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논을 팔아 지킨 농민들과의 약속 ​

수확을 앞둔 벼가 논둑 양옆으로 넓게 펼쳐지고 뒤로 낮은 산과 구름이 보이는 가을 들판
가을 논 사진 정보Shamus7792003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 크기·형식·톤 조정 · 2014년 완주 구이호 인근 · 매각 농지와 무관한 참고사진

1990년대 중반, 정미소를 이끌어 오던 배병희에게 사업 전체가 흔들릴 만큼 큰 시련이 닥쳤다. 오랫동안 믿고 거래하던 쌀 상회에서 대금을 받지 못해 약 3억 원에 이르는 큰 손실을 입은 것이다. 내보낸 쌀값이 들어오지 않자 정미소 운영이 단숨에 어려워졌고, 무엇보다 굳게 믿었던 거래처에 발등을 찍혔다는 충격과 허탈감이 컸다.

당시 정미소 거래에는 농가의 벼를 찧어 주고 도정 삯만 받는 방식과, 정미소가 벼를 직접 사들여 쌀로 찧어 파는 방식이 있었다. 벼를 직접 사들여 파는 경우에는 도정과 보관은 물론 쌀값을 받아 내는 일까지 정미소가 모두 감당해야 했다. 쌀을 가져간 상회에서 돈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정미소에 벼를 넘긴 이웃 농가들에 치러야 할 볏값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농가에서 먼저 벼를 사들인 뒤 소비지에서 쌀값을 회수하기까지는 늘 시차가 있었다. 거래에 약속어음과 가계수표도 쓰였는데, 결제일이 되어도 대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돈을 받아 내기 위해 거래처를 찾아다녀야 했다. 그동안 목돈이 묶여 있어도 새로 벼를 사들이고 도정해 실어 나르는 데 드는 비용은 다달이 꼬박꼬박 나갔다. 창고에 곡식이 수북이 쌓여 있어도 당장 농민들에게 내줄 수 있는 현금과는 달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거래 손실과 별개로 예기치 못한 도난 피해까지 겪어야 했다. 창고에 보관해 둔 백여 가마의 쌀을 하룻밤 사이에 도둑맞는가 하면, 정성껏 찧은 쌀을 실어 둔 트럭을 통째로 도난당한 일도 있었다. 원료벼를 사들여 도정한 뒤 쌀을 보관하고 운송하는 모든 과정에서 크고 작은 손실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뼈아픈 위기가 잇따르는 상황에서도 배병희는 사람과의 신의를 먼저 생각했다. 쌀값을 받지 못해 자금이 막혔을 때에도 피땀 흘려 일군 논을 팔아 농가의 볏값을 밀리지 않고 치렀다. 먹는 쌀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눈앞의 어려움 때문에 이웃 농민들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며, 농사꾼에게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땅을 내놓은 것이다.


서산 A지구 간척지에 반듯하게 나뉜 물댄 논과 논둑을 내려다본 항공사진
서산 A지구 간척지 논 사진 정보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서산 A지구 간척지 항공사진 · KOGL Type 1 · 크기·형식·톤 조정 · 2018년 서산 A지구의 참고사진

처음 독정리에 자리 잡았을 때만 해도 드넓었던 그의 농지는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줄어들었다. 앞서 여러 해 동안 창고와 진입로, 도정 설비를 갖추느라 땅을 팔아 시설 자금으로 보탠 데다, 거래 손실이 났을 때 농가의 볏값을 치르느라 다시 논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시설을 늘리는 데 든 돈과 거래처에서 떼인 돈은 성격이 달랐지만, 배병희는 고비마다 땅을 하나씩 처분해 정미소를 일구고 농민들과의 신의를 지켰다.

큰 손실을 겪은 뒤에도 배병희는 주저앉지 않고 장남과 함께 다시 정미소 기계를 돌렸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끝까지 약속을 지킨 그를 믿고 마을 농민들이 변함없이 벼를 맡겨 주었기에, 그는 흔들림 없이 일터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이후에는 정미소를 운영하며 줄어든 농지 면적을 다시 확보하기 위해 충남 서산에 대체 농지를 새로 마련하기도 했다. 배병희가 몇 해 동안 그곳을 오가며 직접 땅을 일군 뒤에는 셋째 아들이 주로 농사를 맡아 이어 갔다. 고비마다 땅을 내놓아 신의를 지켰던 그는, 줄어든 논을 다른 지역에서 다시 보충하며 가족의 농사 기반 또한 든든히 지켜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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