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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여섯 가구가 따라나선 길
1977년, 안면도에서 화성 독정리로
안면도 중장리 흙마당에 마른 바람이 불었다.
발밑에서 볏짚 부스러기와 먼지가 어지럽게 날렸다.
스물셋에 일구어 스무 해 가까이 굴려온 김 공장을 남의 손에 넘겼다.
손마디가 터져가며 말뚝을 박던 갯벌도 이제 남의 바다가 되었다.
사립문 안쪽에는 새끼줄로 묶은 보퉁이와 항아리들이 줄지어 섰다.
배병희는 마당 한편에 서서 손때 묻은 농기계들을 내려다보았다.
안면도 들판을 누비던 10마력 경운기였다.
기름때와 녹이 엉겼어도 시동 핸들을 돌리면 금세라도 쿵쾅거리며 내달릴 기세였다.
그 곁에는 경운기 엔진에 연결해 볏단을 털던 탈곡기가 바인더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흙바닥을 구르며 피땀으로 장만한 밑천들이었다.
고향을 떠난다는 소문에 온 섬이 술렁였다.
사람들은 돈 잘 버는 김 공장을 두고 바다 건너 낯선 육지로 간다니 제정신이 아니라고 수군거렸다.
마흔두 해를 산 고향이었지만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떠날 채비를 서두르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사립문 밖 흙길에서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났다.
배병희와 함께 뻘밭에서 일하고 탈곡기를 나르던 이웃들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방안에 둘러앉은 이웃들의 얼굴에 수심이 짙었다.
"배 서방, 참말로 육지 간척지로 떠나는 겨?"
나이 지긋한 이웃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습니다.
남양만으로 갑니다."
배병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웃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마침내 한 사람이 무릎을 당겨 앉았다.
"우리도 자네 따라나서면 안 되겠는가?"
배병희의 눈길이 굳어졌다.
"거긴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갯땅입니다.
논바닥에 소금기도 덜 빠졌을 텐데 어떻게 따라오시려고 그럽니까."
"우린 글눈도 어둡고 세상 물정도 몰러.
하지만 자네가 기계 만지고 사람 대하는 걸 십수 년 곁에서 보지 않았는가.
자네 뒤를 따르면 어디 가도 굶어 죽진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서 그러네."
한 집만의 청이 아니었다.
배병희의 됨됨이와 일머리를 믿고 따라나서겠다는 이웃이 무려 여섯 가구에 달했다.
대대로 섬에서 살던 토박이들이었다.
조상 묘가 묻힌 고향을 등지고 살림을 죄다 털어 따라오겠다는 결심이 가볍겠는가.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여섯 집 식솔들의 생계를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다.
어깨가 무겁디무거웠다.
그런데 마당 밖 어스름 속에 서성이는 그림자가 있었다.
마을 어르신이었다.
피붙이 하나 없이 동네 끄트머리 흙오두막에서 홀로 지내던 노인이었다.
젊어서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늙어서는 갯벌에서 굴을 까며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살았다.
감나무 뒤에 선 어르신은 마당에 쌓인 이삿짐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낡은 삼베옷에 작대기를 짚은 손마디가 가랑잎처럼 떨렸다.
이웃들이 떠나고 나면 빈 동네에 홀로 남겨진 노인이 어떻게 겨울을 날지 눈앞이 훤했다.
짐이 될까 봐 다가오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퀭한 눈으로 서성일 뿐이었다.
배병희의 처지도 넉넉지 않았다.
노모와 아내, 어린 남매들까지 딸린 식구가 한둘이 아니었다.
수원에 먼저 보낸 아이들의 학비와 하숙비도 대야 했다.
여섯 가구의 앞날만으로도 숨이 턱에 닿을 판인데, 피 한 방울 안 섞인 노인까지 떠안는 것은 남들이 보면 미련한 짓이었다.
하지만 배병희는 사람을 버려두고 혼자 길을 떠날 위인이 못 되었다.
그는 마당을 가로질러 나갔다.
감나무 아래 서 있는 노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인기척에 놀란 노인이 뒷걸음질을 쳤다.
배병희가 손을 뻗어 노인의 앙상한 손목을 지그시 쥐었다.
평생 짠물에 절고 굴 껍데기에 긁혀 굳은살투성이가 된 메마른 손이었다.
노인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르신."
배병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우리랑 같이 가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노인이 젖은 눈을 껌뻑이며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따라가면…… 자네한테 짐만 될 텐데……."
"사람 사는 집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게 무슨 대수라고 그러십니까.
이웃 다 떠난 빈 동네에 어르신을 혼자 두고 가면 제 발길이 안 떨어집니다.
짐 싸서 같이 가시지요."
배병희는 노인의 오두막으로 성큼 들어갔다.
흙먼지 앉은 방구석에서 낡은 이불 한 채와 옷가지 몇 벌, 찌그러진 냄비와 놋숟가락을 모아 보자기 하나에 쌌다.
평생 부려온 살림이 그 누런 보퉁이 하나에 다 들어찼다.
배병희는 보퉁이를 둘러메고 노인의 손을 이끌어 집 마당으로 데려왔다.
식구들도, 이웃들도 토를 달지 않았다.
아내는 말없이 부엌으로 들어가 가마솥을 열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숭늉 한 대접을 떠다 노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남양만에 자리를 잡은 뒤에도 어르신은 배병희의 집에서 한 식구로 지낼 터였다.
이삿짐을 실어 나를 트럭 석 대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배병희는 이웃 장정들과 굵은 삼줄을 당겼다.
10마력 경운기를 적재함 안쪽에 밀어 넣고, 탈곡기와 바인더를 바짝 붙여 세웠다.
비포장길에 흔들려 기계가 넘어가지 않도록 온몸을 실어 밧줄을 꺾어 맸다.
매듭을 틀어쥐는 그의 억센 손마디에 붉은 핏발이 섰다.
여섯 가구의 세간과 장독들도 짚풀을 덧대어 차곡차곡 트럭 위로 올라갔다.
노인의 누런 보퉁이는 경운기 바퀴 곁, 가장 안전한 자리에 얹혔다.
배병희는 노모를 트럭 앞자리에 앉힌 뒤, 노인의 등을 받쳐 짐칸 안쪽 볏짚 위에 편안히 앉혔다.
사람 된 도리를 버리고 가는 길은 애당초 그가 걸어온 길이 아니었다.
1977년 봄날, 안면도를 빠져나가는 흙길 위로 뿌연 먼지가 일었다.
트럭 세 대가 포구 길을 돌아 섬의 고갯길로 접어들었다.
적재함 짚단 위에 쭈그려 앉은 여섯 집 식구들과 아이들의 얼굴에는 낯선 길에 대한 두려움이 역력했다.
트럭이 고갯마루를 넘어설 무렵, 누군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손수 일구었던 삼천 평 논두렁과, 굴을 까고 김을 매던 푸른 바다가 저 아래서 아스라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식구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앞자리에 앉은 노모는 낡은 저고리 고름을 말없이 매만졌다.
조수석에 앉은 배병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솔숲을 바라보는 그의 입술이 굳게 닫혀 있었다.
고향을 등진 아쉬움을 곱씹을 여유는 없었다.
그를 믿고 고향을 버린 일곱 집 식구들의 목숨줄이 오롯이 그의 어깨에 걸려 있었다.
섬을 벗어난 뒤에도 덜컹거리는 비포장 신작로를 종일 달렸다.
날이 저물 무렵, 트럭은 마침내 경기도 화성군 장안면 독정리 들머리에 멈춰 섰다.
엔진이 꺼지고 자욱하던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배병희는 차 문을 밀고 마른땅을 밟고 내려섰다.
발밑에서 메마른 소금 흙이 버석거리며 부서졌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고향의 푸른 들판이 아니었다.
끝간 데 없이 펼쳐진 벌판에는 풀 한 포기 제대로 돋아나지 않은 잿빛 흙더미뿐이었다.
바람이 들이칠 때마다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진 논바닥에서 허연 소금 가루가 매캐하게 날아올랐다.
바다에서 몰아친 갯바람이 메마른 소금기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손만 대면 벼가 자라는 기름진 옥토가 아니었다.
사람이 흘린 땀과 눈물을 들이붓지 않고는 벼 한 포기 거둘 수 없는 삭막한 소금 불모지였다.
배병희는 옷깃을 여미며 회색빛 들판을 묵묵히 쏘아보았다.
주머니 속에 찔러 넣은 그의 투박한 손마디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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