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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고향 바다를 접다
1976년~1977년 초, 안면도 중장리
건조장 덕장에 널린 김발 사이로 매서운 바닷바람이 들이쳤다.
대살에 엉겨 붙어 바짝 마른 김에서 구수한 갯내음이 풍겼다.
일꾼들이 마른 김을 모아 톳을 짓는 손길이 분주했다.
창고 안쪽에는 육지로 나갈 김 궤짝들이 그득하게 쌓여 있었다.
마당 한구석에서는 채취선에서 실어 낸 생김을 씻는 펌프가 쉼 없이 돌았다.
김 일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스무 해 가까이 흘렀다.
그동안 안면도 바다는 배병희의 땀을 저버리지 않았다.
참나무 말뚝을 박아 일군 지주식 김은 품질이 빼어나 서울 상인들까지 현금을 싸 들고 찾아왔다.
궤짝에 돈이 쌓였고, 갯가 사람들은 그를 믿고 어촌계장까지 맡겼다.
남들이 보기에는 남부러울 것 없는 번듯한 터전이었다.
하지만 배병희의 시선은 마당 너머 천수만 수평선에 머물렀다.
바다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가장 성할 때, 제값을 쳐서 넘길 수 있는 지금이 바로 결단을 내릴 때였다.
그 마음에 불을 지핀 것은 면사무소 벽에 나붙은 공고문 한 장이었다.
경기도 화성 남양만 일대에 정부가 방조제를 완공하고 간척 농지 입주자를 공모한다는 소식이었다.
1973년 완공 후 수년간 바닷물을 빼내며 일군 거대한 새 땅이었다.
마흔두 해를 살아온 고향이었다.
손때 묻은 공장을 등지는 일이 두렵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길을 내다본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배병희는 육지 도매상들에게 공장을 넘기겠다는 뜻을 전했다.
소문을 듣고 보령과 광천의 큰 손들이 배를 타고 들어왔다.
공장 마당에 들어선 매수자가 담배를 피워 물며 기색을 살폈다.
"배 사장, 지금 한철에 떨어지는 돈이 얼만데 이걸 넘겨?
육지에 급한 빚이라도 졌소?"
상인은 흠을 잡아 값을 깎아내릴 셈이었다.
"빚은 한 푼도 없소."
배병희는 담담하게 장부를 펼쳤다.
"공장 건물과 대지도 함께 넘길 것이오.
세척기와 건조 모터는 지난가을에 부품을 싹 갈았소.
갯벌의 참나무 말뚝과 대나무 발도 손볼 곳 없이 짱짱하오.
내년 봄까지 납품할 계약처까지 고스란히 넘기는 조건이오."
설비의 수명과 하루 생산량까지 숫자를 한 치 오차 없이 짚어 나갔다.
청년 시절 자염과 천일염의 실패 끝에 뼈에 새긴 냉철한 셈법이었다.
"물길이 살아있고 김이 금값일 때 넘기는 것이오.
단 한 푼도 깎아줄 생각은 없으니, 제값을 치를 생각이 없거든 배를 돌리시오."
상인은 배병희의 기세에 눌려 더는 값을 깎지 못했다.
계약서에 도장이 찍히고, 두툼한 돈가방이 마침내 배병희의 손에 들어왔다.
물길이 막히기 전, 김 공장과 설비를 제값에 온전히 털어내 목돈을 챙긴 순간이었다.
진짜 넘어야 할 산은 집안 식구들이었다.
그날 밤, 배병희는 안방에 호롱불을 밝히고 어머니와 형제들을 불러 모았다.
문갑 위에는 남양만 간척 농지 분양 신청서와 공장을 정리한 돈가방을 묵직하게 올려두었다.
어머니가 주름진 손으로 무릎을 쓸어내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병희야, 네 나이가 벌써 마흔둘이다.
이 섬에서 남부럽잖게 자리 잡았는데 뜬금없이 바다 건너 타향으로 간단 말이냐?
거기가 어떤 땅인지 알고 온 식구를 끌고 가겠다는 게야."
맏형과 둘째 형도 혀를 차며 말렸다.
"천수만을 막는다고 쳐도 당장 내일 일은 아니잖냐.
몇 년은 족히 더 김을 뜰 수 있을 텐데, 뭣하러 굴러들어 온 복을 차고 낯선 갯땅으로 가겠다는 거냐."
문간에 선 아내도 말없이 앞치마 자락만 쥐어뜯고 있었다.
남편의 고집을 알기에 차마 입을 떼지 못했지만, 낯선 타향으로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이 얼굴에 가득했다.
배병희는 차분하지만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 그리고 형님들.
둑이 들어서고 김 농사가 예전 같지 않게 되면, 그때는 공장을 제값에 넘기기 어렵습니다.
망해서 쫓겨나듯 섬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방바닥에 화성군 지도를 펼쳤다.
"남양만은 정부가 바다를 막아놓은 곳입니다.
들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습니다.
제가 손수 둑을 막아 벼를 거둬보지 않았습니까.
흙이 언제 낟알을 품는지 그 이치를 압니다."
배병희는 문갑 위의 서류를 가리켰다.
"정부에서 분양하는 땅이 칠 정보, 이만 평이 넘습니다.
김 공장 정리한 돈으로 땅을 더 사들이면 육만 평 대농을 지을 수 있습니다.
경운기 넣고 바인더 돌려 큰 농사를 짓고, 훗날 벼를 찧어 낼 정미소까지 세울 겁니다."
그의 눈빛이 문간의 아내와 잠든 자식들의 방으로 향했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 때문입니다.
이 섬에 갇혀 있으면 아이들도 평생 갯바람만 맞아야 합니다.
수원과 서울이 가까운 곳으로 나가야 학교도 제대로 보내고 더 큰 세상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자식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에 방 안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학교에 오래 다니지 못하고 어린 나이부터 지게를 져야 했던 배병희의 세월을 식구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가장의 결단 앞에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가 길게 숨을 내쉬며 아들의 투박한 손등을 덮었다.
"네가 살면서 허튼짓한 적 없었지.
네 뜻이 정 그렇다면 가야지.
어미는 널 믿는다."
맏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병희 네가 앞장서서 길을 낸다면 따라야지.
도장 찍어라."
배병희는 인주를 꺼내 서류 위에 힘주어 인감도장을 눌렀다.
붉은 인주가 종이 속으로 깊숙이 배어들었다.
마흔두 해 동안 뿌리내렸던 고향 바다를 마침내 접고, 온 집안의 명운을 걸고 더 넓은 땅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이튿날 아침, 배병희는 바닷가 언덕에 올라섰다.
썰물이 빠져나간 갯벌 위로 수천 개의 참나무 말뚝이 아침 햇살을 받아 붉게 빛났다.
젊은 날 손마디가 터져 피를 흘리며 박아 넣었던 말뚝들이었다.
배병희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도끼를 쥐고 밧줄을 당기느라 옹이지게 박인 굳은살이 손바닥 가득했다.
거친 바다에서 몸으로 부딪쳐 깨달은 셈법과 일머리가 있었기에, 미지의 땅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 마을 골목 어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문은 갯바람보다 빨랐다.
"중장리 배 계장이 김 공장 팔고 육지로 아주 뜬단다!"
"화성 남양만 간척지로 식구들을 죄다 데리고 떠난대!"
어촌계장이자 마을의 기둥이었던 배병희가 섬을 떠난다는 소식에 안면도 갯마을이 순식간에 뒤흔들렸다.
포구 곳곳에서 일손을 놓은 어민들이 모여들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의 집 사립문을 향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다급한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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