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을 메운 상인들 ​

동지섣달 찬바람이 불자 중장리 앞바다는 검푸른 빛으로 짙어졌다.


수채화로 그린 겨울 새벽 갯벌의 대나무 김발에서 얇은 생김을 뜯어 채취하는 배병희
1970년대 초, 안면도 중장리

썰물 때마다 드러나는 갯벌에는 배병희가 박아 넣은 참나무 말뚝들이 빽빽하게 늘어섰다.

대나무 발마다 윤기 나는 생김이 엉겨 붙었다.

바닷물이 빠질 때마다 생김을 뜯어 지게로 날랐다.

물 밖으로 나온 생김은 몇 시간만 지나도 붉게 물렀다.

소금기와 개흙을 씻어내고, 잘게 썰어 물에 푼 뒤, 틀에 떠서 볕에 말려야 했다.

바다에서 뜯어내는 일보다 손품이 더 들었다.

마당 한구석에는 생김 광주리가 쌓여갔다.

밑바닥에 깔린 광주리에서는 벌써 김이 피어올랐다.

식구들 몇이 매달려서는 감당할 수 없는 양이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김을 마당에서 썩힐 판이었다.


겨울 새벽 중장리 김 공장 마당과 갯벌의 지주식 양식장

농한기인 데다 갯벌도 얼어붙어 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마을 사람들은 화롯가에 모여 있었다.

쌀독이 비어가도 봄 보릿고개까지 버틸 길이 막막했다.

배병희는 광주리를 살피다 동네로 사람을 보냈다.

"일손 놀리는 분들은 누구든 우리 집 마당으로 나오십시오. 그날 품삯은 그날 저녁 현찰로 드립니다."

소문은 골목골목 퍼졌다.

이튿날 새벽, 어둠이 가시기 전에 수십 명의 주민들이 배병희의 집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배병희는 먼저 일손을 나누었다.

갯벌에서 생김을 뜯어내는 사람, 지게로 져 나르는 사람, 개흙을 씻어내는 사람, 도마질하는 사람, 틀에 떠서 널어 말리는 사람까지 다섯 갈래로 자리를 잡았다.

마당 한편에 드럼통과 고무통 수십 개가 줄지어 늘어섰다.

우물에서 길어 올린 찬물이 통마다 쏟아졌다.

아낙들은 살얼음이 뜬 물에 생김을 서너 번씩 흔들어 헹궜다.

손끝이 곱을 때마다 입김을 불어가며 김 가닥 사이의 개흙과 잔모래를 털어냈다.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김은 널따란 통나무 도마 위로 넘어갔다.

식칼과 작두가 오르내리며 새벽 마당에 딱, 딱, 딱, 도마 소리가 울렸다.

잘게 다진 김을 커다란 나무통에 우물물과 함께 쏟아부었다.

긴 나무 막대로 젓자 검푸른 김죽이 풀렸다.


수채화로 그린 물에 풀린 김을 네모 나무틀과 대나무 발로 뜨는 손

이어 김을 떴다.

아낙들은 대나무 발 위에 네모난 나무틀을 얹고 바가지로 김죽을 일정하게 떠 부었다.

손목을 흔들어 김 가닥을 네 귀퉁이까지 고루 펴낸 뒤 틀을 들어 올렸다.

물이 빠지고 나면 김 한 장이 대나무 발 위에 남았다.

두꺼우면 속까지 마르지 않아 상했고, 너무 얇으면 볕에 바스러져 상품이 되지 못했다.

겨울방학을 맞은 아이들도 일손을 보탰다.

맏아들과 둘째 아들은 새벽에 일어나 마당으로 나왔다.

젖은 김이 얹힌 김발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건조장 덕장으로 날랐다.

매서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덕장 줄에 김발을 척척 걸쳐 널었다.


겨울 김 공장에서 젖은 김발을 옮겨 거는 두 아들과 배병희

찬바람에 아이들의 볼은 발갛게 얼어붙었다.

물기 어린 김발을 거듭 만지느라 손등이 부르트고 갈라져 핏방울이 맺혔다.

맏아들은 터진 손등을 옷소매에 문지르며 동생을 다독였다.

"발 끝이 땅에 닿지 않게 바짝 들어라."

"아버지가 밤새 건져 올리신 김이다."

"흙이 묻으면 못 쓴다."

찬바람 속에서도 형제의 등에서는 김이 피어올랐다.

지게를 내려놓던 배병희가 다가와 두 아들의 어깨를 짚어주었다.

겨울 햇살과 바닷바람을 머금은 김은 덕장 위에서 빠르게 말라갔다.

밀물 때 바다의 거름기를 빨아들이고 썰물 때 햇볕을 반나절씩 쬔 안면도 지주식 김은 윤기가 났다.

파래 한 올 섞이지 않은 묵빛이었다.

바짝 마른 김을 발에서 조심조심 떼어냈다.

귀퉁이가 찢어지지 않은 것들로 백 장씩 추려 볏짚 끈으로 동여매니 한 톳이 되었다.

묶인 김 톳이 마루 밑과 광 안쪽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안면도 중장리 배병희네 김이 최상품이라는 소문은 바다 건너 육지 장터까지 빠르게 퍼져나갔다.

섬과 육지를 잇는 길은 돌부리가 불거진 비포장 황톳길이었지만 상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인천과 군산, 광천과 홍성의 도매상들이 트럭과 삼륜차를 몰고 집 앞마당으로 찾아왔다.


툇마루에 모인 상인들의 김 주문을 차분히 받는 배병희

아침이면 마당 앞길이 상인들의 트럭으로 들어찼다.

차에서 내린 상인들이 앞다투어 툇마루로 몰려들었다.

"배 사장! 지난번에 가져간 김이 장터에 풀리자마자 반나절 만에 동이 났소!"

한 상인이 마루 위에 쌓인 김 톳을 집어 들고 코끝에 대보았다.

"빛깔이 새까맣고 바다 향이 기가 막히네."

"딴 데 넘기지 말고 저기 내 트럭에 전부 실어주시오!"

뒤이어 들어선 다른 상인이 마루턱을 짚으며 소리쳤다.

"내가 어제저녁부터 포구 건너와 여관방에서 기다렸소!"

"톳당 오십 원씩 더 얹어줄 테니 내 차부터 먼저 채워주시오!"

상인들은 앞다투어 전대와 품속에서 돈뭉치를 꺼내 들었다.

신문지로 싼 지폐 다발이 툇마루 위에 쌓였다.

배병희는 돈뭉치를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돈 더 얹어준다고 순서를 바꾸면, 날 믿고 먼저 약조한 상인들은 빈 차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루 주변이 조용해졌다.

배병희는 품에서 누런 수첩을 꺼내 펼쳤다.

"어제 장터에서 약속한 홍성 상회부터 싣겠습니다. 뒤차는 내일 새벽 건조장에서 나오는 물량으로 채워드릴 테니 그리들 아십시오."

상인들은 더는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배병희는 약속한 순서대로 김을 내어주었다.

저울 눈금을 살피고 톳 수를 정확히 헤아렸다.

해가 저물 무렵이면 안방 구석의 나무 사과 궤짝이 지폐로 가득 찼다.

배병희는 새 옷이나 털신을 사지 않았다.

소금물과 뻘물에 절어 무릎이 해진 무명 작업복을 그대로 입었다.

밤이 깊어 아내가 방바닥에 흩어진 지폐를 차곡차곡 추스르며 남편의 해진 바지 무릎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돈이 이렇게 들어오는데, 겨울 날 솜바지저고리 한 벌이라도 맞추시지요."

아내가 남편의 언 손등을 감쌌다.

배병희는 아내의 거칠어진 손마디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내 옷이야 솜 덧대어 입으면 그만이지, 지금 해 입을 때가 아니오."

그는 사과 궤짝에 담긴 돈뭉치를 묵묵히 눌러 담았다.

"큰애들이 자라니 머지않아 뭍으로 유학을 보내야 하오. 나처럼 못 배운 서러움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학비 밑천부터 묶어두어야지."

아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돈뭉치를 묶을 무명 끈을 건넸다.

배병희는 사과 궤짝 뚜껑을 닫아 밀어두고 마당으로 나섰다.

마당 평상에는 하루 일을 마친 동네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아내가 가마솥에 끓인 국과 흰쌀밥이 상마다 돌았다.


저녁밥을 마친 일꾼에게 장부에 따라 두 손으로 품삯을 건네는 배병희

배병희는 평상머리에 앉아 장부를 펴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어르신, 오늘 찬물에 손 담그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는 지폐를 두 손으로 받쳐 일꾼들의 손에 쥐여주었다.

품삯은 깎거나 미루지 않고 그날 저녁 현찰로 치렀다.

품삯을 받아 든 주민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배 서방 덕에 올겨울 우리 식구들 굶지 않고 하얀 쌀밥 먹게 되었네."

겨울 김 수확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마을 어르신들과 어민 대여섯 명이 사립문을 밀고 들어왔다.

가장 연장자인 어르신이 툇마루에 걸터앉으며 배병희의 손을 잡았다.

"배 서방, 동네 사람들이 뜻을 모아 자네를 찾아왔네."

"우리 중장리 바다를 보살필 어촌계장을 맡아주게."

배병희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무릎 위 장부의 닳은 모서리를 매만졌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장터 어깨너머로 숫자를 깨친 터였다.

"어르신, 저는 나이도 아직 젊고 배운 글줄도 짧습니다. 바다 일만 해온 사람도 아닌데 어찌 계장 자리를 맡겠습니까."

어르신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등을 두드렸다.

"나이나 글줄이 무슨 상관인가."

"자네는 일머리가 밝고 셈이 바르네."

"이 겨울에 동네 사람들이 일할 자리도 마련해 주었고."

"사람 귀한 줄 알고 약속을 지키는 자네가 앞장서 주게."

뒤에 서 있던 어민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는 김밭 자리 다툼도 늘어날 텐데, 배 서방이 맡아주게."

배병희는 마루 끝에 서서 사립문 너머 겨울 바다를 바라보았다.

김이 돈이 된다는 소문에 포구 안팎에서는 벌써 좋은 갯골 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마당의 트럭 바퀴 자국 위로 갯바람이 불었다.

배병희는 어르신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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