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농사와 바닷일, 자라는 자녀들
1970년대 초에도 안면도에서 이어지는 배병희의 사계절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돌아갔다. 유월의 뜨거운 볕 아래서 보리를 거두고,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익은 벼를 베어 들였으며, 찬 바람이 불면 다시 갯벌로 나가 김을 매고 말렸다. 사철 쉬지 않고 일거리를 찾아 움직이는 부지런함이 대식구를 건사하는 그의 힘이었다.
그 무렵 배병희는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멸치잡이에도 나섰다. 물살이 드나드는 갯가에 말뚝을 박고 그물을 쳐 두면 빠른 조류를 따라 몰려든 은빛 멸치 떼가 그물 안으로 가득 차올랐다. 건져 올린 싱싱한 멸치는 바닷가에 걸어 둔 무쇠 가마솥에 넣어 그 자리에서 삶아 낸 뒤, 해변 자갈밭에 넓게 펼친 그물 위에 쏟아부어 해풍과 햇살에 바짝 말렸다. 큰 밑천을 들이지 않고도 바다의 물때와 자신의 품을 보태 살림을 불리는 일이었다.
십 대 시절 한 달 내내 맨손으로 도리깨질을 하며 뼈마디가 쑤시는 고생을 겪었던 배병희는, 농사와 김 일로 모은 종잣돈을 털어 발동기와 동력탈곡기를 들여놓았다. 기계가 귀하던 시절이라 그가 장비를 갖추고 나서자 추수철이면 여러 일꾼이 그의 타작 일터로 모였고, 집에서는 함께 땀 흘린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을 대접했다.
발동기가 묵직한 폭발음을 내며 힘차게 돌아가면, 피대로 연결된 탈곡기의 회전통이 빠르게 돌며 벼 이삭에서 낟알을 시원하게 훑어 냈다. 촘촘한 쇠돌기가 박힌 회전통이 마른 볏단을 두드리고 훑어 내는 소리가 가을 들판에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물론 탈곡기를 거친 낟알에는 아직 누런 왕겨가 싸여 있어, 이를 벗겨 내어 하얀 쌀로 도정하는 일은 뒤에 방앗간에서 따로 해야 했다.
기계가 도리깨질을 대신해 준다고 해서 배병희의 손발이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논에서 벼를 베어 단으로 묶고, 그 무거운 볏단을 탈곡기 옆까지 날라다 쉬지 않고 물려주며, 쏟아져 나오는 알곡을 가마니에 받아 담아 나르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땀을 필요로 했다. 일한 대가는 현찰로만 오가지 않았다. 타작을 마친 뒤 수북이 쌓인 햅쌀 벼의 일부를 작업의 삯으로 나누어 받으며 농가와 함께 가을의 결실을 나눴다.
얼마 뒤 경운기를 들여놓은 뒤로는 무거운 발동기를 따로 싣고 다닐 필요도 없어졌다. 배병희는 경운기에 달린 자체 엔진에 피대를 걸어 탈곡기를 돌렸다. 경운기는 봄가을로 논밭을 갈아엎고 짐수레를 끄는 발이 되어 주었을 뿐 아니라, 한자리에 멈춰 서서 탈곡기나 양수기에 힘찬 회전 동력을 보내 주는 만능 일꾼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접어들며 농촌 들녘에도 경운기와 동력탈곡기 소리가 점차 흔해졌다. 남들보다 한발 앞서 기계를 들여놓고 밤낮없이 타작 마당을 누빈 배병희의 걸음 뒤에는, 겨울 바다에서 김을 길러 모은 밑천을 다시 땅 위의 농기계에 아낌없이 쏟아부은 그의 치열한 셈법과 결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겨울철 김 작업 역시 배병희의 진두지휘 아래 쉼 없이 돌아갔다. 썰물 때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갯벌로 들어가 김을 거두어 오고, 시린 물에 씻고 잘게 썰어 나무틀에 한 장씩 떠 냈다. 가늘게 쪼갠 대나무로 촘촘히 엮은 발 위에 검푸른 김을 반듯하게 펴서 말리는 일에는 겨울방학을 맞은 자녀들의 작은 손길도 보태졌다.
잘 말려 갈무리한 김은 산지로 찾아오는 상인들에게 내다 팔았다. 배병희는 바다 건너 광천 장터 등에서 김발을 엮을 대나무 같은 자재를 공동으로 사 들여 공급하며, 자신의 일터뿐 아니라 마을의 김 작업이 막힘없이 돌아가도록 앞장섰다.
가을이면 배병희는 직접 거둔 고구마를 집 맨 뒷방 윗목에 가득 갈무리해 두었다. 긴 겨울밤 구워 먹거나 쪄 먹고 달콤한 엿까지 고아 먹을 수 있는 든든한 양식이었고, 집에서 만든 감자 전분과 액젓까지 더해져 대식구의 겨울 밥상을 지탱해 주었다. 논밭과 바다에서 거두어들인 모든 것이 그의 부지런한 손을 거쳐 가족의 살과 피가 되었다.
집 안에서는 말수가 적고 엄격한 가장이었지만, 자식들을 향한 배병희의 속정은 투박한 손길 속에 묻어났다. 그는 바리캉과 가위를 들고 자녀들의 자란 머리카락을 직접 단정하게 깎아 주었고, 바쁜 농사일 중에도 딸의 입학식과 졸업식 날이면 학교를 찾아가 자식의 성장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자녀들이 하나둘 자라 상급 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되자, 배병희는 자신이 어릴 적 충분히 배우지 못했던 한을 자식들에게만큼은 물려주지 않으려 했다. 섬 안의 교육 여건을 넘어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먼저 자란 자녀들을 경기도 수원으로 보내 거처를 마련하고 학교에 다니게 했다. 자식의 배움을 위해 먼저 육지에 거처를 마련한 이 결단은, 머지않아 배병희 자신이 평생 살아온 고향 섬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디딤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