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고심 끝에 맡은 마을 정미소 ​

낮은 지붕과 마당이 보이는 옛 정미소
옛 정미소 사진 정보사용자 제공 · 게재 허락 · 부분 사용 · 크기·형식 변환 · 옛 정미소 자료사진 · 촬영일 미상

독정리에서 몇 해 동안 억척스럽게 농사를 지으며 두터운 신망을 얻자, 이웃 농민들이 배병희를 찾아와 마을 정미소를 맡아 달라고 권했다. 고향에서 사업도 해 보고 셈과 신의가 분명한 그가 정미소를 이끌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집안에서는 아내가 강하게 반대했다. 그렇지 않아도 넓은 논농사로 뼈가 휠 지경인데 정미소까지 떠맡으면 고생이 끝도 없을 것이라는 걱정에서였다. 특히 아버지 곁에서 일을 거들어야 할 장남의 고생이 한층 더 고되어질 것을 염려했다. 배병희 역시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치며 깊이 고심했다. 그러나 자신을 믿고 힘을 보태겠다는 이웃 농민들의 간곡한 권유에다, 일곱 남매의 교육을 제대로 뒷바라지하려면 농사만 짓기보다 정미소를 함께 운영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더해져 마침내 인수를 결심했다.

1983년 10월, 배병희는 마을 농민들의 성원 속에 정미소를 인수했다. 이때부터 그는 직접 지은 벼뿐 아니라 이웃 농가들이 한 해 동안 땀 흘려 거둔 벼까지 받아 하얀 쌀로 찧어 내는 정미소 주인이 되었다.

새 출발을 한 아버지의 곁에는 든든한 장남이 함께했다. 수원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장남은 대학 진학과 아버지 일을 돕는 선택 사이에서 깊이 고민하다, 가업에 힘을 보태기로 마음을 정했다. 아들과 함께 일터를 일구고자 했던 아버지의 뜻과 장남 자신의 결심이 하나로 모인 결과였다.


막상 정미소를 맡아 보니 손볼 곳이 한둘이 아니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모든 설비를 한꺼번에 바꿀 수는 없었기에, 배병희는 밀려드는 가을 벼를 받아 찧으면서 당장 급하고 고장 난 곳부터 기름때를 묻혀 가며 하나씩 고쳐 썼다. 이 과정에는 조카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정미소를 고치는 데 힘을 보탰다. 낡은 기계를 손보는 일부터 벼를 먹으러 드나드는 참새를 막기 위해 그물을 두르는 일까지, 기계를 돌리고 곡식을 지키는 데 여러 사람의 손길이 갔다.

초창기 정미소의 동력은 50마력 조양 발동기였는데, 이 발동기를 맡아 다루는 기술자를 당시에는 ‘기관수’라고 불렀다. 시골 정미소는 발동기나 엔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면, 긴 쇠축과 바퀴, 넓적한 벨트가 그 힘을 도정기에 전달하는 구조였다. 동력 설비와 도정기가 팽팽하게 맞물려 돌아가며 옛 절구나 방아로 곡식을 찧던 고된 품을 덜어 주었지만, 그만큼 기계의 진동과 벨트 상태를 늘 세심하게 살펴야 했다.

도정은 벼의 껍질을 벗겨 내어 정갈한 흰쌀로 깎아 내는 섬세한 작업이었다. 벼의 거친 겉껍질인 왕겨를 벗기면 현미가 되고, 현미의 얇은 쌀겨층을 한 번 더 깎아 내야 흰쌀이 쏟아져 나왔다. 왕겨와 쌀겨가 빠져나가는 만큼 벼 한 포대를 찧는다고 해서 같은 무게의 흰쌀이 나오지는 않았다.

더구나 낟알에 가하는 압력과 깎아 내는 정도, 한꺼번에 붓는 벼의 양과 기계를 거치는 횟수에 따라 쌀 상태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무리하게 깎거나 압력을 잘못 맞추면 싸라기처럼 부서진 쌀이 늘어났고, 덜 깎으면 제 빛깔이 나지 않았다. 배병희는 뽀얀 쌀 먼지가 내려앉는 기계 앞에서 쏟아져 나오는 쌀알을 손바닥에 받아 보며, 덜 깎이거나 깨진 쌀이 나오지 않도록 벼가 마른 정도와 기계 소리를 살피며 도정 상태를 세심하게 맞췄다.


정미소를 맡은 뒤에도 배병희는 오래도록 지어 온 논농사를 놓지 않았다. 가을걷이를 마친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겨울철 도정 일을 하며 잠시 숨을 골랐고, 봄기운이 도는 3월부터 7월 사이에는 낡은 정미소 시설을 대대적으로 손보았다. 봄에 정미소를 수리할 무렵이면 들판의 농사도 시작되어 가을까지 이어졌으니, 배병희는 논에서 땀 흘려 번 돈을 고스란히 정미소 기계와 건물을 고치는 데 쏟아부으며 일터를 키워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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