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들에게 넘긴 일터

3억 원의 부도를 넘기고 대형 건조기까지 세워 정미소가 숨을 돌릴 만해졌을 때,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젊은 날 시집와 안면도 개펄에서 남양만 간척지까지 평생 함께 일해 온 사람이었다.
겨울 바닷가에서 대나무 발에 김을 널어 말리던 시절에도, 간척지 들판에서 소금기를 빼내며 칠 남매의 끼니와 학비를 챙기던 때에도 아내는 늘 그의 곁을 지켰다.
마을 정미소를 인수한 뒤로는 날마다 새벽 네 시면 부엌문을 열고 세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마른 솔잎과 참나무 장작을 넣어 가마솥에 고봉밥을 짓고, 집된장을 푼 시래깃국을 끓여 식구들과 직원들의 빈속을 채웠다.
봄철 양식이 떨어진 이웃 아낙이 빈 소쿠리를 끼고 뒤란을 서성이면, 조용히 곳간으로 불러 쌀을 보자기에 퍼 담아 주었다.
밤이 늦어도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불이 꺼지지 않던 부엌이었다.
아내가 떠나자 안채 부엌에는 찬 기운이 내려앉았다.
배병희는 빈 부엌 문턱 앞에 한참 서 있다가도, 날이 밝아오면 작업복을 찾아 입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마당으로 나서면 식은 기계들이 새벽안개 속에 서 있었다.
날이 밝으면 정미소 철문을 열었고, 마당에는 다시 벼를 실은 경운기와 트럭들이 들어섰다.
장성한 아들들도 아버지 곁에서 정미소 일을 나누어 맡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들판과 밥상의 풍경이 달라졌다.
세상이 변하면서 사람들의 식탁에서 쌀밥이 조금씩 밀려났다.
쌀 소비가 해마다 줄자 양곡 창고마다 묵은 벼가 쌓였고, 가을에 거둔 햅쌀도 제값을 받기 어려웠다.
쌀을 많이 찧어내기만 하면 팔리던 시절은 지나가고 있었다.
수도권 양곡 시장에서는 거래처를 뺏기지 않으려는 정미소들 사이에 헐값 경쟁이 벌어졌다.
독정 정미소 사무실로도 아침부터 도매상들의 전화가 걸려 왔다.
"배 사장, 다른 정미소들은 포대당 이천 원씩 값을 더 낮춰서 들어온다는데, 독정리도 단가를 안 맞춰주면 우리도 거래처를 바꿀 수밖에 없소."
수화기를 내려놓은 배병희는 책상 앞에 앉아 수매 장부를 펼쳤다.
장부 갈피마다 독정리와 장안면, 향남 일대 농민들의 이름과 지난가을 맡긴 벼 가마 수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배병희는 돋보기 너머로 이름들을 짚어 내려가며 고개를 저었다.
농민에게 가을 볏값이 어떤 돈인지 배병희는 잘 알았다.
한겨울 연탄값이자 노부모의 약값이었고, 자식들의 등록금이자 이듬해 농사를 지을 밑천이었다.
배병희는 볏값을 깎는 대신 품질이 높이고자 했다.
밥맛 좋은 쌀로 시장에서 제값을 받아야 농민들에게도 제 몫을 돌려줄 수 있었다.

배병희는 마을 농가들을 찾아다니며 밥맛이 좋은 고시히카리와 백진주 같은 품종을 심자고 권했다.
하지만 익숙한 벼만 심어 온 농민들은 선뜻 나서지 못하고 정미소 마당에 모여 걱정했다.
"배 사장, 고시히카리는 키가 웃자라고 줄기가 약해서 태풍이라도 불면 논바닥에 다 쓰러진다더구먼."
"수확량도 여느 벼보다 덜 나온다는데, 농사를 망치면 어찌 감당하겠소."
배병희는 사무실에서 보급종 볍씨 한 줌을 들고나와 마당 한가운데에 섰다.
그는 맨 앞에 선 늙은 농부의 두 손을 끌어당겨 손바닥에 볍씨를 쥐여주었다.
"어르신들, 또 동네 형님 아우님들. 지금은 쌀이 남아도는 세상입니다. 예전처럼 양만 많이 거두어서는 볏값이 깎이는 걸 막을 수 없습니다."
배병희는 농부의 손을 감싸 쥐며 말을 이었다.
"기르기 까다롭더라도 밥맛 좋은 벼를 심어 주십시오. 벼가 쓰러지거나 소출이 예년만 못하더라도, 봄에 약속드린 수매가는 그대로 쳐드리겠습니다."
배병희는 마당에 둘러선 이웃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제가 여러분 볏값을 깎거나 정산 날짜를 어긴 적이 있습니까. 3억 원 부도를 맞았을 때도 논을 팔아 볏값을 치렀습니다. 저를 믿고 올해부터 이 볍씨를 심어 보십시다."
손안의 볍씨를 내려다보던 마을 어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 사장이 빈말 안 하는 사람인 건 이 들판 사람들이 다 알지. 그래, 배 사장 말 믿고 올봄 못자리부터 새로 부어 봅시다."
그날 이후 배병희는 날마다 들길로 나가 농민들과 함께 물길과 작황을 살폈다.
정미소 안에는 저온 저장 창고에 더해, 도정한 쌀의 티끌과 부스러기를 가려내고 포장하는 위생 설비까지 갖추어 나갔다.
수확한 벼가 제값을 받도록 그동안 모은 자금을 설비에 들였다.

2003년, 독정 정미소는 시설과 위생 기준을 통과해 자체 자본으로 조성한 미곡종합처리장(RPC) 승인을 받았다.
1983년 10월 마을 정미소를 인수한 지 스무 해 만이었다.
배병희는 새로 올라간 설비와 창고 앞을 지날 때마다 함께 일해 온 사람들을 떠올렸다.
정산일을 기다려 주고 계약재배에 뜻을 모아준 농민들, 밤샘 작업을 함께한 직원들, 먼저 떠난 아내와 일손을 이어받은 자식들이 함께 세운 일터였다.
2009년에는 화성의 쌀 브랜드인 햇살드리 쌀 5톤을 말레이시아로 처음 수출했다.
출항을 앞둔 컨테이너 트럭이 마당에 멈춰 섰을 때, 배병희는 닫힌 컨테이너 철문을 손바닥으로 짚어 보았다.
열여덟 살 적 보리쌀 몇 되를 바꾸려고 조각배에 장작을 싣고 천수만을 건너던 청년이, 이제는 이웃들과 함께 기른 쌀을 바다 건너로 보내고 있었다.
트럭이 마당을 빠져나간 뒤에도 배병희는 들판 어귀에 서서 신작로를 오래 바라보았다.
세월이 흘러 배병희의 귀밑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가을마다 벼를 실은 트럭들이 줄지어 드나들었다.
정미소 규모가 커진 뒤에도 그의 하루는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마당에 찾아온 농민이나 화물차 기사가 있으면 먼저 따뜻한 밥과 차부터 챙기게 했고, 길에서 만나는 이웃들에게는 늘 먼저 인사를 건넸다.
마을 정미소를 인수한 지 서른 해가 지나자, 곁에서 일을 배운 아들들이 도정과 수매, 판로를 안정되게 이끌어 갔다.
2014년 12월 말, 배병희는 정미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사무실 책상을 정리하던 날, 그는 일터를 이어받을 아들들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내 입맛에 맞는 사람만 골라 대하다 보면 주위에 남는 사람이 없다."
2015년부터는 아들들이 정미소 운영을 이어받았다.
아침 햇살이 비치는 마당으로 나선 배병희는 작업복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걸음을 멈추었다.
건조탑과 도정실에서는 묵직한 기계 소리가 고르게 울려 나왔고, 마당에는 분주히 움직이는 아들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평생 땀으로 일구어 온 일터였다. 그 삶의 무게가, 이제 아들들의 든든한 어깨 위에서 흔들림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