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기 밴 6만 평 ​

독정리 블록집 앞에서 이삿짐을 내려놓는 배병희 일가
1977년, 화성 독정리

트럭에서 부려놓은 이삿짐 보퉁이들이 마당에 쌓였다.

1977년 이른 봄, 배병희 일가는 화성 독정리에 자리를 잡았다.

간척지 이주민에게 분양된 집은 열여덟 평짜리 시멘트 기와집이었다.

시멘트 블록을 한 겹으로 쌓은 벽은 손바닥을 대면 냉기가 전해졌다.

기와 틈새로 서해 갯바람이 들이쳤다.

작은 방 세 칸에 아궁이가 각각 하나씩 딸려 있었지만, 모두 불을 지펴도 외풍을 막기는 어려웠다.

장롱과 이불 보퉁이를 들여놓자 방 안이 꽉 찼다.

여든이 가까운 노모와 아내, 아직 어린 네 남매가 한 지붕 아래 모였다.

고향 안면도에서 홀로 둘 수 없어 모셔온 마을 어르신까지 한 식구가 되었다.

저녁이면 자그마한 두레밥상에 숟가락 여덟 개가 놓였다.

수원으로 유학 보낸 큰아이 셋까지 합치면 열한 식구의 생계를 배병희가 맡고 있었다.

사립문 밖으로 나서면 들판이 펼쳐졌다.

시야를 가리는 야산 하나 없이 땅이 지평선까지 뻗어 있었다.


1977년 이른 봄 독정리의 작은 시멘트 블록 분양주택과 이삿짐

정부에서 분양받은 농지는 7정보, 약 2만 1천 평이었다.

배병희는 거기에 안면도에서 이십여 년간 김 공장과 양식장을 일구어 모은 밑천을 들였다.

경매와 입찰로 나온 땅 13정보, 약 3만 9천 평을 더 사들였다.

모두 20정보, 6만 평이었다.

고향 안면도에서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힘을 모아 옛 방조제 터를 막아 일군 논은 삼천 평 남짓이었다.

이번에는 그 스무 배에 달하는 땅이었다.

이 땅에 기계를 넣어 대농을 짓고, 수원으로 보낸 큰아이들과 어린 자식들을 대학까지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첫해 봄부터 농사가 쉽지 않았다.

이곳은 사람이 지게로 흙가마니를 날라 막았던 안면도의 작은 갯골과 달랐다.

정부가 남양만 어귀에 이천 미터가 넘는 방조제를 쌓아 바닷길을 끊고, 불도저로 밀어 구획을 나누어 놓은 간척지였다.

바닷물이 물러간 지 몇 해 되지 않은 땅이었다.

겉흙은 허옇게 말라 먼지를 날렸지만, 한 뼘만 파도 바닷물에 절어 있던 검푸른 개흙이 드러났다.

흙을 한 줌 쥐어 코끝에 대면 짠내가 났다.

봄철 첫 모내기가 시작되었다.

식구들의 손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넓이였다.

안면도에서 싣고 온 10마력 경운기가 엔진 소리를 울리며 굳은 뻘흙을 갈아엎었다.

그 뒤로 품삯을 주고 부른 수십 명의 일꾼들과 따라나선 여섯 가구 이웃들이 논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종아리까지 빠지는 차가운 개흙탕 속에서 허리를 굽혀 손으로 모를 꽂았다.

며칠 밤낮을 매달린 끝에 6만 평 들판에 모가 줄지어 섰다.

하지만 모내기를 마친 뒤로도 비가 내리지 않았다.

봄 가뭄이 초여름까지 이어졌다.

남양만 바다 쪽에서 메마른 북서풍이 연일 불어왔다.

갯바람과 뜨거운 햇살에 논물이 며칠 만에 말랐다.

논물이 잦아들자 땅속 소금기가 올라왔다.


소금꽃이 핀 갈라진 논에서 붉게 말라가는 어린 볏모와 뿌리를 살피는 배병희

물기가 마른 논바닥이 갈라졌다.

흙 틈새마다 하얗고 버석거리는 소금꽃이 돋았다.

바닥을 짚으면 소금 알갱이가 손바닥에 만져졌다.

갓 뿌리를 내리려던 볏모의 잎끝이 누렇게 말랐다.

며칠 사이에 붉게 타들어 갔고, 새 뿌리를 뻗지 못한 모가 고개를 떨구었다.

배병희가 모 한 포기를 뽑아 들자, 시커멓게 썩어가는 잔뿌리에서 짠내가 났다.

"이 땅은 논이 아니여!"

"몹쓸 소금밭이여!"

함께 모를 심었던 이웃 농민들이 흙 묻은 장화를 벗어 논바닥에 내던지고 주저앉았다.

"정부가 이딴 땅을 분양했구먼."

"모를 심어봐야 소금물에 죄다 타죽는데 농사는 무슨 농사여!"

들판 여기저기서 원망이 터져 나왔다.

평생 모은 재산을 쏟아부은 6만 평 들녘에 붉게 말라 죽은 볏모가 늘어갔다.

배병희는 해 질 무렵 열여덟 평 시멘트 기와집으로 돌아왔다.


염해 논이 보이는 블록집에서 노모의 이불을 여미는 아내

밤마다 갯바람이 들이치면 얇은 블록 벽체가 덜컹거렸고, 흙먼지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문 너머에서 노모의 마른기침 소리가 들렸다.

고향에서 함께 올라온 마을 어르신은 저녁 밥상 앞에 앉을 때마다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밥 한 술을 떠 넣고도 쉬 넘기지 못했다.

배병희는 말없이 노인의 국그릇을 따뜻한 아랫목 쪽으로 조금 더 밀어드렸다.

수원에서 공부하는 큰아이들의 자취방 방세와 학비를 보낼 날도 다가오고 있었다.

아내는 원망 한마디 없이 대식구의 끼니와 시어머니의 잠자리를 챙겼다.

학교에서 돌아온 어린 딸도 가방을 내려놓고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마을 뒷산 솔숲에서 아궁이 땔감으로 쓸 솔잎을 모으는 모녀

모녀는 나무 갈퀴와 마대 자루를 들고 마을 뒷산으로 올라갔다.

나무가 변변치 않은 간척지 마을에서 세 칸 방 아궁이에 날마다 불을 지피려면 마른 솔잎이라도 긁어모아야 했다.

어린 딸은 해가 기울 때까지 솔숲 바닥에서 떨어진 솔잎을 한 줌씩 쓸어 담았다.

손등은 솔가시에 찔려 피가 맺혔고, 땀에 젖은 뺨에는 솔가루와 흙먼지가 말라붙었다.


모아 온 솔잎을 아궁이에 밀어 넣는 작은딸과 밥솥 뚜껑을 여는 어머니

마당 한구석에 쌓아 올린 솔잎이 방을 덥힐 땔감이었다.

아내는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솔 연기를 마셔가며 밥을 지었다.

작은 마당 귀퉁이를 일구어 푸성귀 씨앗도 뿌렸다.

저녁 설거지를 마친 아내가 마루 끝에서 들판을 내다보는 배병희 곁으로 다가왔다.

솔가시에 긁힌 손을 치마폭에 감추며 말했다.

"수천 년 바닷물에 잠겨 있던 땅인데 어찌 단번에 농사가 되겠습니까."

"너무 속 태우지 마세요."

"집안 식구들 건사는 제가 할 테니 당신은 들판 일만 생각하세요."

배병희는 대꾸하지 못하고 손등만 한 번 쓸어내렸다.

밤이 깊어 식구들이 모두 잠든 뒤, 배병희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

건전지를 넣은 손전등 하나를 쥐고 사립문을 나섰다.

어둠 속 6만 평 들판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른 갈대밭에서 밤바람 소리가 났다.

논두렁에 쪼그려 앉아 손전등으로 갈라진 논바닥을 비추었다.

맨손으로 바닥을 쓸자 소금 가루가 묻어났다.

붉게 말라비틀어진 볏모 한 포기를 집어 올리자 뿌리에 엉긴 흙에서 짠내가 났다.

배병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입술 안쪽이 터져 피 맛이 났다.

안면도에서 일군 밑천을 묻은 땅이었다.

열한 식구의 생계와 자신을 믿고 고향을 등진 여섯 가구의 앞날이 걸려 있었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돌아갈 바다도 없었다.

열다섯 소년 시절부터 바다와 땅을 상대로 살아왔다.

땅을 원망해 보아야 소용이 없었다.


손전등을 들고 한밤의 갈라진 논에서 소금기와 죽은 볏모를 살피는 배병희

그는 눈을 감고 안면도 중장리 앞바다에서 김발을 매던 겨울밤을 떠올렸다.

바다는 말뚝을 박아 막는다고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조류의 길을 읽고 밀물과 썰물의 높낮이를 맞추어야 해태를 기를 수 있었다.

땅속에 밴 소금도 물로 다루어야 했다.

'소금은 가만히 둔다고 저절로 날아가지 않는다.'

'흙 속 짠물은 새 물로 씻어내야 빠져나간다.'

배병희가 눈을 떴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전등을 들판 너머로 비추었다.

정부가 남양만 방조제를 막으며 함께 가두어 둔 담수호, 남양호가 들판 위쪽에 있었다.

6만 평 들판에는 민물을 끌어오는 간선 수로와 짠물을 내보낼 배수로가 나 있었다.

남양호에서 흘러오는 민물을 논배미마다 가득 끌어들여 땅속 소금기를 우려내야 했다.

그러고 나서 물꼬를 터 소금을 머금은 물을 배수로로 빼내야 했다.

벼가 뿌리를 내릴 수 있을 때까지 수십 번이고 물갈이를 되풀이할 생각이었다.

새벽안개가 들판 위로 피어올랐다.

배병희는 손전등을 끄고 논두렁에서 일어섰다.

손바닥에 하얀 소금기와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논머리에 세워둔 10마력 경운기에 새벽이슬이 맺혔다.

배병희는 남양호 쪽으로 뻗은 수로를 바라보았다.

경운기 곁에 놓인 삽자루를 쥐고 수로 어귀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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