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둑을 막다 ​

보리밥과 시래기죽이 놓인 소박한 밥상과 부자의 손
1960년대 초, 안면도 갯가

전선에서 돌아온 두 형까지 다시 한집에 모였으나 안면도 중장리의 살림살이는 여전히 팍팍했다.

비탈진 황토밭에 감자와 보리를 심고 썰물마다 갯벌을 훑어도 대식구의 끼니를 잇기란 늘 빠듯했다.

남의 논을 소작으로 얻어 부쳐봤자 가을 타작이 끝나면 도지로 절반 넘게 떼어주어야 했다.

밥상 위에는 늘 거친 보리밥이나 멀건 시래기죽이 올랐고, 하얀 쌀밥을 배불리 먹어보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청년 배병희는 날마다 새벽이면 낫과 지게를 챙겨 집을 나섰다.

산에서 땔나무를 베어 나르고 돌밭을 일구었지만,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씨를 뿌려 거둘 수 있는 우리 집 논을 일구고 싶었다.

중장리 남쪽 갯가에는 끝 간 데 없는 회색빛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하루 두 번 썰물이 질 때마다 바다는 아득히 물러나며 광활하고 질척한 뻘밭을 드러냈다.


큰 옛 방조제의 끊어진 물목과 남은 석축을 살피는 아버지와 청년 배병희

바람에 서걱거리는 갈대가 우거진 갯골 어귀에는 거대한 돌무더기가 길게 누워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기, 바다를 막아 농토를 만들려다 내버려 둔 옛 방조제 터였다.

완공을 코앞에 두고 일제가 패망하자 공사는 그대로 멈추어 버렸다.

십수 년 세월 동안 거센 파도에 씻기며 둑의 허리는 뭉텅 끊어져 나갔지만, 개흙 바닥에 박힌 기초 석축만큼은 여전히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갯가로 나온 아버지가 끊어진 옛 둑 터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맨바닥 생뻘을 새로 막는 건 어림없어도, 저 옛 둑의 돌뿌리를 물고 들어가면 바닷물을 돌려세울 수 있겠다."

아버지는 곰방대 재를 돌부리에 툭툭 털며 나직이 말했다.

하루 두 번씩 밀려드는 서해의 바닷물을 맨손과 지게로 막아서는 일은 험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옆에 선 배병희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막아봅시다, 아버지.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아버지가 뜻을 세우자 장성한 세 아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맏형과 둘째 형, 그리고 막내 배병희가 지게와 쇠스랑, 가래를 둘러멨다.

그러나 아무리 장정 셋이 매달린다 해도 가족의 힘만으로는 갯골을 메울 수 없었다.

배병희는 마을을 돌며 이웃 장정들과 어르신들을 찾아갔다.

그의 말을 믿고 괭이와 삽을 든 마을 장정들이 갯가로 모여들었다.

썰물이 빠져나가자 사내들은 일제히 갯벌로 뛰어들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시커먼 개흙 속으로 정강이가 푹푹 빠져들었다.

진뻘에서 발을 뽑아 옮길 때마다 쩍쩍거리는 둔탁한 소리가 갯벌을 울렸다.

배병희는 야산에서 캐낸 큼직한 잡석과 찰진 황토를 지게 가득 얹었다.

거친 짚 멜빵이 어깨뼈를 짓눌렀지만 가쁜 숨을 삼키며 갯골로 향했다.

소달구지가 갯가 초입까지 돌무더기를 실어 나르면, 형들과 마을 일꾼들이 지게로 나누어 지고 끊어진 둑 허리로 날랐다.

찬 바닷바람 속에서도 사내들의 등줄기마다 땀이 흘러 하얀 소금기가 버석거렸다.

그저 흙과 돌만 쏟아부어서는 밀려드는 조류를 당해낼 수 없었다.

배병희는 빈 가마니마다 황토를 단단히 채워 넣고, 산에서 베어 온 억센 솔가지와 억새풀을 촘촘하게 엮었다.

바닥에 큰 돌과 흙가마니를 쌓고 그 위에 솔가지를 덮어, 물살에 흙이 쓸려 나가지 않도록 차곡차곡 틀을 잡았다.

날이 갈수록 끊어졌던 둑의 양쪽 끝이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

가장 위태로운 고비는 마지막 남은 물목이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숨통이 좁아질수록, 그 틈을 비집고 흐르는 물살은 폭포수처럼 거세졌다.


밀물에 첫 둑의 돌과 흙가마니가 무너지고 물목에서 물러서는 일꾼들

밀물이 거세게 차오르던 어느 날 오후였다.

좁아진 물목으로 시커먼 바닷물이 소용돌이치며 들이닥쳤다.

성난 물살이 갓 쌓아 올린 둑의 옆구리를 세차게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아래쪽 흙가마니가 터져 나가더니, 그 위에 얹힌 잡석들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장정 여럿이 힘겹게 굴려 놓은 바윗덩이마저 누런 흙탕물 속으로 힘없이 굴러떨어지며 자취를 감추었다.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둑 허리가 다시 뻥 뚫렸다.

쓸려 내려가는 가마니를 붙잡으려던 일꾼들이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저 험한 물살을 보게! 바윗덩이도 쓸려 내려가는데 사람 손으로 어찌 막는단 말이여!"

망연자실한 일꾼들 사이에서 탄식과 술렁임이 터져 나왔다.

배병희는 흙탕물이 튀는 무너진 둑 끝에 우뚝 서 있었다.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한 채 소용돌이치는 시커먼 물목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삽자루를 쥔 그의 굵은 손등 위로 시퍼런 힘줄이 불거졌다.

힘으로만 밀어붙여서는 저 거대한 바다를 이길 수 없었다.

배병희는 머릿속으로 달의 모양과 물때를 빠르게 짚어 내려갔다.

사나흘 뒤면 한 달 중 바닷물의 흐름이 가장 느려지고 수위 차가 적어지는 '조금' 물때였다.

"아버지, 형님들. 아직 포기하긴 이릅니다."

배병희가 흙탕물 묻은 얼굴을 들어 아버지와 일꾼들을 돌아보았다.

"사나흘 뒤면 물살이 죽는 조금 물때입니다.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맨바닥에 돌부터 부을 게 아니라 갯벌 깊숙이 나무 말뚝을 촘촘히 박아 뼈대부터 세워야 합니다."

막내의 말에, 굳은 얼굴로 물목을 내려다보던 아버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맏형도 손에 쥔 괭이를 고쳐 잡으며 힘을 실었다.

"병희 말이 맞다. 뼈대가 버텨줘야 흙가마니가 쓸려 가지 않지. 당장 산으로 가자!"

그날부터 삼 형제와 장정들은 뒷산으로 올라가 아름드리 참나무와 소나무를 베어 내렸다.

어른 허벅지만 한 통나무 수십 개를 다듬어 끝을 창날처럼 뾰족하게 깎고, 바닷물에 쉬 삭지 않도록 굵은 새끼줄을 단단히 꼬았다.

마침내 조금 물때의 첫날, 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간조 시간이 찾아왔다.

배병희는 묵직한 참나무 말뚝과 무쇠 메를 어깨에 메고 제일 먼저 개흙 속으로 뛰어들었다.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차가운 흙탕물 속에서 물목 한가운데에 말뚝을 곧추세웠다.

"형님, 흔들리지 않게 꽉 붙드십시오!"

둘째 형이 진흙탕 속에서 말뚝 기둥을 부둥켜안았다.

배병희는 단단한 둔덕 위에 발을 딛고 서서 무쇠 메를 머리 위로 치켜올렸다.

무거운 쇳덩이가 허공을 가르고 말뚝 머리를 정확히 내리찍었다.

쿵! 쿵! 쿵!

둔탁한 메질 소리가 고요한 갯벌을 뒤흔들었다.

무쇠 메가 내리꽂힐 때마다 참나무 말뚝이 진뻘 속으로 한 뼘씩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수십 번 메질을 거듭하자 배병희의 손바닥 안에서 물집이 터져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벗겨진 생살 위로 시린 뻘물이 튀어 불에 덴 듯 쓰라렸으나, 그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어깨 근육이 찢어질 듯 쑤셔 올수록 호흡을 길게 가다듬고 메 자루에 온 체중을 실었다.


좌우 옛 둑 사이 무너진 물목을 약 12명이 집중 보수하는 장면

스무 개가 넘는 굵은 참나무 말뚝이 끊어진 물목을 가로질러 두 줄로 촘촘히 박혔다.

배병희와 형들은 말뚝과 말뚝 사이를 굵은 새끼줄로 얽어매고, 그 빈틈에 억센 솔가지와 잡목을 빽빽하게 채워 넣었다.

이제 바닷물이 다시 고개를 들고 밀려들기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남짓뿐이었다.

저 멀리 갯골 끝에서부터 희뿌연 밀물이 스멀스멀 차오르기 시작했다.

둑 위에 선 아버지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호령했다.

"물 들어온다! 지금이다, 흙가마니와 바위를 한꺼번에 쏟아부어라!"

아버지의 외침과 함께 마을 장정들이 일제히 내달렸다.

맏형과 둘째 형이 돌을 가득 실은 달구지를 밀어왔고, 일꾼들이 지게에 얹은 흙가마니를 숨 가쁘게 기울였다.

수백 포대의 황토 가마니와 큼직한 호박돌들이 말뚝 울타리 뒤편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깊이 박힌 참나무 말뚝과 얽혀 있는 솔가지들이 쏟아진 바위와 흙가마니를 한 덩어리로 단단히 붙들어 매었다.

마침내 밀물이 물목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하얀 거품을 문 누런 파도가 새로 쌓아 올린 둑의 가슴팍을 들이받았다.

차가운 물보라가 사내들의 머리 위로 높게 튀어 올랐으나, 말뚝 뼈대를 품은 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푸 밀려든 성난 파도는 끝내 둑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바깥 바다 쪽으로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바닷길이 완전히 끊긴 둑 안쪽에는 거짓말 같은 적막이 감돌았다.

사내들은 진흙 범벅이 된 채 둑 위에 그대로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흙탕물과 땀방울이 뒤섞여 흐르는 얼굴들 위로 비로소 안도의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바닷물을 막아냈다고 해서 잿빛 개흙이 하루아침에 곡식이 자라는 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땅속 깊이 배어 있는 지독한 소금기를 빼내야 했다.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배병희는 남들처럼 방 안에 들어앉아 쉬는 대신 삽을 들고 둑으로 내달렸다.

논바닥 가득 빗물을 가두어 땅속의 짠물을 우려낸 뒤, 썰물 때에 맞춰 물꼬를 터서 소금기 섞인 물을 바다로 흘려보냈다.


완성 방조제 안에서 볏짚과 두엄을 섞어 간척토를 일구는 가족

아버지와 삼 형제는 볕에 말라 가뭄 든 바닥처럼 하얗게 갈라진 개흙을 가래와 쟁기로 끊임없이 갈아엎었다.

산에서 베어 온 생풀과 볏짚, 겨우내 삭힌 두엄을 지게가 휘도록 져 날라 흙과 뒤섞었다.

배병희의 손톱 밑에는 검은 개흙 때가 마를 날이 없었다.

몇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사내들은 쉬지 않고 땅을 일구었다.

마침내 소금기가 하얗게 서걱거리던 잿빛 개흙이 거무스름하고 기름진 흙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흙에는 지렁이가 기어다녔다.

봄기운이 완연해진 어느 날, 배병희는 못자리에서 정성껏 기른 푸른 못단을 안고 논으로 들어섰다.

종아리가 잠기는 미지근한 논물 속에서 거무스름한 흙바닥에 어린 모를 한 포기씩 조심스럽게 꽂아 넣었다.

여린 모가 흙을 단단히 움켜쥐고 뿌리를 내렸다.

시퍼런 볏잎들이 초여름 햇살을 머금으며 하루가 다르게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갔다.

도지로 절반을 떼어주지 않아도 되는 삼천 평의 우리 집 논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가을바람이 불자 갯가 들판이 눈부신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잘 여문 누런 벼 이삭들이 바닷바람을 타며 서걱거리는 물결을 일으켰다.


우측 하단까지 연속된 완성 방조제 안에서 첫 수확을 앞둔 가족

첫 벼 베기를 하루 앞둔 맑은 날 오후였다.

아버지와 세 아들이 황금빛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논둑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사내들의 해진 바짓가랑이에는 마른 진흙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고, 손마디는 나무뿌리처럼 거칠게 굵어져 있었다.

뒤따라 나온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온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주전자 주둥이에서 뽀얗고 걸쭉한 막걸리가 사발 가득 쏟아졌다.

배병희는 두 손으로 공손히 사발을 받아 들었다.

한 모금 들이켜자 시큼하면서도 달큼하고 시원한 기운이 마른 목구멍을 타고 가슴 끝까지 퍼져 나갔다.

사발을 비운 아버지가 누렇게 익은 삼천 평 들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인은 곰방대를 허리춤에 꽂으며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아라. 흙은 사람이 흘린 땀을 절대 배신하지 않는 법이다."

배병희는 빈 사발을 내려놓고 진흙과 소금기가 허옇게 말라붙은 제 두 손바닥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무쇠 메를 휘두르고 바윗덩이를 날라 쌓던 마디마다 거친 옹이가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바다에서 갓 뺏어낸 삼천 평 논이 대식구의 오랜 가난을 단번에 끝내줄 수는 없었다.

겉흙은 달래 놓았으나 땅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소금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장대비가 내릴 때마다 물꼬를 터 짠물을 흘려보냈건만, 봄볕이 들자 논바닥 여기저기에 하얀 소금꽃이 서리처럼 피어올랐다.

정성껏 기른 모를 심어 놓으면 땅속에서 올라온 독한 간기에 어린 벼가 잎끝부터 누렇게 타 들어가며 말라죽었다.

가을걷이를 마쳐도 수확한 벼만으로는 대식구의 끼니를 잇고 둑 공사 때 진 빚을 갚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그해 겨울의 어느 깊은 밤, 아버지가 세 아들을 사랑방으로 불러 모았다.

방 한가운데 놓인 질화로의 숯불이 붉게 이글거렸다.

아버지가 굳은 얼굴로 곰방대를 고쳐 쥐며 입을 열었다.

"새 논에서 거둔 벼만으로는 식구들 입에 풀칠하고 빚 갚기에 아직 어림없다. 남은 땅에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염전을 일궈보자."

아버지는 매캐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창문 너머 어두운 바다 쪽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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