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돌아보며 ​

짙은 정장과 흰 셔츠, 무늬 넥타이 차림으로 잔잔히 미소 짓는 50대 배병희의 얼굴과 어깨
50대 배병희

그가 평생 들판과 정미소에서 억척스럽게 땀을 흘린 바탕에는 언제나 가족이 있었다. 어린 시절 책보 대신 농기구를 잡아야 했던 배병희는, 자신이 겪은 배움의 아쉬움을 자식들에게만큼은 물려주지 않으려 했다.

자녀들이 어렸을 적 안면도에서 또래 아이들이 무명 책보를 메고 국민학교에 다닐 때에도, 그는 큰딸에게는 빨간색, 큰아들에게는 파란색으로 된 ‘충무정신’ 책가방을 마련해 들려 보냈다. 집에서는 바리캉과 가위로 자녀들의 머리를 손수 단정하게 깎아 주었고,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도 자녀들의 입학식과 졸업식 날이면 잊지 않고 학교를 찾아가 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자식들의 성장을 묵묵히 뒷바라지하던 아버지가 집 안팎에서 남매들에게 거듭 들려준 당부가 있었다.

“어디를 가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길에서 어른을 만나면 먼저 인사를 잘해야 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일터를 꾸려 가는 일에서도, 그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만 가리지 말고 두루 품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남겼다.

“내 입맛에 맞는 사람만 골라 대하다 보면 주위에 남는 사람이 없다.”


집 안에서는 말수가 적고 엄한 가장이어서 자녀들이 아버지를 어려워하기도 했지만, 자식들을 아끼는 깊은 속정은 다정한 말보다 일상 속 행동으로 전해졌다. 둘째 아들이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던 날에는 먼저 식사도 하지 않은 채 밥상 앞을 지키고 있었다. 긴 말을 건네는 대신 자식이 무사히 돌아와 마주 앉을 때까지 묵묵히 끼니를 미루며 기다린 것이다. 또 셋째 아들이 학창 시절 명절에 친구들을 데리고 와 인사를 드리면, 배병희는 친구들에게 일일이 용돈을 챙겨 주며 아들의 체면을 든든히 세워 주었다.

자식들에게 다급하거나 힘든 일이 닥쳤을 때 누구보다 먼저 움직인 사람도 언제나 아버지였다. 넷째 아들이 어린 시절 갑자기 심하게 아팠을 때는 급히 차에 태워 병원으로 데려가 밤늦도록 치료를 받게 한 뒤 집으로 데려왔다. 어릴 적 들판과 정미소 일로 바쁜 부모를 기다리며 빈집 마루에 앉아 있곤 했던 작은딸에게도 아버지는 든든한 그늘이었다. 훗날 출가한 작은딸이 시아버지 상을 당해 경황없이 빈소를 지키고 있을 때는, 바쁜 일터를 모두 제쳐 두고 가장 먼저 달려가 말없이 딸의 손을 잡아 주었다.

무뚝뚝한 말투 뒤에 숨겨진 깊은 사랑은 막내아들이 부모가 되었을 때에도 변함이 없었다. 막내아들이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화로 알렸을 때, 배병희는 고된 일과에 지친 목소리로 짧게 축하 인사만 건넸다. 그러나 전화를 끊은 뒤에는 바쁜 정미소 일을 뒤로하고 직접 서울까지 올라가 갓 태어난 손주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안면도 꽃지 앞바다의 두 바위와 갈매기 위로 저무는 해
안면도 꽃지 석양 사진 정보HiHoHo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 크기·형식·톤 조정

세월이 흐르는 사이, 평생 고락을 함께해 온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도 겪었다. 젊은 날 안면도 겨울 바다에서 시린 손으로 김을 씻고 말리던 때부터, 독정리의 넓은 농사와 살림, 일곱 남매의 양육과 노모의 돌봄까지 묵묵히 함께 짊어져 온 반려자였다. 정미소를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의 따뜻한 밥상을 차려 내는 일에도 언제나 아내의 정성 어린 손길이 배어 있었다.

자식들이 모두 자리를 잡은 뒤, 남매들은 평생 가족을 위해 고생만 해 온 아버지를 위해 환갑과 칠순, 팔순 때마다 큰 잔치를 열어 드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배병희는 일곱 남매의 혼사를 치르며 마을 사람들을 이미 여러 차례 불렀다며, 정작 자신을 위한 잔치만큼은 그때마다 크게 벌이는 자리를 한사코 사양했다. 평생 가족과 이웃에게는 따뜻한 밥상을 아낌없이 차려 내면서도, 정작 자신이 대접받는 자리에서는 조용히 한 걸음 물러선 것이다.

거친 갯벌과 간척지 들판을 일구어 대를 잇는 터전을 세우고, 묵묵한 사랑과 성실함으로 온 가족의 든든한 뿌리가 되어 준 한평생이었다.

읽기 설정

글자 크기

줄 간격

서체

화면

배경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