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만의 돌풍 ​

초봄 빈 뒤주와 멀건 죽이 놓인 집안
1950년대 중후반, 천수만~광천

초봄의 바닷바람은 동지섣달 못지않게 살을 에는 듯 매서웠다.

전쟁의 포성이 멈춘 뒤에도 외딴 섬마을의 봄은 유난히 모질고 길었다.

지난가을 거둔 곡식은 진작 바닥을 드러냈고, 빈 뒤주 밑바닥을 아무리 긁어보아도 쌀 한 톨 나오지 않았다.

고샅길마다 보릿고개를 넘는 마을 사람들의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식구들은 갯가 언덕에서 뜯어 온 칠면초와 여린 쑥에 보릿겨를 풀어 멀건 죽을 끓였다.

김이 피어오르는 무쇠솥 뚜껑을 여는 어머니의 야윈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열여덟 살이 된 배병희는 여전히 집안의 가장 노릇을 도맡고 있었다.

징집되어 떠난 두 형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터라, 집에 남은 노부모와 누나들의 끼니가 오롯이 그의 두 손에 달려 있었다.

겨우내 온 마을 사람들이 훑고 지나간 갯벌에는 굴과 조개조차 씨가 말라갔다.

살길을 찾아 헤매던 청년의 눈에 마을 뒤편의 울창한 야산이 들어왔다.

안면도 산자락에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바다 건너 홍성과 광천 일대의 사정은 달랐다.

나무를 베어 써버린 민둥산이 많아 아궁이에 지필 땔감이 늘 귀했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 장작을 패서 바다 건너 장터에 내다 팔면, 당장 식구들이 주린 배를 채울 보리쌀로 바꿀 수 있었다.

배병희는 날이 밝기도 전에 무딘 톱날을 줄칼로 벼리고 도끼를 챙겨 뒷산으로 올랐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서 서산으로 기울 때까지 가파른 비탈을 오르내리며 단단한 참나무를 베어 넘겼다.

손바닥의 터진 물집 위로 끈적한 송진과 톱밥이 엉겨 붙으며 살갗이 돌덩이처럼 굳어갔다.

사나흘 동안 피땀을 쏟자 포구 선창가에 잘 다듬은 장작더미가 산처럼 쌓였다.

물가에는 낡은 목선 한 척이 밧줄에 매여 출렁이고 있었다.

발동기도 돛도 없이 오직 사내의 두 팔과 노 하나에 의지해야 하는 작은 거룻배였다.


포구의 낮은 목선 안으로 땔나무 묶음을 양손으로 받쳐 싣는 청년

배병희는 무거운 장작단을 지게로 날라 배 밑바닥부터 빈틈없이 차곡차곡 실었다.

한 단이라도 더 실어야 보리 한 됫박이라도 더 바꿀 수 있었기에 나무를 쉽게 남겨둘 수 없었다.

장작더미가 배 한가운데에 수북하게 쌓일수록 목선은 무겁게 가라앉아, 뱃전이 수면 위로 한 뼘도 채 남지 않았다.

조금만 거센 물결이 들이쳐도 바닷물이 뱃전을 넘어 들어올 판이었다.

배를 몰아 건너가야 할 곳은 천수만 너머 충남 광천의 옹암포구였다.

그곳 장터에 장작을 부리기만 하면 식구들이 한 달은 넉넉히 버틸 곡식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수만은 평생 물길을 타온 늙은 뱃사람들도 혀를 내두르는 거친 바다였다.

조수간만의 차가 유독 크고 물목이 좁아, 밀물과 썰물이 뒤바뀔 때면 바다 한복판에서 시커먼 소용돌이가 일곤 했다.

배병희는 포구 끝에 서서 어두운 수면을 노려보며 물때를 가늠했다.

거센 조류가 잠시 숨을 고르는 물돌이 틈을 타야만 노를 저어 건널 수 있었다.

이윽고 동녘 하늘이 희미하게 트기 시작할 무렵, 청년은 닻줄을 풀었다.

굵은 통나무 노채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갯바닥을 힘껏 밀어내자, 장작을 가득 실은 목선이 묵직하게 물길 위로 미끄러져 나갔다.

끼이익, 철썩. 끼이익, 철썩.

노를 저어 물을 밀어낼 때마다 청년의 어깨와 허리 근육이 밧줄처럼 팽팽하게 곤두섰다.

작은 목선은 산더미 같은 나뭇짐을 이고 느릿느릿 천수만의 깊은 물살을 갈랐다.


수채화로 그린 돌풍 속에서 땔나무를 실은 목선의 노를 젓는 청년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렀을 때였다.

멀쩡하던 하늘이 순식간에 먹장구름으로 뒤덮였다.

서북쪽 수평선 너머에서 시커먼 비구름이 몰려오더니, 대낮인데도 사방이 한밤중처럼 잿빛으로 어두워졌다.

비릿한 짠내와 함께 거센 돌풍이 바다 위로 내리꽂혔다.

사납게 불어닥친 바람이 좁은 해협을 휘감아 돌며 집채만 한 너울을 일으켜 세웠다.

쿵!

둔탁한 굉음과 함께 시커먼 파도가 목선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차가운 바닷물이 뱃전을 넘어 쏟아져 들어오며 배가 한쪽으로 위태롭게 기울었다.

돌풍은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몰아쳤다.

높이 쌓아 올린 마른 장작단들이 들이치는 바닷물을 무섭게 빨아들였다.

물을 잔뜩 머금어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나뭇짐 때문에 뱃전이 수면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잠겨 들었다.

새끼줄마저 느슨하게 풀리며 장작더미가 왼쪽으로 쏠렸다.

배 밑바닥에 고인 바닷물이 정강이까지 차올랐다.

파도가 한 번만 더 덮치면 그대로 배가 뒤집힐 판이었다.

성난 물결이 노채를 거칠게 낚아채며 배병희의 두 손목을 비틀었다.

얼음장 같은 물보라가 뺨과 눈두덩을 후려쳐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사방은 하얀 거품을 물고 솟구치는 물벽뿐이었고, 도와줄 배 한 척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였다.

턱끝까지 거친 숨이 차올랐다.

여기서 노를 놓치면 끝이었다.

아득해지는 정신 사이로 집에 남아 있을 식구들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툇마루 끝에 앉아 포구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부모님의 굽은 등판, 멀건 쑥죽 한 사발을 나누어 마시며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을 누나들.

배병희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청년은 긴 노를 겨드랑이 밑에 단단히 끼워 고정하고는 물이 차오른 배 밑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한 손으로는 흔들리는 뱃전을 움켜잡고, 다른 손으로는 나무 바가지를 쥐어 배 밑바닥의 물을 쉴 새 없이 퍼냈다.

허리 한 번 펴지 못한 채, 헐거워진 새끼줄 끝을 이빨로 물어 당기며 쏠린 장작더미를 다시 꽁꽁 동여맸다.

거친 새끼줄에 손끝이 베여 피가 배어 나왔지만 쓰라린 줄도 몰랐다.

가까스로 나뭇짐의 중심을 바로잡자, 뒤집힐 듯 요동치던 목선이 간신히 수평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대로 광천 포구 쪽으로 나아가다가는 정면에서 몰아치는 역풍에 휘말려 꼼짝없이 가라앉을 게 뻔했다.

배병희는 쏟아지는 물보라 너머를 매섭게 훑었다.

솟구치는 파도 마루 사이로 멀리 무인도 죽도(竹島)의 시커먼 바위 절벽이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에는 물밑 암초가 험해 배들이 피해 다니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목숨을 건질 유일한 피난처였다.

배병희는 다시 노채를 양손으로 굳게 움켜쥐었다.

거센 파도를 정면으로 맞받지 않고, 물결의 결을 비스듬히 타넘으며 죽도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노채 하나에 온 체중을 실었다.

끼이익, 우지직!

사나운 조류에 맞선 통나무 노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활처럼 휘어졌다.

어깨관절이 빠져나갈 듯 쑤셨고, 갈라진 손바닥 생살에서 흘러나온 피가 짠물에 씻기며 노채를 붉게 물들였다.

배병희는 오직 눈앞의 검은 바위벽만을 쏘아보며 사력을 다해 물살을 갈랐다.


수채화로 그린 죽도 갯바위에 닿아 젖은 목선을 묶고 숨을 고르는 청년 배병희

마침내 목선이 죽도의 거친 암벽 아래에 다다랐다.

쿵.

뱃머리가 바위턱에 얹히는 순간, 배병희는 굵은 닻줄을 낚아채고 얼음 같은 바닷물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내렸다.

시린 바닷물이 단숨에 가슴팍까지 차올랐다.

청년은 바위에 다닥다닥 붙은 날카로운 굴 껍데기를 맨발과 무릎으로 딛고 기어올랐다.

정강이와 손바닥이 굴 껍데기에 베여 피가 흘렀으나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배병희는 온몸의 힘을 다해 닻줄을 끌어당겨 바위틈의 굵은 돌부리에 몇 겹으로 단단히 동여맸다.

바닷물을 머금은 장작더미와 목선이 거센 파도 속에서도 바위벽에 억세게 붙들렸다.

그제야 턱끝에서 쇳소리 섞인 거친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배병희는 차갑고 축축한 갯바위를 두 팔로 끌어안은 채 그대로 바위 바닥에 엎드렸다.


죽도 바위벽 아래서 목선의 닻줄을 확인하며 밤을 버티는 청년

파도가 바위를 삼킬 듯 부서지는 사이, 바다 위로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사람 흔적 하나 없는 무인도의 밤은 지독하게 추웠다.

살을 에는 칼바람이 바위틈을 헤집고 들어와 바닷물에 흠뻑 젖은 무명옷을 갑옷처럼 꽁꽁 얼려버렸다.

웅크린 몸을 바람이 덜 닿는 바위벽에 바짝 붙였다.

파랗게 질린 입술과 턱이 덜덜 떨려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밤새 그치지 않았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 끝에 정신이 아득해지며 졸음이 쏟아질 때마다, 배병희는 언 주먹으로 제 허벅지를 내리쳤다.

청년은 그렇게 뜬눈으로 칠흑 같은 밤을 지새웠다.

긴 밤이 물러가고 동쪽 수평선 너머로 희미한 새벽빛이 번져왔다.

밤새 바다를 뒤집어놓던 돌풍이 거짓말처럼 멎어들고, 성났던 천수만의 물결도 잔잔하게 숨을 죽였다.

배병희는 돌처럼 뻣뻣하게 굳은 무릎을 짚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바위 아래 매여 있는 목선은 그대로였다.

장작도 한 단 떠내려가지 않았다.

청년은 언 손으로 닻줄을 풀고 배에 올라타, 잔잔해진 물길을 따라 안면도 포구로 뱃머리를 돌렸다.

아침 안개가 깔린 중장리 포구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초조하게 바다를 내다보고 있었다.

간밤의 사나운 돌풍에 작은 거룻배가 성히 돌아오지 못했을 거라 여긴 터였다.

그때 안개를 뚫고 배병희의 목선이 모습을 드러내자, 선창가에서 밤을 지새우던 어머니가 버선발로 갯벌을 내달려 나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배병희는 모래톱에 배를 대고 묵묵히 닻을 내렸다.

그저 빳빳하게 말라붙은 옷깃의 하얀 소금기를 툭툭 털어낼 뿐이었다.

"바람이 좀 거칠어서 죽도 바위틈에 배를 대고 기다렸다 왔습니다."


폭풍을 견디고 귀가한 청년이 어머니 곁에서 뜨거운 숭늉 사발을 두 손으로 받쳐 마시는 아침

그길로 집에 돌아간 배병희는 어머니가 부엌 아궁이에서 급히 데워 내민 뜨거운 숭늉 한 사발을 두 손으로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구수하고 뜨거운 온기가 밤새 얼어붙었던 오장육부를 녹이며 내려갔다.

방 아랫목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인 청년은 해가 중천에 오르자마자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굴 껍데기에 베인 손바닥에 무명천을 질끈 동여매고 지게를 짊어졌다.

포구로 나가 바닷물에 젖은 장작을 하나도 남김없이 퍼 날라 양지바른 언덕에 펼쳐 말렸다.

바짝 말린 그 장작을 다음 물때에 실어 내어 식구들이 먹을 보리쌀로 바꾸어 왔다.

몇 해 뒤, 전선으로 떠났던 두 형이 마침내 살아서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장정 셋이 다시 모였으나 좁고 메마른 비탈밭만으로는 대식구가 보릿고개를 면할 길이 없었다.

거친 바다에 조각배를 띄워 목숨을 걸지 않고도, 온 식구가 발 뻗고 쌀밥을 먹을 수 있는 번듯한 농토가 절실했다.

어느 날, 지게를 지고 마을 어귀를 지나 갯가로 내려서던 배병희의 발걸음이 문득 멈추었다.

썰물이 빠져나간 드넓은 회색 갯벌 저편에, 이끼 낀 거대한 돌무더기와 끊어진 흙벽이 길게 누워 있었다.

일제가 패망하며 공사를 멈춘 채 십수 년째 파도에 씻기며 버려져 있던 옛 방조제 터였다.

끊어진 둑 너머의 광활한 갯벌을 응시하는 청년 배병희의 두 눈이 서해의 저녁 바람 속에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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