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발동기 소리와 함께 자란 아이들

옛 탈곡기 사진 정보
Kang Byeong Kee · Wikimedia Commons · CC BY-SA 2.5 · 크기·형식·톤 조정 · 2005년 촬영한 탈곡기 전시물 · 안면도 현장 아님1970년대 초에도 배병희는 안면도에서 사계절 내내 쉴 틈 없이 일했다. 유월의 뜨거운 볕 아래서 보리를 거두고, 가을이면 누렇게 익은 벼를 베어 들였으며, 찬 바람이 불면 다시 갯벌로 나가 김을 거두어 말렸다. 사철 쉬지 않고 일거리를 찾아 움직이는 부지런함으로 대식구를 건사했다.
자라나는 남매들과 대식구의 끼니를 든든히 잇기 위해, 그는 안면도에서 바다를 막아 논을 일구는 일에도 나섰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가에 둑을 쌓고 수문을 두어 물을 조절하며 끈기 있게 땅을 일군 끝에, 약 3,000평 규모의 논을 마련해 농사를 지었다. 겨울 바다의 김 양식과 더불어 피땀으로 넓힌 논밭 농사는 집안을 꾸리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멸치 건조 사진 정보
Asfreeas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 크기·형식·톤 조정농사와 김 일 밖에서도 살림에 보탬이 될 만한 바닷일이라면 집안에서 여러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즈음 배병희의 아버지는 무쇠솥과 철판을 걸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구워 내는 일을 시도하기도 했다. 애써 달여 소금은 얻었지만, 밤낮으로 불을 때는 데 들어가는 연료비가 너무 많이 들어 끝내 수지가 맞지 않았다. 집안에서 품을 들여 시도한 일이 모두 살림에 보탬이 되지는 않았던 셈이다.
반면 큰 밑천이나 연료비를 들이지 않고도 물때에 맞춰 부지런히 품을 들이면 실속을 거둘 수 있는 바닷일도 있었다. 그 무렵 배병희는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멸치잡이에도 나섰다. 물살이 드나드는 갯가에 말뚝을 박고 그물을 쳐 두면 빠른 조류를 따라 몰려든 은빛 멸치 떼가 그물 가득 걸려들었다. 건져 올린 싱싱한 멸치는 바닷가에 걸어 둔 무쇠 가마솥에서 바로 삶아 낸 뒤, 해변 자갈밭에 넓게 펼친 그물 위에 널어 바닷바람과 햇볕에 바짝 말렸다.
멸치를 삶아 말리는 일과 더불어 실치로 뱅어포를 만드는 작업도 함께 이어졌다. 멸치 외에 가느다란 실치가 잡히는 철이면, 실치를 네모난 틀에 넣고 얇게 펴서 말려 반듯한 뱅어포로 만들어 냈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을 그대로 파는 데 그치지 않고, 일일이 손으로 다듬고 말려 내다 팔며 알뜰하게 살림 밑천을 보탰다.
십 대 시절 한 달 내내 맨손으로 도리깨질을 하며 뼈마디가 쑤시는 고생을 겪었던 배병희는, 농사와 김 일로 모은 종잣돈을 털어 발동기와 동력탈곡기를 들여놓았다. 기계가 귀하던 시절이라 장비를 갖추고 나서자 추수철이면 여러 일꾼이 타작판으로 모였고, 집에서는 함께 땀 흘린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을 대접했다.
그는 조카들을 비롯한 일꾼들과 탈곡 팀을 꾸려 자기 집 농사뿐 아니라 다른 농가의 보리와 벼도 털어 주었다. 처음에는 무거운 발동기와 탈곡기를 소가 끄는 수레에 싣고 작업할 농가를 찾아다녔다. 한곳에서 타작을 마치면 장비를 다시 수레에 실어 옮기며 다음 집 일을 이어 갔으니, 기계를 갖추는 일 못지않게 사람들의 손발을 맞추는 일도 중요했다.
발동기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힘차게 돌아가면, 피대로 연결된 탈곡기의 회전통이 빠르게 돌며 벼 이삭에서 낟알을 시원하게 털어 냈다. 촘촘한 쇠돌기가 박힌 회전통이 마른 볏단을 두드리고 훑는 소리가 가을 들판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물론 탈곡기를 거친 낟알은 아직 누런 왕겨에 싸여 있어, 껍질을 벗겨 하얀 쌀로 찧는 일은 나중에 방앗간에서 따로 해야 했다.
기계가 도리깨질을 대신해 준다고 해서 손발이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논에서 벼를 베어 단으로 묶고, 무거운 볏단을 탈곡기 옆까지 날라다 쉬지 않고 대 주며, 쏟아져 나오는 알곡을 가마니에 담아 나르는 일은 여전히 사람이 땀 흘려 해야 했다. 타작을 해 준 대가는 현찰로만 받지 않고, 수북이 쌓인 햇벼의 일부를 삯으로 받아 농가들과 가을걷이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추수철 내내 기계를 오래 돌리려면 수시로 손보고 고쳐 쓰는 일도 뒤따라야 했다. 특히 탈곡 팀의 발동기에서 회전축을 받치는 부품은 마찰에 닳아 자주 손을 봐야 했는데, 부품이 상하면 직접 납을 녹여 새로 부어 만들어 쓰기도 했다. 농가를 찾아 장비를 옮기고 돌리는 바쁜 일정 사이로, 멈춘 기계를 직접 고쳐 가며 타작을 이어 가는 고된 작업이 함께 따랐다.
그 뒤 경운기를 들여놓으면서 무거운 발동기를 따로 싣고 다닐 필요도 없어졌다. 배병희는 경운기 엔진에 피대를 걸어 탈곡기를 돌렸다. 경운기는 봄가을로 논밭을 갈고 짐수레를 끄는 발이 되어 주었을 뿐 아니라, 한자리에 세워 두면 탈곡기나 양수기까지 돌려 주는 든든한 일꾼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접어들며 농촌 들녘에도 경운기와 동력탈곡기 소리가 점차 흔해졌다. 배병희는 겨울 바다에서 김을 길러 모은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땅 위에서 쓸 농기계를 장만하는 데 보탰고, 그 기계로 가을마다 타작마당을 부지런히 누볐다.

감자전분 사진 정보
Onlymyself65536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 크기·형식·톤 조정겨울철 김 작업 역시 쉼 없이 돌아갔다. 썰물 때 바닷물이 빠지면 갯벌로 들어가 김을 뜯어 오고, 시린 물에 씻어 잘게 썬 뒤 나무틀로 한 장씩 떠 냈다. 가늘게 쪼갠 대나무 발에 검푸른 김을 반듯하게 펴서 말리는 일에는 겨울방학을 맞은 자녀들도 일손을 보탰다.
당시 김 작업은 여러 사람이 역할을 나누어 맡아야 할 만큼 규모가 컸고, 그렇게 정성껏 말려 갈무리한 김은 산지로 직접 찾아오는 상인들에게 내다 팔았다. 마을에서 두터운 신망을 얻은 배병희는 어촌계장 일도 맡아, 바다 건너 광천 장터 등지에서 김발을 엮을 대나무 같은 자재를 공동으로 사들여 어민들과 나누어 썼다. 자기 집의 생산과 판매를 챙기는 한편, 마을 사람들이 함께 쓸 자재를 마련하는 일에도 앞장선 것이다.
가을이면 배병희는 직접 거둔 감자와 고구마를 집 맨 뒷방 윗목에 싸리대로 울타리를 둘러 갈무리해 두었다. 긴 겨울밤 구워 먹거나 쪄 먹고 달콤한 엿까지 고아 먹을 수 있는 든든한 간식이자 양식이었고, 아내가 감자로 만든 전분과 직접 담근 액젓까지 더해져 대식구의 겨울 밥상을 풍성하게 채워 주었다. 특히 아내가 정성껏 담근 액젓은 맛이 좋아 상인들이 사러 집으로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논밭과 바다에서 거두어들인 먹을거리가 부부의 부지런한 손을 거쳐 식구들의 끼니이자 든든한 살림 밑천이 되었다.
집 안에서는 말수가 적고 엄한 가장이었지만, 자식들을 챙기는 손길에는 깊은 정이 배어 있었다. 그는 바리캉과 가위를 들고 자녀들의 머리를 직접 단정하게 깎아 주었고, 바쁜 농사철에도 자녀들의 입학식과 졸업식 날이면 학교를 찾아가 자리를 지켰다.
자녀들이 하나둘 자라 상급 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되자, 배병희는 어릴 적 충분히 배우지 못했던 아쉬움을 자식들에게만큼은 물려주지 않으려 했다.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경기도 수원에 거처를 마련해, 큰딸과 장남, 둘째 아들을 먼저 육지의 학교에 다니게 했다. 자식들의 학업을 위해 수원에 먼저 살림을 내보낸 일은, 머지않아 온 가족이 고향 섬을 떠나 육지로 터전을 옮기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