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책보 대신 농사

소 쟁기질 사진 정보
Robert · Wikimedia Commons · CC BY 3.0 · 크기·형식·톤 조정1936년, 서해의 바닷바람과 물길이 드나드는 섬 안면도 중장리에서 배병희가 태어났다. 위로 형 둘과 누나 둘을 둔 다섯 남매의 막내였다.
중장리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섬 한복판에 자리 잡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가파른 산이 겹겹이 가로막는 육지 산골과 달리 완만한 구릉이 파도처럼 이어졌고, 그 낮은 산자락 사이사이로 부쳐 먹고살 만한 땅이 조각조각 자리 잡고 있었다. 사철 푸른 소나무숲과 흙냄새 나는 논밭이 나란히 어우러진 섬이었다.
섬의 동쪽과 서쪽은 바닷가 풍경부터 사뭇 달랐다. 서해 먼바다를 마주한 서쪽 해안에는 고운 모래밭과 거센 바닷바람이 오랜 세월 쌓아 올린 모래언덕이 길게 뻗어 있었다. 반면 천수만을 안고 있는 동쪽 해안은 뭍이 깊숙이 들어갔다 나오기를 거듭하며 구불구불 이어졌다. 하루 두 번 썰물이 빠지면 얕은 바닷물 아래 숨어 있던 잿빛 펄갯벌이 끝없이 드러났고, 밀물이 차오르면 다시 고요히 물속에 잠겼다. 물때를 따라 잠겼다 드러나기를 되풀이하는 그 바닷가에서 어린 배병희도 하루하루를 보냈다.
섬 밖 육지로 나가려면 반드시 거친 물길을 건너야 했다. 당시에는 안면도 북쪽 끝과 태안반도를 잇는 다리가 없었다. 섬과 뭍 사이의 좁은 물목은 밀물과 썰물이 바뀔 때마다 시퍼런 물살이 세차게 소용돌이쳤다. 섬 안에서는 흙길을 걸어 다니면 그만이었지만, 바다 건너 육지로 나가려면 언제나 물때를 살피고 배에 몸을 실어야 했다.
배병희의 부모는 메마른 밭을 일구어 고구마와 감자를 심고, 많지 않은 논도 함께 부쳤다. 일찍부터 집안일을 거들어야 했던 막내 배병희는 어릴 적부터 부모를 따라 밭고랑과 논두렁으로 나섰다.
기계의 힘을 빌릴 수 없던 시절에는 땅을 갈기 전에 연장부터 손봐야 했다. 봄기운이 땅을 녹이고 농사철이 다가오면 헛간에서 쟁기와 쇠스랑을 꺼내 자루를 꼼꼼히 살폈다. 헐거워진 이음새를 다시 맞추고 부러지거나 닳은 나무 자루를 새로 깎아 끼워야 한 해 농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나무 자루가 손에 단단히 잡혀야 굳은 땅을 일구는 고된 일도 버텨 낼 수 있었다.
논농사는 봄부터 가을까지 한시도 일손을 놓을 틈이 없었다. 못자리에서 정성껏 어린 모를 기르고 나면 물을 댄 논으로 옮겨 심는 모내기가 이어졌다. 일일이 손으로 모를 심던 때라 종아리까지 빠지는 차가운 논물에 들어가 허리를 깊이 숙인 채 모를 한 포기씩 꽂아야 했다. 한 집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큰일이어서 마을 사람들은 두레와 품앗이로 서로 일손을 보탰다. 모내기를 마친 뒤에도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논물을 살피고 무성하게 올라오는 피와 잡초를 뽑는 김매기가 계속됐다. 벼가 한 뼘씩 자라 이삭이 패기까지 배병희는 부모 곁에서 흙물을 묻히며 농사일을 몸으로 익혔다.
밭농사와 논농사를 함께 짓다 보니 사계절 내내 일거리가 겹쳤다. 비탈진 밭을 일구어 김을 매는 철과 논에 물꼬를 트는 철이 따로 돌아왔고, 한 작물을 거두기가 무섭게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다음 씨앗을 뿌려야 했다.

소나무 송진 사진 정보
국립국어원 · 송진 · CC BY-SA 2.0 KR · 크기·형식·톤 조정그가 자라던 무렵 섬의 숲에서는 전쟁에 쓸 물자를 거두어 가는 일도 벌어지고 있었다. 곧게 자라고 재질이 단단한 안면도 소나무는 예부터 귀한 목재로 꼽혔는데,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일본 기업인 아소상점이 임업소를 차려 놓고 숲의 나무를 베어 내며 송진을 긁어모았다. 탄광 갱목으로 쓸 통나무와 군수용 원료가 섬의 숲에서 끊임없이 실려 나갔다.
1941년 10월 신문에는 안면도 소나무숲의 송진 채취 현장이 실리기도 했다. 소나무 줄기에 깊은 상처를 내어 받아 낸 끈적한 송진은 항공유와 화학제품, 선박 도료 따위를 만드는 군수용 원료로 쓰였다. 그렇게 섬에서 거둔 송진은 군산과 인천을 거쳐 멀리 만주까지 팔려 나갔다. 마을을 둘러싼 나지막한 산과 소나무숲까지 전시 경제에 동원되던 시절이었다.
배병희는 이처럼 어수선하고 팍팍한 시대에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었다. 또래 아이들이 책보를 메고 학교로 향할 때, 막내였던 그는 부모의 고단한 일손을 덜어 드리려 교실 대신 밭고랑과 논둑으로 나가야 했다. 마음껏 배우지 못한 일은 훗날까지도 가슴 한편에 아쉬움으로 남았다.
1945년 8월, 바다 건너 해방 소식이 전해졌을 때에도 배병희는 아직 만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아이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낮은 구릉의 소나무숲과 하루 두 번 물이 드나드는 갯벌, 그리고 부모의 땀방울이 밴 논밭 사이에서 자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