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밥상 (에필로그) ​

늦은 밤 손대지 않은 밥상 앞에 홀로 앉아 자식을 기다리는 배병희
독정리와 남양황라 들녘, 가족과 이웃의 기억

정미소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어느 늦은 밤이었다.

온종일 바깥일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돌아온 자식이 조심스레 안채 방문을 열었다.

식구들이 모두 깊이 잠든 시각이라, 아버지 역시 진작 저녁을 마치고 자리에 누웠을 줄 알았다.

그러나 방 안에는 배병희가 홀로 작은 소반 앞에 앉아 있었다.

소반 위에는 아직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밥그릇과 반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문간에 멈춰 선 자식이 목이 멘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 여태 저녁도 안 드시고 절 기다리신 겁니까?"

"일하느라 속 비었을 텐데, 식기 전에 어서 먹어라."

자식이 밥상 앞에 마주 앉아 따뜻한 밥을 한술 떴다.


늦은 밤 소반 앞에서 식사하는 자식을 지켜보는 배병희

배병희는 자식이 허겁지겁 속을 채우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멀찍이 놓인 반찬 접시를 슬그머니 자식 쪽으로 밀어주었다.

평소에는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네는 법 없는 무뚝뚝한 아버지였지만, 늦은 밤 밥상 앞에서 마주한 그 침묵은 갓 지은 밥그릇의 온기처럼 깊고 따뜻했다.


집 안에서는 과묵하고 엄해 아버지를 어려워하던 자식들이었지만, 바깥사람들과 이웃들이 아버지를 왜 그토록 깊이 믿고 따르는지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배병희는 정미소를 찾아오는 손님이든 일하러 온 인부든, 누구 하나 빈속으로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따뜻한 밥상부터 차려 내어 든든히 먹인 뒤에야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구들과 일꾼들의 끼니를 도맡았던 아내 또한 그 마음을 닮아, 곳간의 쌀이 모자란 이웃이 있으면 조용히 뒤안에서 쌀을 퍼다 나누어주곤 했다.

동네 길에서 이웃의 경운기나 화물차가 도랑에 빠지면, 가장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 나가 흙투성이가 된 채 건져 올리던 사람도 그였다.

마을 사람들은 살림살이에 막막하고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배병희를 찾아와 의논했고, 그는 당장 일거리가 없는 주민들에게 정미소 일을 맡겨 스스로 살림을 꾸려 갈 수 있게 도왔다.


소박한 밥상 앞에서 큰 잔치를 사양하는 배병희

세월이 흘러 살림이 안정을 찾고 자식들이 모두 장성하자, 남매들은 아버지의 환갑과 칠순, 팔순이 돌아올 때마다 동네 사람들을 모시고 큰 잔치를 열어드리고 싶어 했다.

평생을 갯벌과 간척지 들판, 뿌연 정미소 먼지 속에서 뼈가 닳도록 일하며 자신들을 길러낸 아버지에게 올리고 싶은 마땅한 도리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배병희는 손사래를 치며 한사코 잔치를 마다했다.

칠 남매를 혼인시키며 이미 동네 사람들을 여러 번 불러 신세를 졌는데, 자신의 생일잔치로 이웃들에게 다시 발걸음을 하게 하고 부담을 지울 수는 없다는 고집이었다.

자식과 이웃에게는 평생 아낌없이 밥상을 차려 내면서도, 정작 자신을 드러내고 대접받는 자리에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던 아버지였다.


논두렁에서 손바닥 위에 얹은 벼 이삭

동이 트자 남양황라 들녘으로 눈부신 가을 햇살이 번져 나갔다.

바다에서 불어온 아침 갯바람에 누렇게 여문 벼 이삭들이 기분 좋게 서걱거렸다.

조용히 들길로 나선 배병희는 논두렁 앞에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굽혔다.

고개 숙인 벼 이삭 하나를 조심스레 끌어당겨, 굳은살 박인 거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봄부터 가을까지 바닷바람과 비바람, 따가운 뙤약볕을 온몸으로 견뎌낸 낟알들이 손바닥을 묵직하게 채웠다.

어린 날 안면도의 거친 개펄에서 시작해 남양만 간척지를 옥토로 일구기까지, 평생 흙과 땀으로 살아온 세월이 그 손바닥 위에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었다.

배병희는 알알이 찬 이삭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평생 자식들과 이웃에게 건네온 말을 나직이 되뇌었다.

"사람을 오늘만 보고 내일은 안 볼 것처럼 대하지 마라."

벼 한 톨의 무게를 알고 사람 사이의 믿음을 지켰던 그의 한평생이, 남겨진 이들의 가슴속에 따뜻한 밥상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가을바람이 하얗게 센 그의 귀밑머리를 스치며 광활한 들판을 지나갔다.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남양만 들녘에서, 평생 가족과 이웃을 품었던 그의 삶처럼 벼 이삭들이 깊고 겸허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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