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자리 숫자 ​

두 형이 봇짐을 꾸리고 부모가 이별을 앞둔 여름집
1950년 6·25 전쟁기, 안면도

바다 건너 뭍에서 둔탁한 포성이 낮게 울려왔다.

1950년 여름, 외딴섬 안면도에도 전쟁의 불길이 들이닥쳤다.

중장리 마을 어귀로 군용 트럭이 누런 흙먼지를 일으키며 들어섰고, 젊은 사내들의 이름이 적힌 징집 영장이 집집마다 떨어졌다.

집안의 든든한 기둥이던 맏형과 둘째 형의 이름도 그 누런 종이 위에 나란히 적혀 있었다.

어머니는 툇마루에 주저앉아 해진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는 불 꺼진 곰방대를 입에 문 채 검푸른 먼바다만 묵묵히 바라보았다.

건장하던 두 형은 말없이 낡은 무명 보자기에 옷가지 몇 벌을 싸서 봇짐을 꾸렸다.


선창가에서 군번을 일러주며 막내의 손을 잡는 형

포구 선창가 갯벌에는 징집된 장정들을 실어 나를 군용 목선이 닿아 있었다.

배에 오르기 직전, 둘째 형이 배병희의 손목을 덥석 잡아끌었다.

열다섯 살 막내의 야윈 어깨를 움켜쥔 형의 손아귀에 굵은 힘이 실렸다.

"막내야, 내 말 똑똑히 들어라."

둘째 형은 어수선한 선창가 주변을 한 번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낯선 숫자들을 일렀다.

"내 군번이다. 일곱 자리다. 네 머릿속에 꼭 새겨둬라."

형은 일곱 자리 숫자를 하나하나 또박또박 다시 짚어 주었다.

"큰형이랑 내가 살아서 돌아올 때까지 부모님 모시고 집안 잘 지키고 있어라."

목선이 길고 날카로운 기적을 울리며 포구를 벗어났다.

흙탕물이 일렁이는 바다 위로 형들의 뒷모습이 점처럼 멀어지자 선창가 여기저기서 통곡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배병희는 울지 않았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형이 남기고 간 일곱 자리 숫자를 입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두 형이 빠져나간 집안에는 기력이 쇠한 노부모와 누나들, 그리고 열다섯 살 배병희만 남았다.

소년은 하루아침에 대식구의 생계를 짊어진 가장이 되었다.

포성과 총소리는 바다 건너 아득한 곳의 일이었으나, 굶주림은 당장 문턱을 넘어오고 있었다.

초여름 뙤약볕이 비탈진 황토밭을 내리쬐었다.

들판의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여문 알곡을 머금은 보리 이삭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바닥으로 낟알을 쏟아낼 기세였다.

코앞으로 다가온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보리를 베어 들이지 못하면 당장 식솔들의 끼니가 끊길 판이었다.

그러나 마을 어디에도 빌릴 일손이 없었다.

젊은 사내들은 모조리 전선으로 끌려갔고, 소달구지 하나 구하기 어려웠다.

배병희는 새벽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에 벼린 낫을 들고 보리밭으로 내달렸다.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들도 굽은 허리를 펴지 못하고 밭고랑을 기며 보리를 베고 단을 묶었다.

베어낸 보릿단이 고랑마다 수북하게 쌓여 갔지만, 정작 그 무거운 단들을 집 마당까지 져 나르는 일은 오롯이 열다섯 소년의 어깨에 달렸다.

소년은 제 키의 두 배가 넘도록 보릿단을 지게 위에 차곡차곡 얹었다.

새끼줄을 단단히 동여매고 지겟작대기를 짚어 일어서는 순간, 무릎관절이 시큰하게 꺾였다.

거친 짚 멜빵이 어깨 살갗을 파고들며 뼈를 짓눌렀다.

배병희는 이마에서 쏟아지는 땀방울로 눈이 따가워도 손등으로 훔칠 겨를조차 없이 비탈길을 오르내렸다.

등줄기를 타고 흐른 땀이 헤진 바지춤을 흥건히 적셨다.

밭의 보릿단을 마당으로 모두 져 나르는 데만 꼬박 며칠이 걸렸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타작을 시작해야 했다.

배병희는 마당 한가운데에 거친 멍석을 넓게 폈다.

헛간 구석에서 아버지가 쓰던 참나무 도리깨를 꺼내 들었다.

긴 자루 끝에 가죽 끈으로 굵은 쪽나무 회초리 세 가닥을 엮어 매단 묵직한 농기구였다.


세 가닥 휘추리 도리깨로 보리를 타작하는 열다섯 살 배병희

정오의 햇살이 황토 마당을 하얗게 달구었다.

누나들이 멍석 위에 보릿단을 가지런히 펴 놓자, 배병희가 그 앞에 발을 벌리고 섰다.

소년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어른 키보다 긴 도리깨 자루를 머리 위로 힘껏 치켜올렸다.

도리깨꼭지가 허공에서 큰 원을 그리며 돌아갔다.

가죽 끈에 매달린 쪽나무가 누런 보리 이삭 위로 무겁게 내리꽂혔다.

퍽!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마당 가득 메마른 흙먼지와 보리 까끄라기가 뿌옇게 솟구쳐 올랐다.

바람을 탄 까끄라기는 땀에 흠뻑 젖은 소년의 목덜미와 적삼 속으로 파고들었다.

보리 까끄라기는 바늘처럼 가늘고 억셌다.

따가워서 손으로 문지를수록 까끄라기가 옷깃 틈을 비집고 살갗 깊숙이 박혀 들었다.

소금기 밴 땀방울이 그 위로 스며들자 목덜미와 등줄기가 불에 덴 듯 쓰라렸다.

살갗이 벌겋게 짓무르고 진물이 배어 나왔다.

거친 참나무 자루를 쥐고 수백 번씩 내리치다 보니 손바닥 안쪽에 굵은 물집이 잡혔다.

이내 물집이 터지고 껍질마저 허옇게 벗겨지며 피가 배어 나왔다.

도리깨 자루가 피와 땀으로 미끄러워지면, 소년은 마당의 마른 흙에 두 손을 비벼 물기를 닦아내고는 다시 자루를 움켜쥐었다.

보릿단을 나르던 어머니가 소년의 피 묻은 손을 보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머니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배병희의 팔목을 붙잡았다.

"병희야, 제발 그만해라. 손바닥 살갗이 다 벗겨졌다."

옆에서 검불을 갈퀴로 긁어모으던 누나도 도리깨 자루를 붙들었다.

"막내야, 오늘 그만하고 내일 쉬엄쉬엄 털자."

배병희는 도리깨 자루를 품에 안듯 움켜쥐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퉁퉁 부어올라 주먹조차 제대로 쥐어지지 않았다.

"어머니, 지금 안 털면 장맛비에 보리가 다 썩어요. 날 맑을 때 다 털어서 독에 넣어야 올겨울에 식구들이 굶지 않아요."

배병희는 흐르는 땀을 어깨로 문질러 닦고는 다시 멍석 앞으로 돌아섰다.

소년의 도리깨질이 다시 시작되었다.

어깻죽지가 찢어지는 듯 쑤시고 턱끝까지 거친 숨이 차올랐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싶은 순간마다 소년은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도리깨를 머리 위로 치켜들 때 첫째 자리.

허공에서 자루를 크게 돌릴 때 둘째 자리.

멍석 바닥을 향해 내리꽂을 때 셋째 자리.

배병희는 도리깨를 내리칠 때마다 선창가에서 둘째 형이 귓속말로 일러준 일곱 자리 군번을 입속으로 또박또박 읊었다.

첫 숫자부터 일곱 번째 숫자까지, 형의 군번을 한 바퀴 다 외우며 내리치면 비로소 보릿단 한 묶음의 낟알이 말끔히 털려 나갔다.

포탄이 빗발치는 싸움터에서 목숨을 걸고 있을 형들을 생각하면, 이깟 까끄라기와 물집 따위에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해가 저물어 밤이 되면 온몸의 뼈마디가 쑤셔 숟가락조차 들지 못했다.

열 손가락은 도리깨 자루를 쥔 모양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펴지지 않았다.

얇은 홑청 이불이 스치기만 해도 까끄라기에 짓무른 등판이 타들어 가듯 아팠다.


밤 등잔불 아래 타작으로 터진 열다섯 살 배병희의 손을 무명천으로 감싸는 어머니

어머니는 소년의 터진 손바닥에 된장을 발라주고 깨끗한 무명천을 감아주었다.

소년은 욱신거리는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아 쥐고,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다시 형의 일곱 자리 숫자를 소리 없이 외웠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소년은 문틈 너머 마당에 비스듬히 누운 도리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의 맨몸으로만 버텨내는 노동에는 끝이 없었다.

'언젠가 내 손으로 기계를 들여와 이 타작을 단숨에 끝내고 말리라.'

타작은 꼬박 한 달 동안 이어졌다.

부모님과 누나들이 보릿단을 나르고 이삭을 줍는 동안, 소년은 홀로 수천 번, 수만 번 도리깨를 휘둘러 마당 가득 쌓였던 보릿단을 모두 털어냈다.

마침내 한 달째 되던 날 오후, 마지막 보릿단이 멍석 위에서 털려 나갔다.

배병희는 마당 한가운데에 서서 커다란 고리버들 키를 높이 들었다.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 보고 능숙하게 키질을 하자, 가벼운 검불과 빈 껍질이 허공으로 흩날려 날아갔다.

멍석 바닥에는 단단하고 묵직한 황갈색 보리 알곡만이 황금처럼 소복하게 쌓였다.


세 가닥 도리깨를 내려놓고 타작 뒤 상처 난 손을 살피는 소년

어느새 배병희의 손바닥에는 도리깨 자루 모양 그대로 돌처럼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물집이 터지고 아문 자리마다 거뭇한 흉터가 겹겹이 내려앉았다.

어깨뼈는 어른처럼 굵어졌고, 소년의 눈빛도 한층 깊고 단단해져 있었다.

하지만 털어낸 보리 알곡도 긴 겨울을 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바다 건너의 포성은 멎을 줄 몰랐고, 해가 바뀌어 초봄의 찬 바람이 불어오자 뒤주 바닥은 다시 허옇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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