔다.
드넓은 갯벌 위로 겨울 노을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
줄 맞춰 늘어선 수천 개의 참나무 말뚝이 붉은 볕을 받아 검붉은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대나무 발들이 매서운 갯바람에 서걱서걱 울었다.
배병희는 뻘 깊숙이 박힌 참나무 말뚝 하나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직접 도끼로 다듬고 나무 메로 내려쳤던 밑동이었다.
거친 나뭇결 위로 굴 껍데기와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손바닥 굳은살 사이로 차가운 소금기와 거친 나뭇결이 저릿하게 파고들었다.
청춘을 쏟아부어 일군 바다의 질감이었다.
저 멀리 마을 어귀에서는 밤샘 작업을 알리는 백열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상인들의 웃음소리와 김을 싣는 트럭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배병희는 말뚝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들뜬 마을이 아니라 천수만 너머 아득한 육지의 들판을 향했다.
북쪽 바다에는 머지않아 둑이 들어설 것이다.
물길이 바뀌면 사람이 디뎌야 할 길도 달라지는 법이다.
바닷물에 씻겨 나가지 않고, 땀 흘린 만큼 오롯이 곡식을 돌려주는 넓고 단단한 흙.
그 대지 위에 서서 평생을 걸 만한 더 큰 농사의 길을 열어야 했다.
배병희의 장화가 질척이는 갯벌을 박차고 뭍으로 향했다.
살을 에는 갯바람 속에서도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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