숟가락에 녹인 납 ​

땅에 내린 발동기와 탈곡기를 한 평벨트로 연결해 가을 타작을 이어가는 여섯 명의 탈곡단
1970년대 초·중반, 안면도 들판

10월 하순의 가을 들판이 누렇게 일렁였다.

논둑마다 베어 눕힌 볏단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농민들은 새벽이슬이 마르기도 전에 들로 나와 낫질을 서둘렀다.

타작마당 한복판에는 소가 끄는 널찍한 우마차가 버티고 섰다.

마당에 내려놓은 소형 디젤 발동기와 탈곡기가 팽팽한 평벨트로 맞물려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조카들이 육중한 볏단을 안아 탈곡통 입구로 들이밀 때마다, 회전통의 쇠갈퀴가 벼 이삭을 거칠게 훑어 냈다.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황금빛 알곡 위로 뽀얀 짚가루와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날아오른 까끄라기가 사내들의 땀 젖은 이마와 목덜미에 엉겨 붙었다.

배병희는 땀을 훔칠 겨를도 없이 발동기 곁을 지켰다.

쇠붙이가 토해내는 거친 진동을 손끝으로 가늠하며 수시로 기름주전자를 기울였다.

하지만 가을 들판에 허락된 시간은 짧았다.

오후에 접어들자 서해 먼바다 수평선 너머에서 잿빛 먹구름이 스멀스멀 몰려오고 있었다.

바람 끝에는 벌써 축축한 습기가 묻어났다.

베어 눕힌 벼가 가을비를 맞으면 논바닥 고인 물에 잠겨 단숨에 싹이 트고 썩어 버린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들판에 쌓인 볏단을 기어이 다 털어내야 했다.

탈곡단은 새벽안개가 걷히기 전부터 달이 중천에 뜰 때까지 사흘 밤낮으로 기계를 돌렸다.

사달이 난 것은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던 해 질 무렵이었다.

한창 타작하던 중, 발동기 안쪽에서 느닷없이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쇠와 쇠가 마른 채로 갈리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연기가 솟구치더니, 덜컥하는 충격음 끝에 발동기가 그 자리에서 멎어 버렸다.

묵직한 쇠바퀴가 멈추자 팽팽하던 평벨트가 풀리에서 맥없이 벗겨져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온 들판을 뒤흔들던 배기음이 뚝 끊기자, 먹구름 아래로 스산한 바닷바람 소리만 휑하게 맴돌았다.

매캐한 기름 탄내와 타버린 쇳가루 냄새가 마당 가득 번졌다.

"삼촌, 발동기가 멈췄습니다!"

볏단을 밀어 넣던 큰조카가 재빨리 탈곡통에서 볏단을 빼내며 다급하게 외쳤다.

다른 조카와 일꾼들도 기름통과 냉각수 통을 살피다 손을 멈춘 채 굳어 섰다.

배병희는 말없이 발동기 앞으로 다가섰다.

달아오른 무쇠 몸체에서 후끈한 열기가 훅 끼쳐왔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스패너로 볼트를 풀어 크랭크축 덮개를 벗겨 냈다.


멈춘 발동기 곁에서 손상된 반원형 메탈 베어링을 양손으로 확인하는 배병희와 걱정하는 이웃들

축 안쪽을 들여다본 배병희의 미간이 깊게 패었다.

빠른 속도로 도는 회전축을 받쳐 주던 메탈 베어링, 이른바 '메다르'가 마찰열을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져 있었다.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돌린 탓에 기름기가 마르면서 부드러운 합금이 엿가락처럼 녹아 축에 엉겨 붙은 것이었다.

기계 소리가 끊기자 논둑에서 일손을 놀리던 마을 어르신들과 농민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멈춰 선 발동기와 시커멓게 타 눌어붙은 축을 들여다본 농민들의 낯빛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럼 저 많은 벼는 인제 어쩌는 겨?"

칠순이 넘은 마을 어르신이 볏단을 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안면도 바닥에 저런 발동기 부품이 어디 있간디. 뭍에 있는 광천이나 홍성 철공소까지 배 타고 나가서 구해 오려면 사나흘은 족히 걸릴 텐데."

"당장 내일 새벽부터 비가 쏟아진다잖여. 저 볏단들 비 맞으면 논바닥에서 다 썩어 문드러질 텐데, 올 일 년 농사 다 망쳤구먼."

농민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탄식이 어두워지는 들판을 무겁게 짓눌렀다.

스패너를 쥐고 서 있던 조카들도 당장 밤배를 띄울 수조차 없는 물때를 헤아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가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배병희는 아무 말 없이 발동기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는 드라이버 끝으로 축에 눌어붙은 찌그러진 합금 조각들을 묵묵히 긁어냈다.

데일 듯이 뜨거운 회전축 표면을 거친 엄지손가락 끝으로 더듬어 살피는 동안, 굳게 다문 그의 턱선 위로 굵은 힘줄이 불거졌다.

철공소도, 갈아 끼울 새 부품도 없는 외딴섬 들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우마차만 믿고 벼를 베어 눕힌 수십 가구 이웃들의 한 해 살림을 비구름 아래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문득 공구함 밑바닥에 넣어 둔 무른 납덩어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메탈 베어링 역시 회전축이 상하지 않게 받쳐 주는 무른 합금이었다.

배병희는 손바닥에 묻은 검은 쇳밥을 바지춤에 쓱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르신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오늘 밤 안으로 제가 어떻게든 손을 봐 두겠습니다."

한숨을 쉬던 농민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새벽에 비가 오기 전에는 기계를 다시 돌릴 겁니다. 날 밝는 대로 타작을 마저 끝내 드리겠습니다."

배병희는 곧장 조카들을 돌아보았다.

"지금 당장 마당 구석에 화롯불을 피우고 참나무 숯을 넉넉히 달궈라. 그리고 연장 궤짝 밑바닥에 있는 두꺼운 놋숟가락이랑 낚싯줄에 쓰던 납덩어리를 전부 챙겨 오너라."

조카들이 정신을 추스르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곧이어 어두워진 들판 한구석에 화로가 놓이고, 어둠을 밝히는 붉은 불꽃과 함께 거친 풀무질 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어두워진 들판에서 집게로 놋숟가락을 잡아 숯불에 납을 녹이는 배병희

배병희는 철제 집게로 두꺼운 놋숟가락 자루를 단단히 물려 쥐고, 숟가락 안에 묵직한 납 조각들을 수북하게 얹었다.

그러고는 숟가락 바닥을 시뻘겋게 달아오른 숯불 한가운데로 깊숙이 찔러 넣었다.

매서운 열기가 놋쇠를 타고 오르자, 단단하던 납 조각들이 가장자리부터 흐물흐물 주저앉기 시작했다.

이윽고 숟가락 안에는 수은처럼 무겁고 은빛으로 번들거리는 쇳물이 찰랑거렸다.

납이 완전히 녹아내리는 동안, 배병희는 베어링 축 틀 안쪽의 그을음과 찌꺼기를 기름걸레로 닦아냈다.

축 틀을 평평한 돌 위에 올려 수평을 맞췄다.

"쇳물이 한쪽으로 쏠리면 안 된다. 손이 뜨거워도 흔들리지 않게 꽉 붙들어라."

"예, 삼촌!"

큰조카가 두꺼운 광목천을 여러 겹 감은 두 손으로 달아오른 축 틀의 양옆을 힘껏 눌러 잡았다.

배병희는 숨을 멈추고 집게에 물린 놋숟가락을 조심스레 기울였다.

은빛 납물이 좁은 축 틀의 틈새를 따라 가느다란 실오라기처럼 미끄러져 들어갔다.

치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뜨거운 쇳물은 틀 안쪽의 빈틈을 메우며 빠르게 식어 굳어갔다.

하지만 쇳물을 부어 굳혔다고 해서 곧바로 부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틀 안에서 굳은 납은 아직 거칠고 투박한 쇳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분당 수백 번씩 돌아가는 강철 회전축과 맞닿을 안쪽 곡면을 종이 한 장 오차도 없이 정밀하게 깎아내야 했다.

틈이 머리카락 한 올만큼만 헐거워도 축이 요동치며 산산조각이 날 터였고, 반대로 조금만 빽빽해도 마찰열을 견디지 못해 몇 분 만에 다시 녹아내릴 판이었다.

선반 기계도, 눈금자도 없는 밤 들판에서 오직 손끝의 감각 하나로 곡면을 잡아내야 했다.


두 조카의 남포등 아래 무릎 사이에 고정한 베어링을 평줄로 다듬는 배병희

밤이 깊어지자 안면도 들판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조카 둘이 삼촌의 양옆에 바짝 붙어 앉아 남포등 두 개를 높이 치켜들었다.

배병희는 찬 이슬이 내려앉은 멍석 위에 책상다리로 주저앉아 두 무릎 사이에 납을 부은 축 틀을 단단히 끼워 물렸다.

그의 오른손에는 날이 촘촘하게 선 강철 평줄칼이 들려 있었다.

사각, 사각, 사각.

줄칼이 무른 납 표면을 일정한 힘으로 밀어내는 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갈랐다.

깎여 나간 은빛 쇳가루가 불빛에 반짝이며 배병희의 무릎 위로 하얀 서리처럼 소복하게 내려앉았다.

배병희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줄칼을 비스듬히 눕혀 안쪽 둥근 면을 열두어 번 깎아내고는, 어김없이 거친 엄지손가락을 넣어 단면을 천천히 문질러 보았다.

엄지손가락 지문에 걸리는 거친 결을 가늠하며, 줄칼의 각도와 손목의 힘을 조금씩 조절해 나갔다.

조금 깎아내고는 발동기 회전축에 직접 대어 보며 맞물리는 틈새를 살폈다.

검은 기름칠을 한 축 표면에 스치는 자국이 남으면, 다시 빼내어 그 자리만 줄칼로 살살 갈아 냈다.

수백, 수천 번의 줄질이 밤새도록 이어졌다.

자정이 넘자 바다에서 불어온 찬 밤바람이 얇은 옷깃을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그러나 무릎 위에 고개를 깊이 숙인 배병희의 등줄기는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턱끝을 타고 흐른 굵은 땀방울이 차가운 쇠 위로 뚝뚝 떨어져 번졌다.

남포등을 치켜든 조카들의 팔뚝도 수시로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조카들은 쇳가루와 시커먼 기름때로 범벅이 된 삼촌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삼촌이 말없이 줄칼을 미는 동안, 조카들은 소리 없이 등불을 반대편 손으로 고쳐 쥐었다.

먼 마을 어귀에서 첫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 무렵, 배병희가 비로소 손에서 줄칼을 내려놓았다.

줄칼 자루를 쥐고 있던 손가락 마디가 굳어 한동안 펴지지 않았다.

그는 뻣뻣한 손을 주물러 푼 뒤, 밤새 손끝으로 깎아낸 납 베어링 안쪽에 걸쭉한 윤활유를 듬뿍 먹여 크랭크축에 끼워 넣었다.

스패너로 볼트를 대각선 순서대로 단단히 조이고, 손바닥으로 회전축 바퀴를 슬며시 굴려 보았다.

스르륵.

쇠와 쇠가 맞물려 돌아가는 감촉이 매끄러웠다.

뻑뻑하게 걸리는 구석도, 헐겁게 흔들리는 유격도 없었다.

동쪽 하늘에 검푸른 새벽빛이 번져 오기 시작했다.

밤새 잠을 설친 마을 농민들이 외투 깃을 여미며 하나둘 타작마당으로 모여들었다.

배병희는 쇳가루와 이슬에 절은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묵묵히 발동기 앞으로 걸어가 무쇠 시동 손잡이를 양손으로 단단히 움켜쥐었다.

"돌립니다."

감압 레버를 젖힌 배병희가 허리와 어깨의 반동을 실어 손잡이를 힘차게 돌렸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무거운 플라이휠에 묵직한 회전력이 붙자 그는 레버를 탁 놓고 마지막 힘을 쏟아 손잡이를 낚아챘다.

탕! 탕! 타당, 타다당!

배기구에서 푸르스름한 연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오더니, 죽은 듯 멈춰 있던 발동기가 우렁찬 폭발음을 토해내며 고동치기 시작했다.

일정하고 힘찬 박자의 배기음이 새벽 들판을 뒤흔들었다.

풀리에 걸린 평벨트가 팽팽하게 튀어 오르며 탈곡기 원통을 맹렬한 기세로 돌렸다.

"돌아간다! 기계가 다시 돈다!"


수리를 마친 새벽 농민이 배병희의 손을 맞잡는 순간

숨을 죽인 채 지켜보던 농민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밤새 속을 태우던 마을 어르신들이 한달음에 달려와 배병희의 거친 두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살았네, 우리 동네가 다 살았어! 배 서방, 자네가 이 귀한 벼를 다 살려냈구먼!"

조카들이 기다렸다는 듯 볏단을 번쩍 들어 탈곡기 입구로 들이밀었다.

거세게 돌아가는 쇠갈퀴 끝에서 황금빛 낟알들이 빗방울보다 먼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배병희는 팔소매로 이마의 기름땀을 훔치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발동기 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려다본 두 손은 밤새 깎아낸 납 가루와 기름때로 시커멓게 절어 있었다.

수천 번 줄질을 거듭한 엄지손가락 끝은 생살이 벗겨져 화끈거렸고 손마디마다 얼얼하게 쑤셨다.

변변한 연장 하나 없는 들판에서도 기계를 살려낸 그 손끝의 내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탈곡기를 들여와 들판을 누비기도 전인 몇 해 전 겨울, 살얼음이 서걱거리는 중장리 앞바다의 갯벌이 그의 눈앞에 겹쳐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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