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마차 탈곡기 ​

가을 볏단과 세 가닥 도리깨가 놓인 마당에서 고된 타작에 지친 농민들
1970년대 초·중반, 안면도 중장리 및 인근 마을

그 시절 섬마을에는 수동식 회전 탈곡기를 쓰는 집도 있었지만, 여전히 도리깨로 타작하는 집이 있었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장정부터 허리 굽은 노인까지 달라붙어 종일 도리깨를 내리쳤다.

어깨가 빠지도록 팔을 휘둘러도 한 집 벼를 다 털어내려면 사나흘이 꼬박 걸렸다.

서해 하늘에 잿빛 구름장이라도 드리우면 농민들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쌓아둔 볏단에 가을비라도 스며들면 알곡에서 싹이 트고 시커멓게 썩어 문드러졌다.

배병희는 그 타는 속내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도리깨를 휘두르든, 탈곡기 발판을 밟든 사람 힘에만 기대서는 타작이 더뎠다.

발동기로 돌리는 탈곡기를 싣고 농가를 찾아가면 어떨까.

하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천일염전과 자염 가마솥이 잇달아 무너지며 빚더미에 앉았던 기억이 아직도 쓰라렸다.

배병희는 헛간 등잔불 아래서 몽당연필을 쥐고 수없이 숫자를 굴렸다.

기름값과 수리비, 일꾼들 품삯을 제하고도 기계 밑천을 건질 수 있을지 몇 날 며칠을 따져보았다.

셈이 서자 배병희는 바다를 막아 일군 삼천 평 갯논 농사로 악착같이 모은 종잣돈을 꺼내 들었다.

그는 광천 장터와 대전의 철공소를 발이 부르트도록 수소문해 소형 디젤 발동기 한 대와 나무틀을 얹은 동력 탈곡기를 찾아냈다.

철공소 마당에서 전대를 풀어 거금을 치르던 순간, 지폐를 쥔 그의 굵은 엄지손가락 마디에 핏기가 가실 만큼 힘이 들어갔다.

배편과 달구지로 실어 온 기계를 마당에 부려놓자, 차가운 무쇠 냄새와 묵직한 경유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러나 기계를 들여놓았다고 일이 저절로 풀릴 리 없었다.

발동기와 탈곡기는 장정 서넛이 달라붙어도 들기 버거울 만큼 육중했다.

비좁은 논둑길과 가파른 고갯마루를 넘어 농가 마당마다 기계를 옮겨 다니는 일부터가 큰 산이었다.

배병희는 조카들과 손발이 맞는 마을 장정들을 불러 모았다.

그렇게 우직하고 일머리 있는 사내 여섯으로 우마차 탈곡단을 꾸렸다.


발동기와 탈곡기를 밧줄로 고정한 목제 우마차를 황소가 끌고 배병희가 고삐를 잡고 가는 가을길

그들은 소가 끄는 널찍한 우마차 짐칸에 발동기와 탈곡기, 경유 통과 수리 연장함을 실었다.

고갯길에서도 기계가 흔들리지 않도록 두꺼운 볏짚 밧줄로 네 귀퉁이를 단단히 동여맸다.

"이랴, 가자."

배병희가 고삐를 당기자 황소가 거친 숨을 뿜으며 앞발에 힘을 주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퀴가 황톳길을 구를 때마다 뽀얀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우마차가 처음 멈춰 선 곳은 이웃 마을의 한 농가였다.

마당 가득 베어 온 볏단이 성벽처럼 쌓여 있었다.

우마차가 사립문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 어르신이 툇마루에서 급히 내려왔다.

어르신은 짐칸에 실린 시커먼 쇠뭉치를 번갈아 보며 불안한 기색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배 서방, 발동기로 저리 빨리 돌려도 괜찮겠는가? 행여 쇠 이빨에 알곡이 다 깨져 나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이웃 농민들도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마당가를 에워쌌다.

배병희는 빈말로 안심시키려 하지 않았다.

어르신을 향해 묵묵히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인 뒤, 조카들과 함께 밧줄을 풀고 기계를 마당 한복판에 내렸다.

발동기 바닥 네 귀퉁이에 나무 쐐기를 깊숙이 박아 흔들림 없이 수평을 잡았다.

마당에 물을 뿌려 흙먼지를 가라앉힌 다음, 발동기 플라이휠과 탈곡기 회전축 풀리 사이에 넓적한 평벨트를 팽팽하게 걸었다.

배병희는 경유 통 마개를 열어 기름을 확인하고 감압 레버를 젖혔다.

기름때 묻은 두 손으로 무쇠 크랭크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어깨와 허리에 온몸의 체중을 실어 손잡이를 힘차게 돌렸다.

묵직한 쇠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둔탁한 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회전이 빨라지자 배병희는 감압 레버를 탁 제쳐놓고 손잡이를 맹렬히 채어 돌렸다.

탕, 탕, 타당!

우렁찬 폭발음이 가을 허공을 갈랐다.

배기통에서 푸르스름한 경유 연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평벨트가 무서운 기세로 돌아갔다.

탈곡기 안쪽의 쇠 빗살 원통이 웅웅거리며 세차게 회전했다.

"볏단 들어갑니다!"


수채화로 그린 발동기와 별도 탈곡기를 하나의 평벨트로 연결해 작업하는 여섯 명의 이동식 탈곡팀

조카가 큼직한 볏단 하나를 품에 안아 탈곡기 입구로 밀어 넣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회전하는 쇠 빗살이 벼 이삭을 훑고 지나가자마자, 깨진 톨 없이 여문 황금빛 알곡이 소나기처럼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알곡을 털어낸 빈 볏짚은 뒤편으로 가지런히 튕겨 나갔다.

장정 둘은 볏단을 나르고, 둘은 번갈아 탈곡기에 이삭을 들이밀었다.

남은 둘은 쏟아지는 벼를 나무 갈퀴로 긁어모아 가마니에 퍼 담았다.

여섯 장정의 손발이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갔다.

도리깨질로 사흘 밤낮을 매달려야 했던 볏단 더미가 불과 반나절 만에 바닥을 드러냈다.

휑해진 마당 한쪽에는 배가 불룩해진 볏가마니들만 든든하게 쌓여 올랐다.

주인 어르신은 한 움큼 집어 든 알곡을 손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굴려 보더니 탄성을 터뜨렸다.

"세상에, 알곡 하나 상한 데가 없구먼! 사흘 걸릴 일을 반나절 만에 끝내다니!"

배병희네 우마차가 들어서면 반나절 만에 마당이 정리된다는 소문이 들판을 타고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인근 마을에서 농민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우리 집 마당부터 들러달라며 배병희의 손을 붙잡았다.

우마차 탈곡단은 새벽안개가 걷히기 전부터 달이 뜰 때까지 쉴 틈 없이 섬마을의 논두렁과 마당을 누볐다.

당시 섬마을에는 현금이 귀했다.

탈곡단은 품삯으로 돈 대신 그날 갓 털어낸 햇벼를 받았다.


해질녘 대저울과 됫박 곁에서 벼 품삯을 나누는 배병희

어스름이 내려앉으면 마당 한쪽에 멍석을 펴고 무쇠 대저울과 나무 됫박을 놓았다.

배병희는 품삯으로 받은 볏가마니들을 차례로 저울에 올렸다.

주머니에서 접힌 누런 종이쪽지와 몽당연필을 꺼내 침을 묻혀가며 숫자를 적었다.

"오늘도 먼지 뒤집어쓰느라 고생들 많았다. 자, 자루들 벌려라."

배병희는 함께 땀 흘린 조카들과 일꾼들의 몫부터 먼저 퍼서 나누었다.

한 됫박의 에누리도 없이 저울눈을 반듯하게 맞춘 뒤, 됫박 위로 수북하게 솟아오른 고봉 그대로 자루에 부어주었다.

그러고도 바가지로 알곡을 크게 한 번씩 더 떠서 덤으로 얹었다.

자루를 붙잡고 있던 큰조카가 난처한 표정으로 배병희의 손목을 살며시 잡았다.

"삼촌, 저희 몫을 이리 후하게 쳐주시면 삼촌 손에 남는 게 얼마 없지 않습니까. 경윳값도 만만찮고, 비싸게 들여온 기계 밑천부터 건지셔야지요."

배병희는 됫박 가장자리에 붙은 벼 껍질을 거친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흙먼지와 기름때가 엉긴 조카의 어깨를 묵직하게 한 번 두드려주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기계는 기름으로 돌지만, 그 기계를 이고 지고 고갯길을 넘는 건 사람 어깨다. 같이 땀 흘린 사람 몫을 먼저 채워야 내일도 이 우마차가 굴러가는 법이여."

배병희는 말없이 조카의 자루 주둥이를 단단히 묶어주었다.

그렇게 하루 품을 나누고 남은 벼는 집 헛간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우마차에 남은 가마니를 싣던 배병희의 시선이 문득 마을 어귀 정미소 쪽에서 멈추었다.

당시 안면도 농민들은 마당에서 볏단을 털어내고도 곧장 흰쌀밥을 지어 먹지 못했다.

털어낸 알곡을 멍석에 며칠씩 볕에 바짝 말린 뒤에야 비로소 정미소로 향할 수 있었다.

무거운 볏가마니를 지게에 지고 몇 리 길을 걸어 정미소까지 가야만, 거친 껍질을 벗겨 쌀을 만들 수 있었다.

저물녘인데도 정미소 앞에는 볏가마니를 내려놓고 차례를 기다리는 농민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지겟작대기를 짚고 서 있는 이웃들의 굽은 등 너머로, 함석 굴뚝에서 하얀 쌀겨 먼지가 연신 뿜어져 나왔다.

정미소 안에서는 정미 롤러가 웅웅거리며 돌아가고, 거친 왕겨가 벗겨진 자리에 윤기 흐르는 백미가 쏟아져 내렸다.

우마차 고삐를 쥔 배병희의 손아귀에 묵직한 힘이 들어갔다.

들판에서 벼를 털어 받는 품삯만으로는 평생 남의 마당을 떠도는 일꾼에 머물 뿐이었다.

농사지은 벼가 하얀 쌀알로 거듭나 밥상에 오르는 길목, 그 도정과 유통의 매듭을 직접 쥐어야만 비로소 곡식의 온전한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땅거미가 완전히 내려앉아서야 탈곡단은 우마차를 몰고 집 마당으로 돌아왔다.

사립문을 밀고 들어서자 부엌 쪽에서 구수하고 진한 냄새가 마당 가득 번져 나왔다.

아내가 정지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 커다란 무쇠솥에 끓여낸 고깃국 냄새였다.


밤에 소고깃국과 고봉밥을 나누는 탈곡단

단단한 가을무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푹 우려낸 국솥 위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마당 평상 위에는 고봉으로 꾹꾹 눌러 담은 밥그릇과 뚝배기 국사발이 넉넉하게 차려졌다.

하루 종일 짚가루와 경유 연기를 뒤집어쓴 장정들이 우물가에서 손발을 씻고 평상 둘레에 둘러앉았다.

"찬 바람에 속들 시렸을 텐데, 국 식기 전에 어서들 뜨세요."

아내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잘 익은 깍두기 보시기를 일꾼들 앞마다 더 놓아주었다.

배병희가 고맙다는 듯 아내를 바라보자, 아내는 잔잔한 눈빛으로 남편의 빈 물그릇을 채워주었다.

뜨끈한 국물이 까칠해진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사내들의 굳었던 어깨가 비로소 나른하게 풀렸다.

밤이 깊어 일꾼들이 돌아간 뒤에도, 배병희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당의 우마차 곁에 섰다.

그의 귓가로 서늘하고 축축한 밤바람이 스쳤다.

고개를 들자, 서해 먼바다 수평선 위로 달빛을 가리는 짙은 잿빛 구름장이 낮게 깔리고 있었다.

비가 오기 전에 털어내야 할 이웃들의 볏단이 아직 들판 가득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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