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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물길을 바꾸는 밤
1970년대 말, 화성 독정리
바다를 막아 새로 드러난 남양만 간척지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득했다.
고향에서 전 재산을 정리해 가져온 밑천이 소금땅 속에 고스란히 묻힐 판이었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배병희는 도망치는 대신 고무장화를 단단히 조여 맸다.
하지만 들판의 물길은 사람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초여름 가뭄이 닥치자 수로에 흐르는 물이 줄었다.
이웃 농민들의 신경이 곤두섰다.
낯선 타향에서 들어온 사람을 향한 경계가 물길을 두고 터져 나왔다.
"저 아래 논도 물이 모자라 바짝 타들어가는데, 외지 사람이 수로를 다 틀어막으면 우린 농사 접으란 소리요?"
수로 둑에 모여선 농민들이 괭이자루를 쥔 채 목소리를 높였다.
배병희는 맞서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흙 묻은 삽자루를 짚은 채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들 논부터 먼저 물을 채우십시오.
제 논은 밤에 물이 남을 때 돌려 대겠습니다."
배병희는 낮의 물길을 이웃들에게 고스란히 내어주었다.
그리고 밤을 택했다.
사위가 고요해진 자정이 넘으면, 배병희는 건전지를 넣은 손전등을 켜 들고 어둠 속으로 나섰다.
밤의 간척지는 바람 소리조차 서늘했다.
낮 동안 달구어졌던 갯흙이 밤이슬을 맞으며 눅눅한 짠내를 뿜어냈다.
진흙탕 논두렁을 걸을 때마다 장화가 개흙에 박혀 쩍, 쩍 소리를 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육만 평 들판을 도는 일은 밤길 십 리를 걷는 것보다 고단했다.
수로에 물이 남아 있으면 배병희는 어귀의 두꺼운 나무 널빤지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물길이 트이며 차가운 민물이 도랑으로 흘렀다.
그는 논배미마다 파놓은 물꼬를 삽으로 텄다.
논바닥 흙에서 우러나온 독한 소금물이 배수로로 콸콸 빠져나갔다.
짠물이 말끔히 빠진 자리에 새 민물이 차오르면, 진흙을 퍼 올려 물꼬를 단단히 메웠다.
물꼬 하나를 손보고 돌아서면 다음 논배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불빛을 비춰가며 물살에 허물어진 둑을 흙으로 메우고 발로 단단히 다졌다.
바짓가랑이에 묻은 찬 흙탕물이 굳어 허벅지를 차갑게 스쳤다.
동이 틀 무렵이면 온몸이 땀과 흙탕물로 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배병희의 시선은 물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소금기는 묵묵히 밤을 새우는 사람의 발걸음 앞에서만 한 뼘씩 물러섰다.
물갈이만으로는 부족했다.
굳어버린 소금땅을 깊숙이 갈아엎어야 했다.
안면도에서 싣고 온 십 마력 경운기가 큰 몫을 했다.
당시 화성 들판에서는 소로 논을 가는 농가가 대부분이었다.
거친 갯벌 흙에 소 쟁기질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경운기 발동기가 둔탁한 쇠 소리를 내며 검붉은 연기를 토해냈다.
로터리 날이 돌아가며 단단하게 굳었던 소금 흙을 부수었다.
흙덩이가 부서질 때마다 땅속에 갇혀 있던 짠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바퀴가 갯벌 웅덩이에 빠져 헛돌 때면, 배병희는 엔진을 끄고 진흙탕 속으로 뛰어들었다.
통나무를 바퀴 밑에 찔러 넣고 어깨로 경운기를 밀어 올렸다.
쇳덩이에 눌려 어깨에 시퍼런 멍이 들었지만, 발동기는 다시 힘차게 돌며 앞으로 나아갔다.
배병희는 자기 논을 다 갈고 난 뒤에도 경운기를 멈추지 않았다.
일손이 모자라 논을 묵히고 있거나 소를 구하지 못한 이웃 농가로 기계를 몰았다.
기름값 한 푼 받지 않고 흙을 곱게 갈아주었다.
가을이 오면 벼를 베어 묶어주는 바인더까지 들판으로 끌고 나갔다.
사람 여럿이 며칠을 매달려야 할 일을 반나절 만에 해치워주었다.
육만 평 농사는 기계 힘만으로는 다 해낼 수 없었다.
모를 붓고 피를 뽑으려면 수십 사람의 손이 필요했다.
배병희는 끼니를 잇기 어려운 집과 타향에서 갓 들어와 자리 잡지 못한 이웃들을 먼저 찾아갔다.
"우리 논으로 나와 일손 좀 보태주시오.
품삯은 넉넉히 셈해 드리겠소."
그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을 굶기지 않았다.
아침 햇살이 논두렁을 비출 때면, 아내가 커다란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들판으로 걸어왔다.
넓은 멍석 위에 차려진 밥상은 푸짐했다.
하얀 쌀밥이 고봉으로 담긴 사발과 가마솥에서 푹 끓여낸 소고기뭇국이 김을 뿜었다.
멸치볶음과 아삭한 열무김치가 양은 그릇에 수북했다.
"시장하실 텐데 밥부터 배불리 드시고 일 시작합시다."
배병희는 일꾼들의 손에 수저부터 쥐여주었다.
타향 사람이라며 눈치를 보던 일꾼들도 따뜻한 국물에 밥을 말아 넘기며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논두렁에 나란히 걸터앉아 나누는 밥 한술이 닫혀 있던 사람의 마음을 열었다.
배병희는 일꾼들의 품값도 넉넉히 챙겼다.
현금으로 주기보다는 끼니를 대접하고 쌀 현물로 치르는 일이 많았다.
"오늘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일 또 나와 주십시오."
품삯을 받아 든 일꾼들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돌았다.
외지 사람이라며 거리를 두던 목소리도 들판에서 잦아들었다.
배병희의 논에는 언제나 일손이 모였다.
물갈이는 한 해로 끝나지 않았다.
봄마다 민물을 가두어 소금기를 우려내고, 밤마다 물꼬를 터 짠물을 빼내는 날들이 몇 해나 이어졌다.
흙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버석거리며 돋아나던 하얀 소금꽃이 차츰 잦아들었다.
거북등처럼 갈라지던 갯벌 바닥이 물을 머금고 차진 무논으로 길들여졌다.
그해 늦봄, 다시 모를 심은 육만 평 들판에 전에 없던 푸른 빛이 돌았다.
어린 모포기들은 더는 붉게 타죽지 않았다.
흙 속 깊이 잔뿌리를 내린 모들은 거센 갯바람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짙푸른 잎을 틔워내며 들판을 메워 나갔다.
논둑에 서면 벼 포기들이 자라나는 소리가 바람결에 스치는 듯했다.
배병희는 둑길에 멈추어 서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삽자루를 쥐느라 박인 손바닥 굳은살은 두터웠고, 찬 개흙탕물에 튼 발가락은 밤마다 쑤셔왔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육만 평 들판은 더는 메마른 소금밭이 아니었다.
짠물을 털어내고 숨을 쉬기 시작한 기름진 옥토였다.
푸른 벼들이 일렁이는 들판 너머로, 시원한 저녁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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