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비바람 막는 창고와 따뜻한 밥상 ​

1996년 칠곡 기산농협 창고 앞마당에 곡물 포대를 쌓고 트럭과 경운기에 싣고 있는 추곡수매 현장
벼 수매 사진 정보칠곡군청(기록물관리실)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칠곡문화대전 · 기산농협창고 추곡수매 · KOGL Type 1 · 크기·형식·톤 조정 · 1996년 칠곡 수매 현장 · 독정정미소 아님

정미소를 인수한 뒤 여러 해 동안 배병희가 가장 공을 들인 일은 곡식을 보관할 창고를 짓는 일이었다. 창고가 마땅치 않던 시절에는 정미소 근처 이웃의 빈 논을 빌려 벼 가마니를 쌓아 놓고 그 위에 방수포를 덮어 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들판에 쌓아 둔 벼는 밤이면 들쥐가 갉아 먹기 일쑤였고, 비라도 내리면 방수포 틈으로 습기가 스며들어 애써 거둔 곡식이 상하곤 했다. 이 때문에 창고가 생기기 전까지는 낮의 고된 도정 일이 끝난 뒤에도 밖에 쌓아 둔 벼를 돌봐야 했고, 밤이면 배병희가 직접 불침번을 서며 곡식을 지켰다.

벼는 단단한 겉껍질에 싸여 있어도 물기가 많은 채로 오래 쌓아 두면 속에서 열이 나 상하기 쉬웠다. 보관하는 곳의 온도와 습도에 따라 품질이 금세 달라지고 곰팡이나 해충이 생길 수도 있었기에, 거두어들인 벼를 쌀로 찧어 내보낼 때까지 온전히 보관할 창고가 절실했다.

그렇다고 벼를 너무 급하게 말리거나 높은 열을 가할 수도 없었다. 무리하게 열을 가하면 낟알의 겉과 속에 수분 차이가 생겨 잔금이 갔고, 나중에 도정할 때 쌀알이 쉽게 부서졌다. 오래 두고 보관할 수 있을 만큼 알맞게 말리면서도 낟알에 금이 가지 않게 다루어야 좋은 쌀을 얻을 수 있었다.

배병희는 들판에 쌓아 둔 벼가 상하는 일을 막기 위해, 임시로 빌려 쓰던 이웃의 논을 사들여 번듯한 창고를 지었다. 창고가 들어선 뒤에는 무거운 볏짐을 실어 나를 길이 필요해, 대형 트랙터와 화물트럭이 수월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진입로까지 넓고 단단하게 닦았다.

도정 설비를 손보는 데에도 돈과 품이 끊임없이 들어갔다. 벼가 많이 모이면서 발동기만으로는 늘어난 작업량을 감당하기 어려워져 정미소까지 동력용 전기를 끌어오고 전기모터로 기계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나를 갖추면 다른 하나가 아쉽고 이쪽을 고치면 저쪽에서 탈이 나던 시절이라, 그는 전기 시설을 바꾸고 낡은 도정기를 수리하며 부족한 장비를 하나씩 보강해 나갔다.


마당이 곡식 실은 차들로 붐빌 때면, 배병희는 정미소를 찾은 손님들에게 집에서 따뜻한 밥을 차려 대접하게 했다. 벼를 맡기러 오거나 일터에 들르는 이웃들을 늘 후한 인심으로 맞으며, 빈속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없도록 살뜰히 챙겼다.

손님이 찾아올 때마다 아내와 자녀들도 부지런히 물이나 커피를 끓여 내왔는데, 배병희는 평소 자녀들에게도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거듭 당부하곤 했다.

“사람을 오늘만 보고 내일은 안 볼 것처럼 대하지 마라.”

아버지의 그 당부가 정미소의 변함없는 인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날마다 부엌에서 따뜻한 밥을 짓고 차를 내온 아내와 자녀들의 묵묵한 수고가 함께 배어 있었다.

나아가 배병희는 정미소를 찾은 손님을 대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을에서 형편이 어려운 주민이 있으면 가능한 한 일거리를 맡겼다. 당장 끼니와 생계가 막막한 이들에게 함께 일할 자리를 내주는 방식으로 이웃의 삶을 따뜻하게 보살핀 것이다.


작은 적재함과 4륜구동 표시가 있는 파란 기아 세레스 트럭이 골목에 세워진 모습
기아 세레스 사진 정보Chu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 크기·형식·톤 조정

1990년 장남이 결혼해 새 식구가 들어온 뒤로는 며느리가 정미소 사람들의 식사를 도맡아 챙겼다. 그해 운전면허를 딴 며느리가 배병희의 세렉스 트럭을 몰고 논으로 들밥을 실어 갈 때면, 배병희도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따라나섰다. 예전 같으면 머리에 무겁게 이고 다녔을 새참을 며느리가 손수 트럭을 몰아 나르는 모습이 못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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