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태어난 곳과 가족
1936년, 서해의 바람과 물길이 맞닿는 섬 안면도 중장리에서 배병희가 태어났다. 위로 형 둘과 누나 둘을 둔 다섯 남매의 막내였으며,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충청남도 서산군 안면면 중장리였다.
중장리라는 이름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섬의 한복판에 자리 잡았다 하여 붙여졌다. 험준한 산세가 겹겹이 길을 가로막는 대신 완만한 구릉이 파도처럼 이어졌고, 그 낮은 산자락 사이사이로 사람이 일구어 먹고살 만한 땅이 품처럼 놓여 있었다. 사철 푸른 소나무숲의 솔향기와 흙냄새 나는 경작지가 한데 어우러진 섬이었다.
섬의 동쪽과 서쪽은 저마다 전혀 다른 바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해 바깥바다를 마주한 서쪽 해안에는 고운 모래밭과 거센 해풍이 세월을 두고 쌓아 올린 모래언덕이 길게 펼쳐졌다. 반면 천수만을 바라보는 동쪽 해안은 물길이 육지 깊숙이 파고들었다가 다시 내밀기를 되풀이했다. 하루 두 번 썰물이 빠져나가면 얕은 바닷물 아래 숨어 있던 잿빛 펄갯벌이 끝 모르게 드러났고, 밀물이 차오르면 다시 고요히 바닷물 속으로 잠겨 들었다. 달의 숨결을 따라 물에 잠겼다가 맨살을 드러내기를 반복하는 땅에서 어린 배병희의 하루도 함께 움직였다.
섬 밖 육지로 나가려면 반드시 거친 물길을 건너야만 했다. 당시에는 안면도 북쪽 끝과 태안반도를 이어 주는 다리가 없었다. 섬과 뭍 사이의 좁은 해협은 밀물과 썰물이 바뀔 때마다 시퍼런 물살이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곳이었다. 섬 안의 흙길을 걷는 일과 바다 건너 육지로 나가는 일 사이에는 언제나 물때를 살피고 배에 몸을 실어야 하는 무거운 경계가 놓여 있었다.
배병희가 태어난 이듬해인 1937년, 마을에도 오늘날의 안중초등학교로 이어지는 학교가 문을 열었다. 늦게나마 배움터가 하나둘씩 들어서던 시절이었으나, 광복 전 태안 일대에는 중등교육기관이 아예 없었다. 초등학교 문턱을 넘는다 해도 공부를 더 이어 가려면 바다를 건너 타지로 떠나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배병희의 부모는 메마른 밭을 일구어 고구마와 감자를 심었고, 많지 않은 논도 함께 부쳤다. 자유로운 기질을 지녔던 두 형을 대신해 집안의 살림을 일찍부터 거들어야 했던 막내 배병희는 어릴 적부터 부모의 등 뒤를 따라 밭고랑과 논두렁으로 나섰다.
기계의 힘을 빌릴 수 없던 시절의 농사는 흙을 파헤치기 전에 먼저 연장을 손보는 일로 시작됐다. 봄기운이 땅을 녹이고 농사철이 다가오면 헛간에서 쟁기와 쇠스랑을 꺼내 자루를 꼼꼼히 살폈다. 덜컥거리는 이음새를 다시 맞추고 부러지거나 닳아빠진 나무 자루를 새로 깎아 끼워야 비로소 한 해의 흙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거친 나무 자루가 손바닥에 단단히 감겨야만 굳은 땅을 일구는 고된 노동도 이어 갈 수 있었다.
논농사는 봄부터 가을까지 한순간도 사람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못자리에서 정성껏 어린 모를 기르고 나면, 물을 댄 논으로 옮겨 심는 모내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온전히 사람의 손으로 모를 심던 때라 종아리까지 잠기는 차가운 논물에 들어가 허리를 깊숙이 숙인 채 모를 한 포기씩 흙바닥에 꽂았다. 한 집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큰일이어서 마을 사람들은 두레와 품앗이로 서로의 허리와 손을 빌려주었다. 모내기를 마친 뒤에도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논물을 살피고 무성하게 올라오는 피와 잡초를 뽑아내는 김매기가 계속됐다. 벼가 한 뼘씩 자라 이삭을 패기까지 배병희는 부모 곁에서 흙물을 적시며 농사일의 이치를 몸으로 익혔다.
밭작물과 논벼를 함께 돌보는 살림은 사계절의 노동을 더욱 촘촘하게 갈라놓았다. 비탈진 밭을 일구어 김을 매는 일과 논에 물꼬를 트는 일이 저마다 다른 철을 재촉했고, 한 작물을 거두어들이자마자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다음 파종을 준비해야 했다.
그가 자라던 섬의 숲에서는 전쟁에 쓸 물자를 거두어 가는 일도 벌어지고 있었다. 곧게 뻗어 재질이 단단한 안면도의 붉은 소나무는 예부터 귀한 목재로 꼽혔는데,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일본 기업인 아소상점이 임업소를 차리고 숲의 나무를 베어 내며 송진을 긁어모았다. 탄광의 갱목으로 쓸 통나무와 전쟁 물자로 쓸 원료가 섬의 숲에서 끊임없이 실려 나갔다.
1941년 10월의 신문 지면에는 안면도 소나무숲의 송진 채취 현장이 실리기도 했다. 소나무 줄기에 깊은 상처를 내어 받아 낸 끈적한 송진은 항공유와 화학제품, 선박 도료 따위를 만드는 군수용 원료로 쓰였다. 그렇게 섬에서 거두어진 송진은 군산과 인천을 거쳐 멀리 만주까지 팔려 나갔다. 마을을 감싸 안은 나지막한 산과 소나무숲마저 거대한 전쟁 경제의 수레바퀴 아래 놓여 있던 시절이었다.
배병희는 바로 그 어수선하고 팍팍한 시대에 학령기를 맞았다. 가까이 학교가 생겼음에도 그는 초등학교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 또래 아이들이 책보를 메고 학교로 향할 때, 막내였던 그는 부모의 고단한 일손을 덜기 위해 교실 대신 밭고랑과 논둑에 서야 했다. 제때 글과 셈을 마음껏 배우지 못했다는 그 시절의 결핍은 훗날까지도 그의 가슴 한편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1945년 8월, 마침내 해방의 소식이 바다 건너 전해졌을 때에도 배병희는 아직 만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소년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끝자락과 포개어진 유년 시절을 보내며, 그는 낮은 구릉의 소나무숲과 하루 두 번 숨을 쉬는 갯벌, 그리고 부모의 땀방울이 밴 논밭 사이에서 묵묵히 몸을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